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행스님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남들 다 죽는데 나도 그때 죽으면 되는 것이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거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죽기 전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죽음에 임박하면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죽음을 함부로 생각하지 말고 진정으로 죽음을 준비해야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그동안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흔히 걸림 없는 수행자들의 죽음, 출가 장부의 죽음은 들길의 풀밭 언덕을 베고 하늘을 덮고 누우면 그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들길 풀밭에서 논두렁을 베고 임종을 맞이한 수행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느 수행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그분은 아주 젊었다. 암에 걸렸으며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침착하게 투병생활을 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여여하게 정리해 보이는 여유를 보여줬다.
얼마 후 전신으로 암이 퍼져 통증이 시작됐다. 의사가 최후통보를 한 후부터 갑자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늘을 넘기기 힘듭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의사의 말에 그는 깜짝 놀라며 절규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나는 아직 이렇게 멀쩡한데.”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동공은 확장됐다. 의사가 마른 팔뚝에서 피를 뽑았다. 그가 물었다.
“스님! 사람이 정말 이런 상태에서도 죽는단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빨리. 아니야, 아직은 아니에요. 어떻게든 살려줘요 스님. 다른 병원이라도 가게 해주세요. 어서요.”
내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둥그런 눈동자는 삶의 의지로 빛났지만 죽음의 바람은 끝내 그의 삶을 쓸고 가버렸다. 평소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죽음의 열차소리가 귓전 가까이 들려오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세상을 떠났다.
누구나 편안히 잠드는 것처럼 죽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죽어가는 모습 역시 다르다. 천차만별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진실은 죽음의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를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자신에게 시간이 제한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동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또 부질없이 허망한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방송이다. 사람들은 텅 빈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한다. 이렇게 가슴 치는 일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의미 있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가슴 저미게 느끼며 살아간다면 누구의 삶이든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 더불어 세상도 함께 맑고 향기로우며 인간의 이기심은 엷어지고 사람의 따뜻한 정이 흐르는, 그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으로 순화될 것이다.
마른 숲 빈 가지 사이로 바람이 운다. 허공에 뜬 반달은 서쪽을 향해 서 있는데 실타래처럼 엉킨 인연, 이곳에 두고 그대 홀로 어디로 가는가. 나이 서른, 못다 피고 지는 애달픈 넋이여.
우리는 죽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는가. 오늘 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기쁨으로 반길 준비가 돼 있는가.
-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