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핵심 思想 / 법상스님

2014. 5. 28. 17: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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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의 핵심 思想 / 법상스님 

 

금강경의 핵심 思想이 금강경의 四句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등도 마찬가지로 사구게를 살펴봄으로 해서

그 경전에 나타난 思想의 核心을 공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 경전에 나타난 사구게를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수행상담에 질문해 주신 분께 답변차 쓰는 글입니다.

 

먼저 金剛經 四句偈 입니다.
먼저 사구게(四句偈)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금강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지요.

[金剛經]에 보면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해석해 보면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受持爲他人說) 그 복덕은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殊勝)하니라."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사구게를 수지하고 타인에서 설명해 주는 공덕에 대하여,
이 공덕은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합니다.
네 글귀로 되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짧은 한 문구 만이라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명해 주라는 말인데 꼭 사구게로 정형화된 틀 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경전에 등장하는 그 어떤 짧은 법문이라도 소중하게 받아지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의 사구게를 살펴보지요.
금강경에는 사구게가 곳곳에 많이 등장하지만
우선 핵심이 되는 네 가지 사구게를 옮겨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른 상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一切 現象界/現實世界의 모든 生滅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첫 사구게부터 살펴보면
범소유상,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라고 하면
頭頭萬物 一切 現象界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眼耳鼻舌身意  六根으로 感知할 수 있는 모든 對相을 의미하지요.

바로 일체 모든 현상계가 皆是虛妄 즉 空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 일체 현상계가 상이 아님을 卽 개시허망임을

空함임을 바로 보면 즉견여래한다, 즉 여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世上의 모든 存在의 바탕은 텅~ 비어 있는 空입니다.
그렇게 텅~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모두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바탕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因緣따라 모든 것을 나툴 수 있습니다.

나무와 나무를 마찰시킴으로써 불을 얻었다면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분명이 이렇게 현상계에 불이라는 相을 가지고 나투었단 말입니다.

불은 因緣의 和合에 의해서 현상계에 나툰 것일 뿐입니다.
世上 모든 萬物  卽, 凡所有相은 다 이처럼

因緣따라 잠시 생겨나고, 因緣이 다 하면 消滅될 뿐
이 세상 어느 것도 固定되어 不變하는 實體로써 存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觸할 수 있는 모든 상(相)은
다만 因緣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 固定된 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相이 相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면 바로 如來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世上 모든 萬物이, 凡所有相이, 한낮 인연따라 허망하게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아 정견(正見)할 수 있다면 그 어떤 相에도,

그 어떤 境界에도, 그 어떤 現象界에도 마음이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가며 그 어떤 境界나 現象界가 우리 앞에 다가오더라도 그것들이
다만 인연따라 허망한 경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임을 알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고 如如하며 惺惺寂寂하게 깨어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如如不動하여 오고 감이 없는 如來를 볼 것이란 말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바로 깨치면 그 마음자리가 그대로 부처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 사구게는 말하고 있습니다.
"色(物質)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聲香味觸法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

보통 우리의 의식이  마음을 일으킬 때는
六根, 眼耳鼻舌身意, 卽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해서 마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하는 마음 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색성향미촉법인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대상에 마음이 머무른다는 말은 대상에 마음이 執着한다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대상에 마음이 집착하고 밉다고 대상에 마음이 집착하여
대상을 좋고 싫음의 분별하는 마음으로 덮씌우고는
그 좋고 싫은 분별심으로 덮어씌운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투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對相은 늘 虛妄한 空함이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인

것이지 固定되어 영원히 좋고 싫은 대상으로  딱 定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修行者는
色聲香味觸法인 對相에 마음이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무름 없는 마음의 行(無執着行), 함이 없는 마음의 行(無爲行)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實踐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집착, 방하착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것 또한 對相으로 定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六根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形相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된 道를 行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합니다.
눈귀코혀몸뜻 六根으로 觸할 수 있는 對相 卽,色聲香味觸法은 모두가 虛妄한

空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다음 사구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形相으로 나를 보거나 音聲으로서 나를 求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당연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어때요?
一切 現象界의 모든 生滅法(나타나고 사라지는 존재들)이란
다 虛妄하며 空하여 다만 잠시 因緣따라 生하고 滅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꿈과 같고, 幻想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잘 觀察할 수 있어야 합니다.

"一切 現象界의 모든 生滅하는 것은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觀해야 한다."

이처럼 금강경의 사구게는
緣起思想, 空思想, 無執着思想, 無我思想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結局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십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虛無한 것이니까 세상 살 필요도 없고,
다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錯覺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고, 서러워하고, 욕심부리며 살던
바로 그 괴로움의 對相인 이 現象 世界 모든 것이  空하여 虛妄하고 꿈같고, 幻影같고,

번개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현실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도 말고, 걸리지 말고
如如하게 시원스럽게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現象 世界 모든 것은 다 空하여 虛妄하고 물거품 같은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生覺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이 놈'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事實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놈은 누구냐?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다 空하고 虛妄하다는데

그럼 이 세상 모든 것이 虛妄함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 그 바탕에 나라는 存在를 이끌고 가는, 이 空하고 虛妄한 現象界를

이끌고 가는 '이 놈'인 본래자리, 眞面目, 自性佛, 佛性, 主人公, 한마음 이라 불리는

바로  '본래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相이 相이 아님을 보면 如來를 볼 것이란 말은, 이 현상세계 모든 相들을  空하고

虛妄하여 꿈과 같으며 환영과 같고 헛개비 같다고 바로 觀하라는 말이고,
그렇게 현상계의 생멸법 즉, 이 세상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그렇게 바로

觀했을 때 如來를 본다, 즉 부처가 되고 깨닫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의 실천법이 바로 應無所住 而生其心인 것이지요.
세상 다 空하고 虛妄한 것이니까 다 필요없고, 마음을 일으킬 것도 없다가 아니라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고 살라는 말입니다.

마음 일으키지만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요?  이 세상 모든 것이 緣起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虛妄한 것이고 空한 것이니 執着할 對相이 없기 때문이지요.
虛妄하고 空한 현상계의 모든 것을  잘 觀할 수 있어야 마음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실천은 힘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때요?
이 세상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잘 관(觀)하며 살 수 있어야
세상 모든 것이 다 空하고 虛妄하다는 事實을 바로 볼 수 있고
그런 正見을 통해 應無所住 而生其心을 실천할 수 있으며,
나아가 如來를 보며(見性) 부처(成佛)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누군가의 나무같은 친구로. .*


세상을 아름답게 살려면 꽃처럼 살면 되고
세상을 편안하게 살려면 바람처럼 살면 된다.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바람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험한 산도 아무 생각 없이 오른다.

무심히 떠가는 흰구름을 보고
어떤 이는 꽃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새같다고 말한다.
보는 눈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 두고
어떤 이는 빠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느리다고 말한다.
세월의 흐름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남을 칭찬하는 소리엔 저절로 활짝 열리고
남을 욕하는 소리엔 금방 닫히는 그런 예쁜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칭찬보다 욕이 많은 세상에 한 쪽만을 가지더라도
그런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때 참았더라면 그 때 잘 했더라면
그 때 알았더라면 그 때 조심했더라면...
지금은 아무렇게나 보내면서 자꾸 그 때만을 찾는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꽃은 피었다 시들기에 더 아름답지.
젊음은 붙들 수 없기에 더 소중하고
우정은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더 귀하지.

태풍을 막아 주는 나무, 홍수를 막아 주는 나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맑은 공기를 주는 나무
나무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나무가 되면 더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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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심포니 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