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7. 10:0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전도선언의 현대적 의의
마성(摩聖)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종교의 생명은 포교에 달려 있습니다. 포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종교는 소멸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붓다의 가르침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면 문화유산이나 골동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의 철학이나 사상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로서의 불교를 널리 포교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붓다의 간절한 소망은 자신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전도선언(傳道宣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교의 포교 이론을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전도선언’입니다. 이 메시지는 붓다가 법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 승단에 60명의 제자가 형성되었을 때 선포된 것입니다. <쌍윳따 니까야(Sa?yutta-nik?ya, 相應部)>에 언급된 ‘전도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갈 것이다.
[SN Ⅰ, pp.105-6; Vin Ⅰ, pp.20-21, “Bhagav? etad avoca. Mutto-ham bhikkhave sabbap?sehi ye dibb? ye ca m?nus?, Tumhe pi bhikkhave mutt? sabbap?sehi ye dibb? ye ca m?nus?. caratha bhikkhave c?rika? bahujana-hit?ya bahujana-sukh?ya lok?nukampak?ya atth?ya hit?ya sukh?ya devamanuss?na?. M? ekena dve agamettha, desetha bhikkhave dhamma? ?dikaly??am majjhe kaly??a? pariyos??a-kaly??am, s?ttham savyanjana? keval!a-paripu??a? parisuddha? brahmacariya? pak?setha. Santi satt? apparajakkha-j?tik?, assavanat? dhammassa parih?yanti, bhavissanti dhammassa a???t?ro. Aham pi bhikkhave yena Uruvel? Sen?nigamo ten'upasa?kamiss?mi dhamma-desan?y? ti.”; 전재성 역주, <쌍윳따 니까야> 제1권(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pp. 242-3 참조.]
위 <쌍윳따 니까야>에 대응하는 한역 <잡아함경> 권39, 1096경(繩索經)의 ‘전도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너희들도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으니, 너희들은 인간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많은 이익을 주어 인간과 하늘을 안락하게 하되, 짝지어 다니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다니도록 하라. 나도 지금 울비라(鬱?羅) 마을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간 세간을 유행하리라. [<雜阿含經> 제39권 제1096經(<大正藏> 2, p.288b), “爾時, 世尊告諸比丘: ‘我已解脫人天繩索, 汝等亦復解脫人天繩索. 汝等當行人間, 多所過度, 多所饒益, 安樂人天. 不須伴行, 一一而去. 我今亦往鬱?羅住處人間遊行.’”]
팔리 <쌍윳따 니까야>와 한역 <잡아함경> ?승삭경(繩索經)?의 내용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쌍윳따 니까야>에 언급된 전도선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그의 저서 <아함경>에서 이 전도선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이원섭 옮김, <아함경> 개정2판 (서울: 현암사, 2001), pp. 57-63.] 이른바 첫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을 가지 말라’이고, 둘째 부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라.’이며, 셋째 부분은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전도선언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부분은 인천(人天)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부분은 뛰어난 사람도 법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는데, 그들도 법을 들으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부분은 나도 법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간다는 것입니다.
첫째 부분은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전법자의 자격’을 말한 것입니다. 사실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전법자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해 본 결과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앎과 체험이 없으면 남에게 확신을 갖고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자기는 제도되지 못했지만 남을 먼저 구제해야 한다(自未得度先度他)’는 말도 있습니다.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차원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포교에 대한 열의나 의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합니다. 붓다의 근본교설에 대한 이해 없이는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안목과 체험 없이는 오히려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전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왜 불교를 포교해야 하는가?’라는 ‘전도의 목적’을 밝힌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교의 존재 이유를 밝힌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이 바로 전도선언의 핵심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목은 곧 대승불교의 근본이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전도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야만 합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부분은 전도의 정신을 말씀한 대목이다. 거기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온다. 나는 앞에서 재래 불교도들의 상식을 뒤엎고, 붓다가 출가한 동기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붓다의 출가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셈이 되었던 것이며, 그 혜택은 멀리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이 사실이겠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하여 붓다가 출가한 동기가 중생 구제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결과를 가져다가 동기로 삼는 것이어서, 붓다의 출가의 진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아함부의 경전들이 이 점에 대해 얼마나 신중한 표현을 취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출가에 대해서나 수행에 대해서나, 그리고 정각(正覺)이라든지 최초의 설법에 대해서까지도 중생 제도와 결부시키는 것 같은 표현은 전혀 쓰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이 전도선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오고, 또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인천이란 인간계와 천상계의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뜻이니,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과 함께 중생(衆生) 즉 모든 생물을 가리킨다. [마스타니 후미오, 위의 책, pp.57-8.]
마스타니 후미오의 주장에 의하면, 붓다는 처음부터 중생 구제를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붓다가 출가한 것은 오직 당면한 늙음?병듦?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세상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겨 법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전도선언이며, 그 이후 붓다의 가르침은 전도선언에 나타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처음부처 중생 구제를 염두에 두고 출가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룬 뒤,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널려 펼쳤다는 것입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붓다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모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가라고 타일렀다. 그것은 참으로 붓다다운 전도의 선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대목의 마지막 말씀 즉 “둘이 한 길을 가지 말라.”는 구절이다. [마스타니 후미오, 위의 책, p.58.]
이 부분은 다른 종교의 교화방법과 다른 불교만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불교사 2,500여 년 동안 불교를 전파함에 있어서 피를 흘리지 않았으며,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박해를 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불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법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이 전도선언에 담겨져 있는 붓다의 포교정신을 그 제자들이 바르게 받아들여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부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 부분을 ‘설법의 이상적인 양상이 제시된 대목’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도선언에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간략히 ‘초중종(初中終)의 선(善)’이라고 불렀다. 또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의문구족(義文具足)’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수행’을 설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예수가 열두 제자를 떠나보내면서 한 말에 비길 때 흥미진진한 바가 있다.”[마스타니 후미오, 위의 책, p.58.]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전법의 방법’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하지 않으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것은 서론?본론?결론을 갖춘 논리 정연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포교함에 있어서 초기불교에서는 믿음보다는 이해를 더 중요시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믿음이 이해보다 앞선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는 균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은 그의 저서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믿음과 이해’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나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무명(無明)만 증장(增長)하고, 이해는 있으나 참다운 믿음이 없으면 삿댄 견해만 증장한다. 그러므로 알라. 믿음과 이해가 서로 겸해야만 도(道)에 들어감을 빨리 얻는다.”[普照思想硏究院編, <普照全書>(昇州: 佛日出版社, 1989), p.49,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故知 信解相兼 得入道疾.”]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이해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결국 올바른 실천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옛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있으되 실천이 없으면 마치 눈은 있는데 다리가 없는 것과 같고, 실천은 있으되 믿음이 없으면 마치 다리는 있는데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믿음과 실천이 둘 다 온전하면 마치 밝은 눈과 건강한 다리와 같아서 능히 천리를 갈 수 있다.”[“信而不行如有眼無脚, 行而無信如有脚無眼, 信行雙全如明眼健脚, 能行千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에서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라는 이 대목을 잘못 번역하거나 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 대목을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전법자가 청정한 범행을 몸소 실천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했다할지라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감화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전법자는 청정한 범행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공허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부분은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법을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을 먹지 않아도 병이 저절로 낫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은 교화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의 약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병이 낫는 사람도 교화가 불필요한 사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교화의 대상은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붓다의 가르침을 만나면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만나지 못하면 어둠 속에 헤매다가 타락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포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부분은 붓다가 금후의 예정을 말씀한 대목입니다. 이른바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는 것입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붓다가 진리를 깨달은 보리수 근처의 마을이다. 우루벨라로부터 바라나시까지 왔던 붓다는 이번에는 다시 우루벨라를 향해 돌아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곳은 붓다로서는 가장 추억이 많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이 새로운 가르침의 씨가 아직 한 알도 뿌려지지 않았다. 먼저 그 마을로 돌아가자. 이렇게 생각했을 붓다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마스타니 후미오, 위의 책, p.63.]고 했습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이 부분을 너무 글자 그대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확대 해석하면 이것은 붓다가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처럼 자신은 가만히 있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도를 위해 떠나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 자신도 몸소 전도의 길로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실제는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이후 45년 동안 교화를 위해 길에서 길로 유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단 하루도 편안히 쉬지 않고 끝없이 법을 전하기 위해 유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불제자의 첫 번째 사명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 체득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명은 그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전해 붓다의 교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 <법회와 설법> 통권 제173호, 2009년 10월호, pp.10-20
오늘은 부처님 제자들의 해야할일과 그리고 우리의 게으름이 얼마나
우리가 해야할 부처님법의 전수를 등한시 한것인가 에 대해
마성스님의 부처님법 전도의 의의를 통해 알려드리고 싶어 보내드립니다
항상 편안하십시요
애모 愛慕 / 김소월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에는 달빛, 매화꽃이
그림자는 산란이 휘젖는데
아이 눈 꽉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
봄철의 밀물소리
물나라의 영롱한 구중궁궐 고요한 곳
잠 못드는 용녀龍女의 춤과 노래, 봄철의 밀물소리
어두운 가슴 속의 구석구석
환연한 거울 속에, 봄 구름 잠긴 곳에
소슬비 나리면 달무리 둘려라
이대도록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고요함의 지혜(stillness speaks) / 에르하르크 톨레
나의 생각과 감정과 지각과 경험은 내가 아니다
내 삶의 내용물은 내가 아니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만물이 생성되는 공간이다.
나는 순수의식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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