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만물 무비선(無非禪), 세상만사 무비도(無非道)

2012. 3. 30. 19: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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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물 무비선(無非禪), 세상만사 무비도(無非道)

최고령 원로의원이지만 참선 하루도 거르지 않아

한국현대불교사의 ‘새끼 사자’로 불려



“그는 새끼 사자였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다시 기어 올라와 어미에게 덤비는, 그런 사자 말이다. 작은 입이었지만, 한번 잡은 먹이는 절대 놓아주지 않는 끈질김과 정글의 맹수들도 두려워 않는 용맹함을 함께 갖추었음은 물론이다.”


활산성수(活山性壽) 대종사를 친견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88세로 현역 원로의원 중 최고령이었지만, 사자의 풍모와 위용은 그대로였다.


9월 11일 성수스님을 뵙기 위해 함양 황대마을을 찾았다. 덕유산 자락에 우뚝 솟은 황석산  아래 자리 잡은 황대선원은 ‘절’이라기보다 ‘수행공동체’의 느낌이었다. 법당과 선방, 요사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일가’를 이룬 듯하다. 여기서 성수스님은 재가자들을 지도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찾아오는 스님들에게도 언제나 문은 열려 있다. 


활산성수 대종사.

 

인사를 올리기 위해 주석처에 들어서니 스님은 “밥은 먹고 왔느냐?”, “비도 오는데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일행을 챙겼다. “과일부터 먹고 천천히 얘기하자”는 스님은 객지에서 온 손자들을 살피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수스님은 해방 전 출가해 1967년 7월에 조계사 주지, 1968년 5월 범어사 주지, 1972년 9월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고 1973년에는 서울 세곡동에 법수선원을 열었다. 그리고 1974년 7월 이후 회암사 주지, 고운사 주지, 마곡사 주지, 표충사 주지를 엮임 하였으며, 1978년 10월에 일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81년 1월에 18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2004년 5월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수지하였으며, 2005년 11월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역임했다. 한눈에 봐도 수 십 년간 다양한 소임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판(事判)’ 경력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스님의 치열한 구도행이다. 아직도 불교계 안팎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것들이다. 그래서 곧 바로 여쭈었다.


함양 황대선원에서 정진 중인 성수대종사가 수행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큰스님의 출가인연이 궁금합니다.

“어려서 별명이 ‘햇노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하고만 가까이 하고 또래 아이들과 놀지 않아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어른들에게 자연스럽게 원효스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원효대사와 같은 도인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님은 자라면서 도인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19세가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맏형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출가하지 않고 돌아가신 후 나가면 내가 이 동네에서 눈 뜨고 다닐 수 없으니 날 죽이고 가라”며 맏형은 말렸다. 어린 성수스님이 뜻을 굽히지 않자 맏형은 “각서를 써서 동네 어른들에게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맏형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결국 동네에 계시는 13명의 어른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하고 도장을 받은 후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후 1년여를 떠돌았지만 도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길을 가던 스님에게 “도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범어사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길로 범어사로 달려갔다. 범어사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서 제일 큰 중 나오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스님들이 몰려나와 끌어내려 했지만 스님은 계속해서 “큰 중 나오라”고 떠들었다.


동산스님.

 

잠시 후 ‘큰 중’이 나와 “총각, 큰 중은 왜 찾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말했다. “원효대사 같은 도사를 만나려고 전국을 다녔는데, 도사는 없고 절에는 놀고 먹는 중들뿐입니다. 국민들이 절에 와서 같이 놀고 먹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은 들은 ‘큰 중’은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이 ‘큰 중’은 바로 동산스님이었다. 스님은 범접할 수 없는 동산스님의 기세에 더 대응을 못하고 물러났다.


범어사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성수스님은 도사 찾기를 포기하고 산에 들어갈 생각으로 스님들한테 “근처에 제일 큰 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들은 양산의 천성산을 추천했다. 스님은 큰 산에 들어가 풀만 먹으며 힘을 키워 영웅이 될 것을 결심했다. 무나 풀만 먹고 사는 소가 온갖 짐승을 잡아먹는 호랑이와 싸워서 이겼다는 말은 들었던 것도 생각났다. 그 소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길로 천성산으로 향한 스님은 내원사를 찾아갔다. 내원사 스님들에게 천성산에서 제일 높은 암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조계암에 가보라고 해 또 걸음을 돌렸다. 성수스님은 조계암에서 은사인 성암스님을 만났다.


-은사이신 성암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성암스님은 열한 살에 사서삼경을 떼고 한학에도 능통하였던 분입니다. 당시 남방 제일선원이 있던 내원사 주지를 맡을 정도로 살림 능력도 있었습니다. 내원사 주지를 맡았을 때 논 170마지기를 농사지어 대중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해방 전에는 2달 반 동안 일보일배로 만주까지 가서 수월스님을 찾아 뵙고 공부를 배웠다고 합니다. 수월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남방으로 내려와 경허스님의 둘째 상좌인 혜월스님에게서 공부의 깊이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큰 업적을 남겼던 일타스님과 일각스님 등도 성암스님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예순이 넘어 입적하셨는데, 당신이 갈 것을 예감하고 사흘 동안 공양을 물린 채 좌선을 하다가 곁에서 함께 정진하던 저의 손을 잡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성수스님의 은사인 성암스님 진영.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 1년 동안은 은사스님이 그냥 저를 지켜보셨습니다. 저는 그때 다른 것은 입에 대지 않고 여름엔 채식만 하고 겨울에는 풀잎가루를 물에 타먹으며 나무를 해다 불을 때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스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스님은 저에게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부 생각이 없었지만 은사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어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바로 <초심(初心)>을 가지고 와서 보라고 하셨어요. 한 나절만에 다 외웠더니 <발심(發心)>도 보라고 하셨습니다. 발심도 한 나절만에 다 봤습니다. 나중에는 <자경문(自警文)>까지 3일만에 다 봤습니다. 스님은 나중에 <초발심자경문>을 10만독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념으로 해 49일 만에 10만독을 해서 외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암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했습니다. 1944년 3월 15일이었습니다.”


출가직후 성수스님은 은사스님을 따라 태백산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을 났다. 은사스님이 먼저 내려가고 수행을 계속하던 중 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해방됐다는 얘기를 해줘 산을 내려와 다시 내원사로 갔다. 잠시 내원사에 머물던 스님은 은사스님의 추천으로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에서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을 모셨다고 하던데요.

“해인사에 갔더니 구산스님과 청담스님이 공양주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내가 말을 안 듣자 조실인 효봉스님에게 불려갔습니다. 효봉스님이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공양주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효봉스님.

 

성수스님은 “큰스님, 상심(上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하심(下心)하라고 하면 그것이 되겠습니까?”라고 따졌다. 효봉스님이 다시 말했다. “너는 그럼 무엇하러 왔나?”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성수스님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에 효봉스님이 “무자(無字)가 도이니 7일 내에 해결하라”고 했다. 성수스님은 14일의 기간을 달라고 했다. 효봉스님은 “무자를 14일 내로 해결하지 못하면 내 주장자에 맞아 죽어도 아무 말 못한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라”하여 성수스님은 서약서에 지장(指章)을 찍었다. 성수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정진하다 6일 만에 우연히 머리와 몸에서 서늘한 향기가 돌더니 몸과 마음이 마치 비온 뒤 갠 날씨와 같은 체험을 했다. 


그길로 효봉스님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성수스님은 “내가 가져온 것이 도가 아니면 효봉의 도를 내놓아라!”고 효봉스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효봉스님은 “내놓고 있는데 네가 보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성수스님은 “천하의 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라고 읊었다.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그러자 효봉스님은 껄껄 웃었다. 그 뒤로도 성수스님은 큰스님들 방을 수시로 찾아가 애를 먹였다고 한다. 성수스님은 구도자의 본분이 묻고 배우는 데 있다는 것을 이 일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성수스님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선에 들고 있다.


성수스님은 “공부하는 수좌는 서른 전에 공부 되게 해가면서 그리 까불어야지, 나이 들면 그리도 못한다고 했다. 나는 강원 문턱에도 안가고 설쳐대다가 3년 뒤 해인사에서 계를 받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자시절을 마감했다. 스승을 잡아먹겠다는 용기로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구도 과정을 겪고 난 이후에 나는 비로소 효봉스님의 한없는 은혜를 헤아리고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고집스럽기만 했던 나의 구도자세는 막을 내리고 만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셨습니다. 어떻게 참가하셨는지요?

“해인사에 있다 보니 봉암사에서 성철스님, 청담스님 등이 결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암사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스님들이 공부에만 진력하기로 했다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봉암사에 가니 17명의 스님이 있었습니다. 좌장 역할을 성철스님이 했는데, 하루는 스님이 <능엄주>를 외우자고 했습니다. ‘참선하러 왔는데 이것을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른스님들이 시켜서 했습니다. 그때 성철스님이 3일 만에 외우고 보문스님은 5일, 내가 7일 만에 다 외웠습니다. <능엄주>가 끝나니 자운스님의 제안으로 <범망경>을 외웠습니다. 성철스님이 5일, 보문스님이 7일, 내가 10일 만에 또 다 외웠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자운스님이 저를 눈여겨보셨는지 하루는 나를 데려가 막국수 7그릇을 사줬습니다. 그러고는 나한테 율사(律師)를 해보라고 해요. 저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운스님께서 권하셔서 저의 뜻을 밝히고 그길로 봉암사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참선공부를 하려던 나에게 율을 공부하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떠나온 것입니다.”


봉암사 태고선원 전경.

 

성수스님은 봉암사에서 약3개월 동안 공부했다고 한다.

‘봉암사 결사’는 현대 한국불교의 출발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철스님, 자운스님, 우봉스님, 보문스님 등 4명의 스님이 1947년 가을 시작한 이후 결사 정신에 공감한 전국의 납자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입산했다. 성수스님을 비롯해 청담스님, 향곡스님, 혜암스님, 월산스님, 법전스님, 지관스님 등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결사에 참여했다. 


성철스님 등은 봉암사에서 일제를 거치며 만신창이가 돼버린 한국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결사를 단행했다. ‘부처님 법대로’를 기치로 내걸었다. 당시 스님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생활의 지표로 삼았다. 16가지 규약에는 스님들이 손수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등이 포함돼 있다.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을 배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봉암사 결사는 현대 조계종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