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염불 수행/법상스님

2014. 9. 10. 11: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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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염불 수행



생활염불수행에 대하여
순간순간 다가오는 경계를 직바로 녹이는 염불수행

생활염불이란
삶 속에서 안팎으로 다가오는
온갖 경계(境界)를 녹이고 비우는 염불명상으로써,
경계에 따라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들을
바로 관(觀)하고 염불로써 맑게 비워내는 수행이라 하였습니다.

경계란 안이비설신의 육근으로 끄달리는
색성향미촉법이란 여섯가지 경계(六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눈귀코혀몸뜻의 여섯가지 우리 몸의 기관에서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의 대상 등
여섯가지로 느끼게 되는 온갖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
'좋다' 혹은 '싫다' '그저그렇다' 하고 느껴지는 경계를
눈의 경계, 즉 안계(眼界)라 하며,
귀로 칭찬과 비난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
'좋다' '싫다' '그저그렇다'고 느껴지는 경계를
귀의 경계, 즉 이계(耳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귀로 무엇을 듣든, 코로 냄새를 맡든, 혀로 맛을 보든
몸으로 접촉을 하든, 생각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키든
우리 몸에서 촉(觸)한 대상에 나름대로의 온갖 분별을 일으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의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도
여여(如如)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어떤 경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괴로움'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에서도 여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수행자는 늘 여여해야 합니다.
여여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휘둘리지 않아
늘 고요하고 당당하며 거칠 것 없는 밝은마음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여여함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 것이 있을 때,
마치 전쟁터의 투사와 같이
온전히 깨어있어 치열하게 싸워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의 총칼앞에서
성성히 깨어있을 수 있는 이유는 생명이 오고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칼은 이번 한 생의 생사를 갈라놓고 말지만
경계에 휘둘리게 되면 몇 생이 될지 모르는 수억겁을
윤회의 괴로움 속에서 헤매여야 할지 모릅니다.

수행자라면 마땅히 경계를 대함에
한 치라도 여여함에서 벗아남이 있다면
두눈 부릎뜨고 내면을 관하며
온전히 내 안에서 녹이고 비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방하착 생활염불의
수행터는 우리의 직장이며 일터요, 가정이며 학교이고,
수행재료는 마음안팎으로 다가오는 온갖 경계들입니다.

삶과 일상을 떠나 그 어떤 아란나(수행하기 좋은 장소)를 찾는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의 의미와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란나'는 무쟁처(無諍處), 적정처(寂靜處)로써
고요하고 수행하기 좋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는 그 어떤 특별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살면서도 일체의 시비가 끊어지고 갈라진 적정의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이처럼 마음은 본래로부터 적정처요, 무쟁처로써 아란나이기 때문에
걸퍼덕지고 아우성치는 저잣거리 속에서라도 흔들림이 없는
여여하고 밝게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바로 그런 밝게 깨어있는 본래 마음자리를 밝히는 수행이 바로
방하착 생활염불수행인 것입니다.

생활염불의 수행재료는
마땅히 삶 속에서의 온갖 경계들이 될 것입니다.
분주한 하루 일과 가운데 내 앞을 스치는
온갖 경계들이 바로 나의 닦을 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경계를 두려워하고
경계에 휘둘리는 이유는
경계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경계를 대할 때 성성히 깨어있는 서슬퍼런 눈빛으로 대한다면
경계를 바로 볼 수 있는 정견(正見)의 바른 시야가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생활염불수행의 첫째는
경계를 있는 그대로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불수행도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를 대하고도 경계를 바로 관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닦아볼 염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온통 닦을꺼리 투성이입니다.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됩니다.
밖에서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도
휘둘리는 주체는 바로 '나' 이며 '내 마음'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바로 나의 닦을꺼리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는 옳고 상대방이 잘못한 일일지라도
상대방의 행위는 내 마음의 거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안에 진심이 없다면 상대방 또한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며,
설령 화를 내더라도 내 안에 진심이 없다면
그 상대방의 진심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공부,
그 어떤 경계에서라도 여여함을 잃지 않는 공부
그것이 바로 생활염불수행의 요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온갖 경계를 따라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을 철저히 관하였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그 마음을 닦아
내 안에서 녹이고 비우며 버리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순간 순간 올라오는 '욱' 하는 마음
그 마음, 그 느낌과 철저히 하나가 되어 성성히 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경계며,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
이 모두는 결코 나와 둘이 아님을 명확히 해 두셔야 합니다.
그 마음과 철저히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과 하나가 되어 관하면서,
그 마음에 대고
끊임없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마음에 대고 염불을 하며
염불소리가 내면의 울림이 될 수 있도록
쩌렁쩌렁 염불송 하나 하나를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은
경계를 맑게 비우고 녹여 줄 것입니다.
생활염불수행은 이렇듯 삶의 경계들을
맑게 비우고 버릴 수 있게 해주며 내 안에서 녹여줄 수 있습니다.
크게 괴로운 일도 그 괴로움에 대고 염불을 하고 나면
담담해 지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며 그 어떤 경계라도
나의 마음의 여여함을 한 치라도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여지없는 나의 수행재료이며 닦을꺼리입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가르침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천이 따르게 되면 가르침은 내안에서 생명력을 얻습니다.

실천해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어설픈 분별심도 모두 방하착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오직 굳은 믿음으로
생활 속에 다가오는 모든 경계를
이렇듯 맑게 비워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반드시 온몸으로 체험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 :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