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의 중도법과 삼천배

2013. 8. 8. 20: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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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되어 주인으로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 또한 그러하다.

그 덕분에 행복은 그를 따른다.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처럼.

(법구경)

 

 

미래를 향해 마음을 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잡아함경)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품은 한때의 악한 생각이

훗날 많은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매의경).

 

 

자기의 얻음을 불평하고

남의 얻음을 부러워하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법구경)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잡아함경)

 

 

성담스님의 덕분입니다!

 

"덕분인 줄 모르는 사람은 매사를 '내가 했다.', '내가 한다.', '내가 해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은커녕 지옥이나 아수라장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후회와 불안으로 지금 여기에서 살지 못합니다.

늘 인정받아야 하고, 늘 부담감에 시달려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요즘 뭐 좀 아는 사람들이 긍정해야 잘 산다고 하도 강조를 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애는 쓰지만,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기도 바빠 영 잘 되질 않습니다.

늘 이렇게 스스로 부담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니 사는 게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관점이 바뀐 사람은 좀 다릅니다.

'내가'라는 것이 빠지고 '덕분에 했습니다.', '덕분에 합니다.', '덕분에 됩니다.' 합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겸손한 사람에게는 늘 주위의 도움이 끊이지 않게 마련이어서

하는 일이 잘되고 사는 것이 점차 나아집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필요한 것도,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물 덕분에 사는구나.', '의자 덕분에 앉아 있구나.

'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게 된 것입니다."

 

 

악한 말은 자기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입힌다.

(대장엄론경)

 

 

오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자신에게 잘 대해 줄 것을 바라지 말고

지나간 일을 원망하지 마라.

(숫타니파타)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남이 칭찬해 준다 해도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으면

아무리 남이 비난을 해도 흔들이지 않는다.

(종로게경)

 

 

자신의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구태여 남의 가르침에 시비하지 않으니

참된 수행자는 번뇌를 떠나 바른 법을 구하기 때문이다.

(별역잡아함경)

 

 

덕행을 이룬 현인은 높은 산의 눈처럼 멀리서도 빛나지만

악덕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는 밤에 쏜 화살처럼

가까이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법구경)

 

 

겁먹은 이들은 두려움을 벗어나고

속박당한 이들은 자유를 얻게 하며

힘없는 이들은 힘을 갖추게 하시고

마음은 서로서로 아끼게 하소서

(입보리행론)

 

 

중생의 심성은 본래 깨끗하여

어떤 얽매임의 번뇌로도 결코 더럽힐 수 없다.

마치 허공을 더럽힐 수 없는 것처럼.

(대방등대집경)

 

 

성철 스님의 중도법과 삼천배

 

성철 스님의 중도법문의 요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부처님의 윤회설은 방편이 아니고 정설이니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에 따라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윤회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둘째, 불교가 과학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가르침이 정확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불교사상에 입각한 것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셋째,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가 하나로 통하듯 모든 양변을 버릴 때 선악이 없는 불국토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으로 돌아온 후 또 하나의 특징은 신도들의 삼천배가 정례화 됐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과 나눈 대담에서 성철 스님은 신도들에게 삼천배를 하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흔히 삼천배를 하라고 하면 나를 보기 위해 삼천배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는 것은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찾아오지요.

그래서 그 기회를 이용해서 부처님께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천배를 시키는 것인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하라.

자기를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삼천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원택 스님의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중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고 질투하지 말며

내가 남보다 낫다고 교만하지 마라.

(우바새계경)

 

 

베풀 때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말 것이며

또한 베풀 상대를 가려서도 안 된다.

(열반경)

 

 

원수를 없애고 싶으면 자기 마음의 번뇌를 없애라

번뇌는 몸을 해치는 근본이다.

(아함경)

 

 

선행을 하고서도 그것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모든 번뇌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부지런히 선행하되 마음에 집착을 두지 마라.

(별역잡아함경)

 

 

탐욕 때문에 늙어가고

분노 때문에 병 들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죽어가니

이 세가지를 없애면

불도를 얻으리라.

(법구경)

 

 

바른 견해를 배워 불어나도록 힘쓰면

이것이 세간의 등불이 되고

몇 천배의 복이 생겨 마침내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으리.

(법구비유경)

 

 

부드럽고 진실한 말로 남을 대하고

늘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라

(법구경)

 

 

내'가 화를 낸다!(서광스님)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화내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화내는 사람은 못생기고 수면 장애가 있다.

그가 얻은 이익은 잃어버리게 되고 말과 행동으로 명성에 손상을 입는다.

화에 압도되는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 얻은 부와 지위를 파괴한다.

친척, 친구, 동료 들이 피한다.

화는 상실을 가져온다.

화는 마음을 불태운다.

 화내는 사람은 그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이 화냄에서 태어나는 줄을 알지 못한다.

화내는 사람은 붓다의 법을 보지 못한다.

화에 의해서 지배받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다.

그는 나쁜 행위를 마치 선한 행위인 것처럼 행하고 나서는

뒤에 화가 없어지고 나면 불길 속에서 타는 것 같이 괴로워한다.

그는 연기에 휩싸인 불꽃처럼 가려져 있고 망가져 간다.

화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데도 그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악에 대한 공포가 없고, 말에 존중함이 없다.

화에 지배받는 사람은 어떤 밝음도 줄 수 없다.

화는 신구의 삼업을 잘못 행하게 함으로써 결국 악도에 떨어지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왜 화가 날까?

화는 우리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느끼거나

무시나 모욕 등 부당하게 취급받거나 또는 거부당했다고 생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자,

그에 대해 보복하려는 경향성과 관련된 에너지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화의 에너지도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다.

붓다 말씀에 화내는 자를 향해서 화를 내지 말라 했다.

왜인가? 화내는 자는 마치 화를 품은 압력밥솥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내는 자를 향해 화로 맞대응하는 것은 활활 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스스로 타는 자를 향해서 자아의식을 발동하는 것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일이다.

화내는 자를 향한 최상의 무기는 무아다. 왜냐하면, 화는 아집의 불길이기 때문이다."

 

 

 

완전 연소하는 삶!(월호스님)

 

"불가에서는 죽는 것을 '몸 벗는다' 혹은 '몸 바꾼다'고 말합니다.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어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는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지요.

더 좋은 옷을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이른바 '웰다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생전 복덕을 많이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잘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치고 기뻐할 일입니다.

다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한이 있어 슬프겠지만,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잘 된 일입니다.

인생이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쁜 옷을 갈아입는 경우의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복을 짓지 않았거나,

마음공부를 소홀히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픕니다.

가엾습니다.

다른 이의 죽음은 내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는 죽음을

언제라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현세에서 많은 재산과 보물을 얻고

저절로 그 복을 받으며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

(출요경)

 

 

 

말로써 실수 하지 않도록 침착하게 행동하라.

말을 절제하여 말로 인한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쌓아라.

(소부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