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3. 11:4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 청화스님
- 산은 산 물은 물
조사어록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즉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법어가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 중생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실제적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 존재의 본성품도 못 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고마문령(瞽馬聞鈴)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聞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을 하여
인연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법 가운데
참선하는 법이 최상승의 법이며,
바로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에서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참선 공부는 우리 불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45년설도 있으나 49년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방편설이 많이 있습니다.
연도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12년 동안에 하신 법문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상식적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의 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을 흔히 초기 법문,
즉 초기 근본불교의 법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 만중생의 본성품과 현상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방편법문을 하신다 할지라도
부처님 법문 속에는 모든 심심미묘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생들은
그저 문자나 말에만 집착하여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 대해서,
'있다' 혹은 '없다'에 대해서,
일반 세간적인 윤리도덕의 차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기 법문은
우리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하신 법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나 유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든지,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든지,
명상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정도의 법문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에는
부처님이 금생에 나오신 뜻이
그냥 세간적인 범주,
일반 윤리도덕적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다 공(空)하다는 공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49년의 설법 가운데
22년은 반야설(般若說), 즉 공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심심미묘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 공(空)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관념도
모두 공(空)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지혜에서 볼 때는
그 모든 것이 공임에 분명합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가 도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증도가> 가운데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하고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말을 풀어 보면,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ㆍ축생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든 대천세계가
텅텅 비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 '너' '내 것' '네 것'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다 해탈하고
모든 번뇌를 다 멸진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삼계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번뇌에서 해탈을 해야만 참다운 자유가 있고,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이며,
또한 바로 행복론입니다.
본래적인 인간의 참다운 자기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의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하??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에 구속되어서 해탈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와 행복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들의 근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이라는 공의 도리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을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의 도리를 모르는 차원에서의 위선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깨달은 성자 외에는
모두 위선자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성자는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달은 분입니다.
내 마음의 본체가 무엇인지,
우주의 참다운 본모습이 무엇인지,
참다운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분이 성자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본다 하더라도
깨달은 입장에서 쓰인 글은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시비를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2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고
반야의 도리를 말씀했던 것인데,
그냥 비었다고 하면 우리 중생은 잘 납득을 못합니다.
어째서 비어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생겨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결합되어 있는 것이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항상성이 없으니까 무상(無常)이요,
공간적으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공이요, 무아입니다.
이것은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한 것입니다.
물리학이라 하는 것은
물질의 도리를 체계 있게 공부해서 밝힌 것으로,
바로 과학입니다.
그런 물리학이
모든 것은 본바탕에서 보면
다 비어 있다는 도리를 증명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제로(zero),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다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법이 공이다"
"모든 것이 다 허망무상하다"라는 반야의 도리는
이미 과학자들도 다 증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다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며,
그야말로 허무주의에 빠지기 딱 쉽습니다.
다 비어 있는데 무슨 행복이 있으며
선악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공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인연 따라 모아져도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바로 무상이요,
따라서 공간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요,
또한 이런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참다운 실상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같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야사상에서 말하는,
단지 비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본 것이 비어 있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있다, 없다, 좋다, 궂다와 같은 차원만 공부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산은 저런 푸른 산이고,
물은 저런 영롱한 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근래에 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런 도리를
그렇게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이
삼독심에 가려 있는 범부심에서 보는 것이지
청정한 불안(佛眼)이나 혜안으로 보는 안목은 아닙니다.
독심을 다 떠나버리고
번뇌를 다 여의어 버린 부처님 눈,
성자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시는 그런 안목에서는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산,
법계성품 그대로의 산이란 말입니다.
물론 물도 그냥 물이 아니고 법성의 수(水)입니다.
법성인 산이요, 법성인 수요,
실상인 산이요, 실상인 수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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