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 . / 무불스님

2013. 9. 19. 10:4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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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발전은 두가지 집착을 깨트리는 현명함에 있다.

두가지 집착이란, 나 라고 하는 '아집'과 객관에 대한 '집착'인 법집을 말한다.

 

두가지 집착에서 벗어니면 세가지 '3空'이 나타난다.

아공-나도 공하고. 법공-대상도 공하고. 구공-나와 대상이 함께 공한 것을 말한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하늘과 태양이 저절로 나타나는 이치다.

구름을 걷히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태양과 푸른하늘을 다른 곳에서 옮겨오는 것이 아니다.

구름만 걷히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도리다.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 「아공」 이다.

진리의 법, 법의 진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법집이란 땟목에 비유한다.

강을 건너러면 땟목이 있어야 하고, 강을 건넌후에는 땟목이 필요 없으니

땟목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강을 건너준 땟목이 고맙다고 짊어지고 다닐수는 없다는 이치다.

 

법에 집착하면 스스로 자신을 힘들게 한다.

자기 아집에 자기 논리에 갇쳐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공간 활용을 잘하는 것이 마음안의 공간을 잘쓸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을 붓으로 글씨나 그림으로 그릴수는 없다.

마음은 상대방에 따라 쓰여지고 쓸 수 있다.

마음으로 상대를 속였다 하드라도 결국 자기 자신에 고통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일심 ! 한마음.

유,무를 떠나 독자 적인 청정함을 말한다.

청정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법'이라 하여 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모양이 없다 하여 유에 머물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나 이면서 둘이요. 둘이 아니면서 하나이다.

 

마음을 「중도」 라 한다.

양극을 여의 였으나 중간이 아니요.

"유와 무의 법이 다 이루어 지고  시와 비의 주장이 제 각기 다르지만.

온전하고 완전한 것을 드러낸다"  하여 중도라 한다.

 

마음을 밝게 쓰면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 된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란 놈을 알고보면,

                세세생생 대 광명이다.

자기 마음만 밝게 쓰면 만사가 형통하는 것이다.

 

심 청정하면 처처가 연화계이다. 

마음이 청정 하면 곳곳이 연화꽃 세계이다.

자기를 밝게 쓰고. 자기를 깨끗하게 사용하라.


                설해목(雪害木) / 법정스님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老僧)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 들어주는 데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 버리고 안 계신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히 살아 있는 노사의 상(像)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 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들여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이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殺人鬼)
                          앙굴리마알라를 귀의(歸依)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
                            (神通力)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慈悲)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Giovanni Marradi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