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방편문의 핵심 / 청화스님

2013. 7. 18. 17: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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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핵심, 심즉시불(心卽是佛)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은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즉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렇게 못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에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보리방편문을 보면,
여기 지금 내 마음 심(心)이 바로 부처님임을 설파한 것입니다.
불교를 심종(心宗)이라고 하는 까닭과
불교의 대요(大要)인 심즉시불(心卽是佛)이 이렇게 간명하게 말씀이 됩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은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즉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이렇게 못 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에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무한대로 우주를 감싸있습니다.
김가 마음도 천지우주를 감싸 안고, 박가 마음도 역시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무장무애(無障無礙)한 마음, 즉 영체(靈體)라서
그때는 중복이 돼도 하등의 장애가 없습니다. 무장무애라,
박가 마음이나 김가 마음이나 모두가 똑같이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마음을 겉에 든 표면의식만 사용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뚱이에 꽉 가려서 이 몸뚱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은 그 ‘나’라는 것에 갇혀 있는
마음을 해방시켜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몸에 가려서
제 심성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알고 보면 다 부처입니다.
지금 이 마음이 비록 부처가 다 된 마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다 부처입니다.
마하지관도 있고 천태학(天台學)도 보다 보면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심즉시불이라고 하면
‘보통 심(心)이 아니라 도인(道人)의 심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분이 있고,
‘도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중생심(衆生心)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심즉시불의 논쟁입니다. 

한쪽에서는 도인의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이지 별 볼일 없는 중생의 마음이
부처는 아니라고 주장한 분도 있고,

중생 마음의 본바탕이 결국 부처이기 때문에 중생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해도 틀린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파가 생겨서 논란이

많았는데 결국은 중생 마음도 부처라는 논법이 이겼습니다.

삼신불을 비유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體)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空)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性)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一切現象)이 나오므로 상(相)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스님이 말한 공(空)ㆍ가(假)ㆍ중(中)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中)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假)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空)에 해당합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자리는
아미타불의 타(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彌)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阿)에 배대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阿)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청정법신 공(空)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불빛을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阿)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性)과 공(空)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 즉 법신ㆍ보신ㆍ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神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우라고 아미타불은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말을 하는 것이지 방편을 떠나서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아미타불은 저 멀리 어디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천지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가리킬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인데 마음 그것은 무엇인가?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 풀이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성이나 마음은 기묘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별것도 아닌 것인데 마음만 파고 들어가면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암마라식이고 결국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사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고 냇이고 티끌이고 원소고 소립자도 모두 파고 들어가면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으로 얽히고 설켜서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 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우리 중생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겉만 봅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 있게 살 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봅니다.

그래서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부처님을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道),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극락(極樂)은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모두 같습니다.

불경을 볼 때 이렇게도 나오고 저렇게도 나오고 하면 무엇인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相)만 말하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성(性)만 말하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體)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모르게 됩니다.

옛날에는 상만 말하는 법문만 가지고도 다 통할 수가 있었지만
현대는 다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철학이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의 철학까지도 다 배웠기 때문에
한쪽에 치우친 불교 해석을 하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특히 불교도 많이 공부를 해서 스피노자의 책을 보면 마치

부처님 말씀 같다는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뜻도 어느 하나만 가지고 이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은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법문을 다르게 했던 것이고,
지금 같은 시대에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수행법이라도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고 하는 부정관(不淨觀)이나
모든 것이 다 비었다고 보는 것만 공부해서는 불교공부를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한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實相)입니다.
그런데 실상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같은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무엇이 있으나 없으나 전부가 다 부처라고 되어버려야
그것이 본래 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한 법문이 천태지의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의 보리방편문입니다.
이 법문은 우주 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비록 체험은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는 개운한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내 불성은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불성은 아프지 않습니다.
아파도 말똥말똥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불성 자리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참 불교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염불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시라도 부처를 떠나지 않기 위해 항시 부처를 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방편염불은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저 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이 우리한테 와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모두가 부처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 청화 스님 / '마음자리로 돌아가는가르침' 에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듯이
내 마음도 날마다 깨끗하게 씻어  

 

진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설 때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살피듯이

 

사람앞에 설 때마다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하듯이

 

내 마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그대로 내 보이고
빨리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듯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위험한 곳에 가면 몸을 낮추고 더욱 조심하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더욱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듯이 내 마음도 순결과 순수를 만나면

 

절로 기쁨이 솟아나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듯이 내 마음의 방에  

 

어둠이 찾아 들면 얼른 불을 밝히고 가까운 곳의

희망부터 하나하나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좋은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