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0. 20:3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 선사의 답장 3-1
又
老龐이 云但願空諸所有언정 切勿實諸所無라하니 只了得遮兩句하면 一生參學事畢이어늘 今時에 一種剃頭外道가 自眼不明하고 只管敎人으로 死擖狚地休去歇去라하나니 若如此休歇인댄 到千佛出世라도 也休歇不得하야 轉使心頭로 迷悶耳니라.
본문 ; 방거사(龐居士)가 말씀하였습니다. “다만 모든 있는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간절히 모든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두 구절의 뜻을 알면 일생동안 참선 공부하는 일을 다 마칩니다.
요즘에 한 종류의 머리 깎은 외도가 있어서 자신의 눈은 밝지 못하면서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가르친다 하니 만약 이와 같이 쉬고 또 쉰다면 1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또한 쉬지 못하고 마음만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강설 ; 대혜 선사가 증시랑에게 답장하는 세 번째 편지다. 먼저 방거사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 구절의 뜻을 알면 일생의 참선공부를 마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존재는 유형이나 무형이나 유정이나 무정이나 일체를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평범한 안목으로는 있음을 더욱 있게 하고 없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있음은 없음이 근본 바탕이다. 그르므로 근본 바탕인 없음을 잘 이해하여 모든 있음[諸所有]을 근본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생(生)은 사(死)가 근본이다. 우리들 인생은 없음에서 왔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또 텅 빈 공간이 근본이 되어 지구나 기타 모든 위성들이 떠다니게 된다. 만약 텅 빈 공간이 없으면 지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일체 건축물도 공터나 공간에서 건립되었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공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비어있는 종이라야 글씨를 쓸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모든 삶은 있음[有]이지만 실은 없음 위에서 영위되고 있다. 그러므로 없음은 있음의 어머니다. 방거사의 말을 쉽게 풀면 이렇다. “모든 있음을 있음의 근본인 없음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굳이 없음을 있음으로 여겨 살지 말라.”라고 하겠다.
다음에 지적한 “쉬어감”의 문제는 대혜 선사가 일생을 통해서 가장 힘주어 배척한 내용이다. 대혜 선사가 묵조선(黙照禪)을 힘써 배척하고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내용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본질은 고요한 면도 있고 움직이는 면도 있다. 그런데 “쉬어감”이란 다만 고요함만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중도를 잃고 치우친 것이 된다. 중도란 조화며 균형이다. 참선이 이상적인 삶을 위한 수행이라면 당연히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결같이 고요함만을 위하여 쉬어가고 또 쉬어가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외도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리더라도 쉴 수 없을 것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
불자님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높게 보입니다.
황금들녘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 중국 춘추시대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본처에서 태어난 <과>라는 현명한 아들과 젊은 애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위무자는 중병에 걸리게 되자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네 서모를 개가 시켜라.”
얼마 후 위무자가 병이 위독해지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아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네 서모를 나와함께 묻어라.”
그 당시 가부장적 사회라 첩과 말이나 쓰던 물건은 주인이 죽으면 함께 무덤에 묻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 <과>는 그의 서모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가까운 친 인척과 이웃 사람들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A?않았다고
<과>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과>는 “사람이 병이 깊으면 본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바른 정신이 있을 때 하신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그 후 진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과>는 싸움터에 나가 적장 <두회>에 쫒겨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 오던 <두회>가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묶여져 있던 풀에 걸려 푹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적장 두회를 <과>가 사로잡아 진나라를 구하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과>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시집보내준 서모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그대의 바른 판단으로 나의 딸을 살려주었기에 저승에 있으면서도 그대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다가 오늘 풀을 묶어서 적장두회가 발목에 걸려 넘어지게 했다오.”
이 가슴 뭉클한 이야기에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결(結)은 맺을 결이요, 초(草)는 풀초요, 보(報)는 갚을 보요, 은(恩)은 은혜은자이니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죽어서라도 갚는다는 뜻입니다.
◇ 그렇습니다.
영가들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그 보답을 한다고 했습니다.
산 사람들 중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들은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느끼는 망자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면 그 영가는 반드시 그에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수년전 필자가 오봉정사란 절에 있을 때 어떤 보살님이 찾아 왔습니다.
그 보살님는 수차례의 꿈에 몇 달 전에 교통사고 죽은 시 조카 부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숙모, 우리 너무 배고파. 목도 말라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조카들의 아버지가 교회장로라 제사를 지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담을 통해서 그 불쌍한 젊은 영혼들을 위무하고 절에서 3일 동안 제사를 지내주어, 따뜻한 밥과 음식으로 주림과 갈증을 달래주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낸 첫날 그 조카 영혼들은 숙모의 꿈에 나타나 “숙모 감사해요. 이제 배도 부르고 힘도 생겼는데 먼 길을 가려고 하니 신발이 없네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부 신발을 사서마지막 제사때 향불에 그을려 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새로 몸을 받을 때까지 중음신이 됩니다. 이 중음신을 보통 귀신이라 합니다. 이 중음신은 중생이므로 비록 몸은 없지만 의식으로 배고픔도 느끼고 목마름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은 가장 가까운 이의 꿈을 통해서 잘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차식(생각을 빌리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중음신이나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객사를 하여 언제 돌아가신지 모르는 영혼도 있고
또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주지 못하는 영혼도 있고
후손이 있어도 위 사례처럼 기독교를 믿는 영혼들도 있습니다.
불자님들
주변에 제사상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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