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 우주 생명/ 청화스님

2012. 9. 29. 08:2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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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스님
    - 이 “안심법문(安心法門)”은 청화(淸華) 스님께서 미국 카멜에 있는 삼보사에서 1995년 1월 동안거 중에 일주일 동안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봉행한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에서 설하신법문 - ● 한 생명, 우주 생명 생명이니까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인데 마음의 근본 고향(故鄕)인 동시에 일체(一切)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너무나 건조해져버립니다. 우리 신앙(信仰)의 대상이 생명이 아니라 논리(論理)다, 이치(理致)다, 지혜(智慧)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자기 신앙이 정말로 감성적(感性的)으로 감격(感激)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필히 부처님을 내 생명의 근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여래(十方如來)라는 것은 바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우주 전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방여래, 우주 전체의 생명이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 법계라는 것도 우주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바로 어디 다른 데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신이라, 부처님 몸이 바로 우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다 자기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항시 불안스럽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님과 가깝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는 누구나 바로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법계를 몸으로 하시기 때문에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다 들어 계신단 말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나 그대 마음 가운데나 또는 다른 동물, 식물 가운데나 다 들어 계십니다. 우리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사람만의 마음을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다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음이 안 보이지만 마음이 바로 주인공(主人公)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산(山)도 우리는 산으로 보이지만 내내야 산에도 안 보이는 산신(山神)이라, 산에 들어 있는 정기(精氣), 산 기운, 산 에너지가 참다운 산의 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을 물로만 보지만 물의 정기, 그것은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물의 정기가 바로 참다운 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주도 태양계(太陽系), 은하계(銀河系) 이렇게 구분해서 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分別)로 해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본래적인 생명 자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가운데 부처님, 하나님이 다 들어있습니다. “시고(是故)” 그러기 때문에 “여등(汝等)” 그대들이, “심상불시(心想佛時)”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제한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광대무변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시심즉시(是心卽是)” 이 마음이 곧바로 “삼십이상팔십수형호(三十二相八十隨形好)”라. 이런 것들은 불교 술어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공덕(功德)이 삼십이상 팔십수형호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님같이 청정하고 번뇌가 없고 자기라 하는 것을 떠나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사실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예수같이 잘날 것입니다. 사실 성인(聖人)들은 얼굴도 이와 같이 일체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어놔서 사람 얼굴로서 조금도 흠이 없는, 눈이나 입이나 코나 몸 어디나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서른 두 가지 큰 상과 여든 가지 작은 상이라고 구분을 합니다. - 미국 카멜삼보사 법회법문에서 -

 

 

 

 

병상에서 배우다 - 놓아두고 가기
                                                   / 법정스님

내 지갑에는 자동차 운전면허증과 도로 공사에서
발행한 고속도로 카드와 종이쪽에 적힌
몇군데 전화번호 그리고 약간의 지폐가 들어 있다.
또 올해의 행동지침으로 적어 놓은 초록빛 스티커가 붙어 있다.
연초에 밝힌 바 있듯이 금년의 내 행동지침은 이것이다. 
     
  첫째, 과속 문화에서 탈피
  둘째, 아낌없이 나누기    
  셋째, 보다 따뜻하고 친절하기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넷째,  놓아두고 가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여름 안거 결제날.
우리들 영혼의 스승 조주 선사의 가풍을 이야기한 끝에
여러 대중 앞에서 내 결심을 밝혔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것을 얻어 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이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초파일 밤, 음악회를 등지고 빗속을 달려오면서
현재 나 자신의 살림살이를 냉엄하게 살펴보았다.
나는 지금 나 자신답게 살고 있는가?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출가수행자의 분수를 지키고 있는가?

혼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시시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밖에서 간섭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
누가 되었건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음식물이 되었건 그 밖의 일상용품이 되었건
개인이 쓸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15년 가까이 그 고장에 살다 보니 이웃이 몇집 생겼다.
주로 오두막에 일이 있을때 불러다 쓰는 일꾼들이다.
얻어온 물건을 묵혀 두면 변질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3,40리 밖에 있는 일꾼들 집을 찿아가 두고 온다.
집을 비우고 일을 나가기 때문에 개들만 집을 지킨다.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개가 보는 앞에서 물건을 두고 와야 한다.                       

'아낌없이 나누기'의 행동지침이
요즘에 와서는 조금씩 그 빛이 바래져 가는 것 같다.
한마디로 이런 일이 이제는 지겹게 느껴진다는 소리다. 
그날 법회에 모인 여러 불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내 중노릇을 도와 달라는 뜻에서였다.
오늘부터  내 차에는 아무것도 싣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            
공덕으로 따진다면, 어떤 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나
공양보다는 여러 대중에게 하는 것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대중공양이 곧 제불공양,
여러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 그중 한 몫을 받으면 된다.     

올 여름 일이 있어 길상사에 나갈 때는
내 손으로 가꾼 상추을 뜯어 가지고 간다.
혼자서는 자라 오르는 채소를 감당 할 수도 없거니와
대중과 함께 공양하기 위해서다.
여럿이서 함께 먹고 있으면
혼자서 먹을 때보다 훨신 더 맛이 있고 즐겁다.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 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