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2013. 7. 18. 17: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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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붓다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다.

"그대 자신을 비추는 등불이 되라.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사십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스승이 떠나고 있으니........

사십년 동안 그들은

엄청난 기쁨과 훌륭한 경험을 맛보았다.

 

그 기간은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마치 낙원과 같은 나날이였다.

그런데 이제 스승이 육체를 떠나고 있다.

그들이 슬퍼하며 흐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붓다는 눈을 뜨고 말했다.

"울지 마라. 너희들은 지금까지 내 말을 듣지 못했더냐?

왜 우는 것이냐?"

 

아난다(Ananda)가 말했다.

"우리의 빛인 부처님이 떠나고 있지 않습까?

어둠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당신은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당신이 가시고 나면 제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는 말할 수 없이 절망스럽습니다.

저는 사십 년을 헛되이 보냈습니다.

저는 그림자처럼 당신을 따라 다녔고,

당신과 함께 지낸 나날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떠나시면 저희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붓다는....

"너희들이 우는 것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나를 믿지 말라고 수차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너희들의 내면에 빛을 창조했다면,

나를 통해 지식을 모으기보다는 너희들 스스로의 경험을

얻었다면 지금처럼 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주스리(Manjusri:문수보살)를 봐라!"

그는 근처의 나무 밑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너무나 고요하고 행복해 보였다.

 

붓다가 말했다.

"만주스리를 봐라. 가서 그에게 왜 울지 않는지를 물어보거라."

제자들이 만주스리에게 물었다.만주스리가 웃으며 말했다.

 

"왜 운단 말인가?

붓다는 나 자신의 빛을 알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저 감사할 뿐, 어둠이 덮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붓다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강물이 바다로 사라지듯이 그는 우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우주 전체로 퍼져갈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붓다는 작은 육체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향기는 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이제 붓다는 우주 전체로 퍼져나갈 것을 생각하니

나는 기쁘기 한량없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 안에서,

날아가는 새들 안에서, 바다의 파고안에서..........

모든 것에서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단지 육체를 떠나고 있을 뿐이다.

육체는 감옥이었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대들은 울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그대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되라."

그 다음에 그는 눈을 감고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또한 첫 번째 말이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 전부였다.

그는 평생 동안

똑같은 메시지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 삶의 종점에서 남는 것 / 법정스님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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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다.
        오랜만이다.
        아직은 이 산중에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다.
        내가 산을 비운 사이 
        두어 차례 눈이 다녀가면서 
        응달에 그 자취를 남기긴 했지만 많은 양은 아니다.
        난롯가에 앉아 모처럼 차를 마셨다.
        초겨울 들어 내 몸에 세월의 무게를 느끼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차를 거의 마시지 못했다.
        뭔가 속이 채워지지 않은 채 뻑뻑했고 
        내 속뜰에 겨울 숲이 들어선 느낌이었다.
        오늘 마신 차로 인해 그 숲에 얼마쯤 물기가 감돌았다,
        차의 향기와 맛 속에 
        맑은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한 동안 표정을 잃은 채 다소곳이 놓여 있던 다기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음을 미안해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요즘 가끔 생각하는 과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재물이 됐건 명예가 됐건 
        그것은 본질 적으로 내 차지일 수 없다.
        내가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곳을 떠난 뒤에도 
        그 전과 다름없이 
        그 곳에 남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평소 이웃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로 쌓아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이웃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옛말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자신의 업만 따를 뿐이다'라는 뜻이 
        여기에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날이 갈수록 사람이 살아가는 데 
        위협이 되고 있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잠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생활필수품 외에는 
        대개가 탐욕에서 기인한 사치요, 허영이다.
        적어도 굶주린 이웃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사치와 허영이 
        세상을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 전체 인구의 5퍼센트 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전 세계자원의 3분의 1 이상을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이런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미국식 생활방식이 
        세계평화와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커다란 재앙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미국이 
        새로운 패권전략인 '세게화' 경제는 
        무역자유화와 시장개방으로 탐욕을 부채질 하고 있다.
        그 그늘 아래서 자원이 고갈되고, 
        생태계가 더렵혀지고, 
        토착문화가 파괴되고,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날마다 세계 전역에서 
        3만 5천 명의 어린이들이 먹지 못해 굶어서 죽어간다.
        세계 전역에서 1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1달러로 목숨을 이어가고, 
        10억 명 이상이 마실 물을 얻지 못해 병들어 간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미국에서 생산된 곡물의 80퍼센트가 
        사람들이 먹는 식량으로써가 아니라 
        가축들의 사료로 쓰이고 있다.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가져온 기이한 현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쇠고기를 
        우리나라에서도 어마어마하게 수입해 먹고 있다.
        그리고 인류평화와 자유를 내세우고 있는 그들에 의해서 
        세계 무기 거래의 70퍼센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디.
        이웃나라와 번영을 나누지 않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일지라도 
        원한과 증오를 낳게 마련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11일, 
        미국이 본토에서 테러 공격을 받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빈부의 격차의 맥락으로 보는 견해가 
        미국 내의 양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
        이웃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느냐에 의해서 
        그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매길 수 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알았던
        우리 선인들의 순박한 그 마음씨가 그립다.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맑은 가난의 미덕을 다시 생각할 때다.
        탐욕을 이기려면 
        우선 이웃과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나는 대상마다 
        보다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임제스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목주(睦州)선사는 
        고향땅 목주의 개원사 주지로 있으면서 
        깊은 밤이면 부지런히 왕골로 짚신을 삼아 
        그것을 곡식과 바꾸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선사는 
        밤잠을 줄여가며 짚신 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 한 묶음 짚신 꾸러미를 남몰래 지고 나가 
        큰길가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신고 가게 했다.
        그래서 선사의 별명을 진포혜(陳浦鞋)라고 했다.
        '진'은 스님의 속성이고 
        '포혜'는 왕골로 삼은 짚신이다.
        지리산 자락에 홀로 사는 
        60 넘은 한 노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남들이 버린 물건을 거두어다 
        망가진 것은 말짱하게 고치고 
        해진 것은 빨아서 깨끗이 꿰매 놓는다.
        집 뒤에 선반을 만들어 거기 물건을 놓아두고 
        아무나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한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이웃에게 어떤 일을 나누었는지 스스로 묻는다.
        잘 산 한 해였는지 
        허송세월을 했는지 점검한다.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착한 일을 나누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날이다.
        이웃과 나누는 일을 
        굳이 돈만 가지고 하는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친절하고 따뜻한 그 마음씨가 소중하다.
        나누는 일을 이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이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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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사는 즐거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