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곧 절대다 / 성철스님

2012. 6. 29. 10: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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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곧 절대다 / 성철스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爲度衆生故)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方便現涅槃)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不實不滅度)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常住此說法)


이 귀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오는 말씀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 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 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 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利海)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볼려고 해야

볼 수도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법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 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 전체가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전체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士)이지만,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치고 있지만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 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말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대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연 아무 것도 비치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 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 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 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 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전체가 다 내것이라는 그런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 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로 되어 있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첨부이미지

 

성철스님의 법문이십니다

아무리 알찬 법문 일지라도 우리 마음의 거울이

때가 껴있을때 그 거울은 이미 거울의 성능을 잃지만

거울이기도 하기에 닦아 내여 맑음을 또 볼수있는것이

우리네와 거울의 같음이겠지요

 

칠흙같은어둠에 햇불을 밝히어 들어간 동굴은

환하게 볼수있듯이 이 깊은 공부의 불교를 더욱 열심내여

햇불의 무정설법과 동굴의 무정설법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참자아의 불생불멸은 반드시 불도를 이룰것입니다

 

 

 

 

 

 

오늘은 나 ...  내일은 너

 

정호승님에세이 중에서....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됩니다

곡선으로 직선을 그려라

 

낙타가 쓰러지는건 깃털같이 가벼운 짐 하나 때문이란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수 있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때도 있다...

 

신은 우리가 견딜수 있을 만치의 고통만 허락하신다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없이

버리세요

과거는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

 

 

 

 

 

 

 

예수의 손에는 십자가가 밖혀 못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일로 생긴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사랑하라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패날을 가는 더 길 수도 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십자가를 등에 지고가지말고 품에 안고 가라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진주에도 상처가 있다

산산조각난 항아리를 다시 붙이려 하지마라

 

 

 

 

 

절망이라는 죄는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햇빛이 계속되면 사막이되어 버린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일이 생겨나느냐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도 이런일이 일어 날수 있다고 생각하라

 

지갑에 돈을 가득채우는 것보다 집안에 책을 가득채우는

것이 낫다

먼저 자기자신을 용서하라

천년을 함께 있어도 한번은 이별해야 한다..

 

 

 

 

 

 

 

내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님 에세이 중에서

 

 

 

 

 

 

 

Rosas & Promessa
- Katia Guerreiro

      파두(Fado)에 대해서; 수도이자 항구도시인 리스본의 번화가에서 많이 불리는 민중적인 노래이다. 이 노래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다듬어진 것은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 기원에 관해서도 도 뱃사람의 노래, 죄수의 노래, 어떤종류의 민요에서 파생된 노래,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노래라는 등 갖가지 설이다. 그러나 음악학적·역사적으로 보아 거의 확실한것은 1800년 전후에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던 도시풍이면서도 감상적인 노래《모디냐 modinha》와 경쾌한 춤노래 《룬두 lundu》가 이 노래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운명·숙명의 뜻을 지닌 파두는 리스본 민중의 삶을 노래한 민요로서 언제 들어도 구슬프고 서정적이다. 특히 파두트리스테(fado triste)와 파두메노(fado menor)라 불리는 고전적인 곡조는 가슴 속 깊이 와닿는 애조를 띤다. 2박자·4박자의 단순한 것이 대부분이며 조성(調性)은 단조가 많고,장 단조 모두 화성구조(和聲構造)는 복잡하지 않다.그러나 미묘한 싱커 페이션(당김음)과 섬세한 가락으로 되어 있어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매우 풍부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파두의 가수들 (여성이 많다)은 보통 '파두의 집(casa do fado)' 으로 불리는 레스토랑을 무대로 노래부른다. 반주는 옛날부터 포르투갈기타 1, 스패니시기타 1로 정해져 있으므로 극장 등에서 노래할 때에는 반주자를 더 늘린다. 포르투갈 북부의 교육도시 코임브라에서 불리는 파두는 파두 다코임브라라고 하며, 리스본의 파두와는 달리 세레나데와 같은 평온하고 밝은멋을 풍긴다. - Katia Guerreiro - Algemas (구속) / Katia Guerrei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