사념처관(四念處觀)

2011. 12. 17. 05: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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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관(四念處觀)

 

 

건강한 심리상태 유발하는 네 가지 방법
깨달음 성취하는 가장 기본 되는 출발점

오정심관(五停心觀)이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치유하고 멈추게 하는 다섯 가지 수행법이라면 사념처관은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네 가지 수행법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출발점은 사념처관이다. 몸의 존재,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신념처관·身念處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고(수·受), 변화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심·心), 현상의 공(空)함, 즉 모든 현상들이 상호의존적이고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사라진다는 사실(법·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신념처관을 할 때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즉 우리 몸이 행동할 때는 행동하는 줄을 알아차리고, 머물러 있을 때는 머물러 있는 줄을 알아차리고,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는 줄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있을 때는 조용히 있는 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들의 몸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잠시잠깐 이 몸을 빌려 사용하는 것일 뿐 때가 되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림으로서 몸에 대한 집착을 놓는 동시에 온 우주가 우리의 본래 몸임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수념처관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작용으로서 괴로움의 느낌이 일어날 때는 괴로움을 알아차리고, 즐거움의 느낌이 일어날 때는 즐거움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심념처관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심리 상태들, 즉 탐욕, 성냄, 질투심, 미움 등의 정서, 감정적 내용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법념처관은 5가지 감각기관과 의식의 대상들, 즉 색성향미촉법이 모두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흔히 신념처관의 구체적 방법으로는 부정관(不淨觀,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고 자신의 몸도 그와 같이 됨을 관함)이나 백골관(白骨觀, 묘지에 뒹구는 해골을 보고 자신의 몸도 그렇게 됨을 관함)을 소개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이는 교리적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건강하고 선(善)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데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더러움과 깨끗함의 이원적 대립을 용인하는 부정관은 어쩐지 깨달음의 출발점으로는 합당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난 호에서 이미 보았듯이 깨달음의 길로 입문하는데 장애가 일어날 정도로 탐욕의 성향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사념처를 닦기 전에 오정심관에서 먼저 부정관을 통해 치유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념처관에서 몸은 깨달음을 위한 근본이고 홈그라운드다. 몸을 떠난 깨달음은 없다. 몸을 통해 느낌을 관하고, 몸을 통해 마음을 관하고, 몸을 통해 현상을 관해야 한다. 지혜는 어떤 이원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의 이원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몸을 떠난 마음은 온전하지 않다. 흔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표현을 할 때, 그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바로 마음이 몸을 떠나 있을 때다. 몸과 분리된 느낌, 정서, 생각은 망상으로 향하는 지름길일 뿐이다.


▲서광 스님
자신의 마음이 평화롭지 않고 산만하고 불편한 순간들을 잘 관찰해 보면 그 순간 마음이 몸을 떠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몸과 마음이 힘들고 고단한 순간, 그 순간을 잘 알아차려보면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일체성, 동시성, 조화로움이 매우 중요하다.


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교수

 

 

 

 

 

불교의 명상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法)을 얻게 하는 뛰어난 길이 있는데
그것은 곧 사념처법(四念處法)이다.
과거 모든 여래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수행자는 그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
이 네가지에 대해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 버려야 한다.“







[1] 몸에 대한 관찰

어떤 것이 몸을 바로 관찰하는 법인가.
수행자가 숲 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 하고 앉아
오로지 한 생각으로 먼저 호흡을 조절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도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 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다음으로 이 몸을 관찰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보아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에 흩어지지 않게 하라.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다만 이 몸 관찰하는 데에 머물게 하라.

이와 같이 이 몸의 굴신과 동작의 상태를 사실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이 애초에 무엇으로써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밝게 보아야 한다.
솜시 좋은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놓듯이,
수행자도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놓아야 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이 몸도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 모양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해골, 한 두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해골,
다 삭아 가루가 된 해골을 보는 것과 같이 자신을 주시하되,
이 몸도 저 꼴을 면치 못하리라고 관찰한다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수행자는 몸에 대해서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2] 느낌에 대한 관찰

다음으로 우리 몸과 마음이 때와 곳을 따라
그 느끼는 작용에 대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느낌(感受作用)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는 작용이다.
즐거움을 누릴 때는 즐거운 줄 알고,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타인의 느낌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느낌이 눈앞에 나타난다.
느낌이 시시로 변해 고정된 괴로움이나 즐거움, 고정된 불고(不苦),
불락(不樂)이 없음을 알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수행자가 느낌에 대해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3] 마음에 대한 관찰

또 어떤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인가.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 “이것이 탐심이구나”라고 알고,
탐심을 버리면 버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어떤 집착이라도 놓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4] 法(現狀)에 대한 관찰

끝으로 어떤 것이 법을 관찰하는 것인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며,
또 탐욕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어날 것으로 관하고,
일어났을 때에는 없어질 것으로 관하며,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졸음, 산란한 마음, 의혹 등도 안팎으로 살피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그것이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단 한 달만이라도 法대로 닦으면
탐욕과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성인의 길에 들게 될 것이다.
이 사념처관은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져내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뛰어난 길이다.“
                                                         <中阿含 念處經>
                 






 
사라지는 육체로 不死의 개달음을 구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적은 재물로 고귀한 지혜의 양식을 사두는 것은 아름답다.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보시(布施)의 참 뜻이다.

                                           <大寶積經>



옛 인도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접하는 명상법 중의 하나가 사념처관이었다고 합니다. 이 명상법은 부처님께서도 권장하신 수행법 중의 하나로서 불경에 보면 마음이 자만한 여인들에게 신통력으로 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고 자라고 병들고 죽어서 썩어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육신의 덧없음을 깨닫게 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사념처관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것입니다.

사념처라함은

1. 몸은 부정(不淨)한 것이다.

2. 감수(感受)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3. 마음은 항상되지 못하다.

4. 법은 참된 실체가 없다.

는 위의 네가지를 항상 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중생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근심과 슬픔을 없애도록 하기 위해서, 올바른 이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해서 가야할 유일한 길이니, 곧 네 가지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몸에 대하여 몸을 관하여 머물고, 부지런히 애써서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의 욕망과 고뇌를 버려야 한다. 감수하는 것에 대하여, 감수 기능을 관찰하여 머물고, 부지런히 애써서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의 욕망과 고뇌를 버려야 한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부지런히 애써서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의 욕망과 고뇌를 버려야 한다. 법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부지런히 애써서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의 고뇌와 욕망을 버려야 한다."

구체적인 명상법을 살펴보며는

1. 몸은 부정한 것이다.

1) 호흡지켜보기

호흡이라는 기본 주시 대상을 하나 정해 놓고, 그 기본 대상을 집중해서 의식하다가 문득 다리에 통증이 오면 지체없이 의식을 옮겨 다리의 통증을 집중적으로 주시, 관찰하고, 통증이 사라지면 다시 호흡에 집중하여 관한다.
일반적으로 호흡은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관한다.

2) 몸의 동작 관찰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알아차려 인지하는 것으로 예컨대, 일어서는 동작에 있어서도, 왼팔을 옮겨 왼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왼발을 풀고 오른발을 옮겨 무릎을 세운 후, 그 오른쪽 무릎 위에 오른 손을 올리고 왼손에
힘을 주어 일어나 허리를 펴게 되고, 육체가 움직이기 전에 마음의 움직임이 선행되는 모든 것을 낱낱히 관찰하는 것이다.

3) 몸 안팎의 관찰

부처님께서는

" 비구는 가죽으로 둘러싸이고 불결한 것으로 가득찬 이 몸을 위로는 머리카락, 체모, 입술,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박, 비장, 허파, 창자, 장간막, 위, 배설물, 담즙, 담, 고름, 피, 담, 기름, 눈물, 임파액, 점액, 관절액, 오줌 등이 있다고 알아차려 인지한다."

고 경에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처럼 우리 몸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또 확인해 나가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몸이 불결하다는 것을 깨달아 집착하지 않도록 하며, 더 나아가서는 깨끗함과 불결함 이전의 자성청정함을 깨닫기 위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4) 몸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관찰

우리몸을 구성하는 딱딱한 성질의 지(地), 습윤성의 수(水), 열기인 화(火), 운동성인 풍(風)의 네 가지가 욕구를 추구하는 생명의지의 활동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보고 현상적인 사실로 나타나 있는 몸에서 몸을 이루고 있는 네가지 요소를 알아차리고, 또 원초적 의지를 알아차리며, 다시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다섯가지 요소들도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도록 하는 관찰법이다.

5) 죽고 난 후의 몸에 대한 관찰

죽은 후의 몸이 부패하여 남아있지 않고 없어짐을 관해서 생과 사가 하나임을 깨닫고 인연법에 따라 생과 사가 일어나며 그 실체는 공한 것임을 알아가는 명상법이다.



이상 1편 몸에 대한 관찰을 마칩니다. 사념처관은 사마타, 즉 지(止)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위빠사나를 행하는 명상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에서도 위에서와 같은 관찰을 통한 관법을 많이 공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불가수행에 더 가까울수도 있지만 마음만 집중하면 언제 어디서나 행할 수 있는 명상법이기에 게시판 개편을 기념(?)으로 이곳에 글을 올립니다. 
2. 감수에 대한 관찰

우선 [대처념경]을 보면

"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감수하는 것에 대하여 감수한 것을 관찰하여 머물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을 느끼면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리고, 괴로움을 느끼면 '나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리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나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알아차린다. 혹은, 육체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으면 '나는 육체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는다'고 알아차린다.
이와같이 혹은, 안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하여 감수 작용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하여 감수 작용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의 모든 느낌에 대하여 감수 작용을 관하여 머문다. 혹은, 감수 작용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감수 작용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하여 머문다."

우리는 우리들의 육체가 느끼는 느낌을 주관적 해석을 통하여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느낌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육체의 감수 작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육체적 느낌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 이전의 느낌이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는' 인연법인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순수한 활동이며, 거기에는 무지로 인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다시 말해서 주관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수 작용에 포함되어 있는 거짓 요소들을 배제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감수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위 경전의 말씀이다.

육체의 괴로움을 느낄 때, 주시자가 그것을 또렷하게 주시하게한다 그렇게 하면 고통은 사라지게 된다. 이때 고통을 주시하는 주시자는 그쳐있는 마음이면서도 또렷하게 깨어있는 의식이다. 이는 진아의 본성이며, 진아가 어리석은 주관의 산란한 감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전도된 생각으로 쌓아놓은 주관이 있고, 그 바탕에는 본성이 있다. 주관적 감수는 어리석은 마음에 진아가 상응한 인연법이고, 주시자의 주시는 사마타가 된 고요한 마음에 진아가 상응한 것이다.
사마타가 된 마음은 텅빈 마음이므로 궁극자의 본성이 그대로 비쳐 나오게 된다.


3. 마음에 대한 관찰

사람들의 삶은 나와 너를 구분해 놓고 사는 삶이다. 그리하여 나를 타자와 차별하여 애호하면서 살게 된다. 나를 좇아서 태어남과 죽음이 있게 되고, 이익과 손실, 고통과 즐거움, 명예와 오욕, 칭찬과 비난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러한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 따라서 온갖 것들이 생멸변화하는 것이다.
더구나 육체라고 하는 물리적 현상도 마음이 자기 속의 욕구를 실현하고자 만들어 놓은 도구이고 보면, 마음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온갖 거짓을 버릴 수 있는 것도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우주의 근본이 된다. 마음에 의지하여 마음의 거짓을 알아내면 그것이 곧 진리로 통하는 것이다.

" 비구는 어떻게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할 것인가? 비구는 마음이 탐을 내면 '마음이 탐낸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성을 내면 '마음이 성낸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성내지 않으면 '마음이 성내지 않는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어리석으면 '마음이 어리석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어리석지 않으면 '마음이 어리석지 않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전도되면 '마음이 전도된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다'고 알아차리고, 마음이 넓고 크면 '마음이 넓고 크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좁고 작으면 '마음이 좁고 작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위가 있으면
'마음이 위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위가 없으면 '마음이 위가 없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에 안정이 있으면 '마음에 안정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에 안정이 없으면 '마음에 안정이 없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에 해탈했으면 '마음이 해탈했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해탈하지 않으면 '마음이 해탈하지 않았다'고 알아차린다.
이와같이 혹은, 안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문다. 혹은, 마음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주시자의 '그쳐있으면서도 생상하게 깨어 있음'을 한결같이 유지시키고자 함이고, 둘째, 그렇게 정중동(靜中動)의 의식으로 온갖 마음의 생멸을 주시함으로써 그러한
망념들의 실상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이 공요해지면 주시자의 마음이 되고, 주시자의 마음이 산란해지면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마음속에는 온갖 요소가 있다. 전도된 요소나 탐욕의 요소가 있는가 함녀 깨달음을 바라는 도(道)의 요소도 있다. 그리하여 전도된 요소가 움직이면 망념으로 나타나고, 마음을 그친 채 사물을 바라보면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4. 법에 대한 관찰

법이란 마음이 생각을 일으켜 사물을 헤아리고 분별함으로써 있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있게 되는 원인은 사람들이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주고나으로 보기 때문이다. 주관이란 단지
자신의 마음이 끼고 있는 색안경으로서, 그것은 사물의 본래 모습을 그르친다.
사람들은 사물을 보면 즉시 명칭과 개념을 떠올리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 사람들은 사물의 명칭만 듣고도 그 사물을 알아낸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법이다. 법은 진실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따라 생기는 거짓
현상일 뿐이다.
석존께서는 법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오장(五障),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를 말씀하셨다. 오장이란 다섯 가지 장애라는 뜻으로, 마음을 가려서 어리석게 하고, 진리에 대한 안목을 어둡게 하는 것으로서, 탐욕, 성냄, 진리에 대한 무지, 혼침, 회한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탐욕이 생기면 탐욕이 생긴 것을 그대로 의식하고, 그것을 주시하면 캄욕은 탐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탐욕만이 아니라 노여움, 어리석음, 회한 등도 그것이 생기면 생긴 것을 의식하고, 그것을 주시하면 그것들의 참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온이란 육체와 감수, 표상, 의지, 인식 등의 정신활동으로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또한 십이처는 안이비설신의의 6가지 감각 및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인 물체, 소리 ,냄새, 맛, 느낌, 생각 등을 말한다. 일체의 법은 인체의 지각 기관과 대상이 서로 만나서 그 가운데에서 인식 분별이 행해짐으로써 있게 된다. 만약 눈이 사물을 대하더라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법은 생기지 않으며, 주위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선정에 들어 있으면 소리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소리는 있지만 법은 생기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은 심의식이 움직여서 대상에 끌리게 됨으로써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칠각지(七覺支)-마음집중(염각지), 법에 대한 조사, 선택(택법각지), 노력(정진각지), 진리의 기쁨(희각지), 기울어짐 없는 심신의 고요함(경쾌안각지), 인념선정(정각지), 일체평등(평등각지)-나 사성제 또한
아러한 것으로 어떤 사물 자체가 정해진 법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이 끌려서 인식이 행해질 때만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서계 속의 온갖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본래 그러한 법이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어낸 거짓인 것을 안다. 세계 속의 일체법은 십이처의 상호 작용에서 생긴다. 이러한 모든 법과 사물은 인연 따라 생기고, 멸하는 것으로 이를 관찰하여 그 참된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사념처 명상이다. 
 

이 마음 다시 여기에 - 노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