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실지견(如實知見)/청화큰스님

2015. 3. 20. 14: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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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지견(如實知見)

 

다시 표현할 필요가 없이
부처님 가르침이나 또는 공자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기타 모든 철학들은
인생고(人生苦)를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위없는 행복을 맛 볼 것인가? 하는데 집약이 됩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우리가 각기 반성하면은 알 수가 있듯이
절대로 완벽한 존재는 못 됩니다.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또는 인정도 많고 사랑 충만한 그런 쪽으로 보든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는 결손 된 존재인 것이지
절대로 완벽한 존재는 못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못 났다 하더라도
가장 위없는 아름다움,
가장 더없는 행복,
또는 다시없는 우주를,
모두를 다 알아야 쓰겠다는,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야 만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
그런 것을 추구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바와 같이
어떤 누구나가 생로병사라 하는
한계상황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상대적인 존재인데도,
완벽하지 못한 존재인데도 완벽한 행복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자리,
본래생명자리는 완벽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개한 때는
인간의 본 성품이 완벽한 자리다,
이런 것을 모르고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하면은 그냥 타력(他力)적으로,
바깥에 있는 힘으로 해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미개한때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즉 다시 말씀드리면 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우주의 본체(本體)가 무엇인가?
이런 거창한 철학적인 문제 이런 것을 모르고 공부하는 그런 공부는
구분해서 말하면 아직은 소승(小乘)공부입니다.
대승(大乘)과 소승과 여러 가지 구분법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이러한 공부 면에서 이렇게 엄격히 구분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러한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모르고 하는 공부는 소승공부인 것이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우선 지혜로 이치로만은 분명히 느끼고,
나는 뭣인가?
나와 우주와의 관계는 뭣인가?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하는 공부는 대승공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 요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오늘 오신 분들은 여실지견이란 말씀을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여실지견이라, 같을 여(如), 열매 실(實), 즉 실다울 실(實)자,
알 지(知)자, 볼 견(見)자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 인고 하면은
우리가 그냥 기억력이 좋고 학식이 많아서
여러 가지 복잡한 학문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이 여실지견은 사태 그대로 자기 같으면은 자기 그대로 말입니다.
사람 같으면은 사람존재는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존재 그대로, 나무 같으면은 나무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무의 근본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모든 것의 현상과 실제(實際)를,
현상과 그 본질을 아는 지혜, 이것이 여실지견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상대적인 지혜라 하는 것은
여실지견이 못 됩니다.
그냥 겉만 보고 겉만 다 들떠 있단 말입니다.
겉만 보니까 분명히 겉에는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겉만 보니까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천차만별로 구분 되어있습니다.
이것만 아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여실지견,
사실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나 철학이 어렵다,
여느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어렵다,
속물(俗物)은 속물대로 아무 때나 휩쓸려 살면 쉬운 것인데,
철학이나 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러면은 그 어려움이 어디가 있는가?
우리는 종교나 철학을 공부할 때에
어려움이 어디가 있는가를 분명히 느껴야 씁니다.
종교나 철학이 아니고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이라.
문제를 문제그대로,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종교철학의 문을 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종교나 철학의 문에 쑥쑥 들어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 못 들어가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상대적인 병에 모두 걸려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있다 없다하는 상대적인 유병(有病),
유루병(有漏病)에 걸려 있단 말입니다.
병에 걸려 있으면서 더 심각한 문제는 뭣 인고 하면은
자기가 스스로 그런 병에 걸려 있는 줄 모른단 말입니다.
분명히 아프기는 아픈데
인생은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분명히 괴로운 것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하기 싫어도
이별을 할 만한 요인을 심어 놓으면 꼭 이별 되고말고
아무리 늙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도
세월이 흐르면은 늙고 말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대적인, 인간들이 그것 밖에는 못 봅니다.
그것 밖에는 못 보는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자기가 보지를 못합니다.
아프지 않겠다고 그래서
아프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안 죽을 수 없고, 안 늙을 수 없고, 겪지 않을 수가 없고,
겉만 보고 사는 인간들은
그런 것을 모두가 다 우리가 받아야 씁니다.
받아야 쓰기 때문에
고생은 끝도 갓도 없이 연속된단 말입니다.

사업도 실패 안해야 쓰겠다.
내가 뭘 구해야 쓰겠다.
그런 것을 제대로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들은
유(有)․무식(無識) 간에
총명하든 미련하든 그런 차이를 불문(不問)하고서
모두가 다 지금 병에 걸려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성자(聖者)나 나오면은
첫소리로 하는 것이 뭣 인고 하면은
먼저 회개(悔改)하라,
먼저 참회(懺悔)하라 말입니다.
회개하고 참회하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잘못 본 그것을 우리가 바로 봐야 쓴단 말입니다.

지금 보면은 앞서도 말씀드린바 같이
누구나가 다 완벽한 행복을 구합니다.
행복을 구하면서도 자기는 조금도 바꾸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받고 있는 불행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분명히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인데
그 원인마저도 모르는 것이니까
자기 불행을 다른 사람들이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금생에 아니면 과거 전생까지 더듬어 올라 갈 때는
꼭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금생에는 애매하다고 느낄란가는 모르겠지마는
더듬어 올라가면 꼭 그렇습니다.

따라서 자기 지금 불행은
현재 자기 정도가 지어서 받았으니까
앞으로 불행을 내가 면해야 쓰겠다, 이럴 때는
현재 자기 정도보다도 바꾸어져야 쓴단 말입니다.
생각도 바꾸어져야 쓰고
우리 행동도 바뀌어야 쓴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도 그전대로 하고
인생관도 그전대로 가지고 말입니다.
욕심도 그전대로 부리고 이렇게 있으면서
복(福)은 받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참 이것은 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못 봅니다.
그런데 그 성품 우주의 근본고향(根本故鄕)자리는 뭣인가?
생명의 본체는 뭣인가?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은 뭣인가?
이렇게 성품이 뭣인가 까지는 보통은 압니다.
보통 알지마는
아, 성품은 하나의 이치(理致)인가?
또는 성품은 하나의 인격(人格)인가? 말입니다.
이런데 있어서는 우리가 안 보이는 것이니까
보통은 의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일반 철학도(哲學道)는 그냥 이치로만 구한단 말입니다.
이치로만, 땀 찍찍 흐르고 구합니다.
또는 과학도(科學道)는 실험으로만 분석과
실험으로만 구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제한된 마음이 바뀌어 지지 않고 이치로만 구한다고 그래서,
성품 자리는 이것은 물질이 아닌데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성품 이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는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치로만 구하는,
이치 이것은 상대법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치로만 구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 자리가 얻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딱 막히고 만단 말입니다.
철학도, 내내야 철학이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도 이치로만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딱 막히고 맙니다.

역시 신비적(神秘的)인 초월(超越), 판단중지라.
판단 딱 그만 두고서
우리 마음을 영원(永遠)의 경계에다가 딱 해방을 시켜버리는
깊은 명상(瞑想)에 들어 있어야
참다운 물질이 아닌 불성(佛性)을
우리가 성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이치로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가르침은
이것은 삼보(三寶)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 가르침이나 공자님 가르침이나
본질적으로는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인 상황,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붕괴가 돼있고
또는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그런 과도기(過渡期)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선구적(先驅的)인 사람들은
현대생활을 바로 한다고 생각할 사람들은
꼭 모두를 통합 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하나의 원리(原理)를 알아야 쓴단 말입니다.
그걸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현대를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미래적인 비전을 내세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내 종교(宗敎)는 제일 좋고
그대 믿는 종교는 이것은 별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현대를 현명하게 살아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다종교(多宗敎) 사회라,
싫든 좋든 간에 자기 아들도 기독교를 믿을 수가 있고
자기 아내도 불교를 믿을 수가 있고 말입니다.
한 가족 가운데도 그와 같이 믿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성을 화해(和解)를 시켜야 쓸 것인데
화해를 못 시키면 결국은 싸울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은
공자님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가르침이나 석가님가르침은
이것은 화해 할 수가 없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화해를 할 수가 없다고 그러면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런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다만 문자로 표현하고 말로 표현하고 말입니다.
그런 표현하는 것이 그때그때 시대상황과
그때그때 교조(敎祖)의 성격적인 차이,
이른바 이념(理念)의 차이 때문에 표현을 달리 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이 잘 못 알아먹는 것이지
본질은 하나란 말입니다.

불교(佛敎)만 좋다하고
다른 종교(宗敎)는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은
굉장히 기분이 사나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기독교를 비방하고
또는 공자의 논어(論語)를 비방하고
그런 사람들이 논어 한번을 제대로 봤던가.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유가복음서나 그런 복음서를
제대로 정말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봤던가.
이렇게 반문(反問)하고 싶거든요.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마는
기독교가 1900년 세월동안 무수한 순교자를 냈습니다.
기독교 가르침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쳤단 말입니다.
또는 무수한 사람들이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고 했습니다.
지금도 수백만의 신부 수녀가 있습니다.
만약 진리가 아니라고 그러면은
천구백년 동안이나 그와 같이 무수한 비판(批判)을 견디고
지금까지 나왔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또는 우리 불경(佛經)가운데는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그런데 들어있는 진리가 안 들어 있는가.
불경가운데는 기독교 바이블 내용도 몽땅 다 들어있습니다.
유교(儒敎)의 논어 내용도 몽땅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해를 안 하면은 결국은 다 같이 공멸(共滅)이라,
다 같이 허물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화해를 안 하면은
한편만 허물어지고 한편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죽고 맙니다.
기독교인구도 지금 17억이란 말입니다.
이슬람도 지금 10억 인구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꼭 하나의 통일원리(統一原理),
과학과 종교도 역시 절대로 다른 것인가?
과학과 종교도 절대로 다르지 않단 말입니다.
과학도 역시 현상적인 문제,
현상적인 문제는 굉장히 정밀하고 성실하게 풀어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현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응당 과학자의 의견을 우리가 경청해야 쓴단 말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과학적으로는 하나의 분석(分析)과 실험실측(實驗實測)이기 때문에
이런 걸로 해서는, 인간의 개념으로 해가지고서
분석하고 실험하고 실측하고 이런 걸로 해서는
역시 공간성(空間性)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이치로 구하는 칸트철학이고 니체철학이고 말입니다.
또는 쇼펜하우어고 그런 철학도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철학을 많이 냈단 말입니다.
헤겔철학 같은 것도 굉장히 위대한 철학입니다.
철학을 냈지마는 그래도 그것이 이치로만
상대적인 개념이론, 이성으로 해서는
그때는 한계(限界)가 있단 말입니다.
해결을 못 시킵니다.

따라서 정말로 정작 인생과 우주의 본성품은 뭣 인가?
그 자리를 보려고 생각 할 때는
그놈의 이론을 딱 정지를 시켜야 된단 말입니다.
정지를 시키고서 우리의 생명자체를 관조해야 쓴단 말입니다.
관조(觀照), 왜 그런고 하면은
생명자체를 관조한 사람들인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그런 성인(聖人)들,
성인들은 그리스 성인들이나 모두가 다 생명자체를 관조해서
생명자체하고 하나가 딱 됐으니까 성자(聖者)입니다.
성자라는 것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 본질인 그 자리를
우주의 본 진리하고 하나가 딱 되고,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나 모두가 다
여법이 진리에 다 맞게 시리,
진리의 법도(法道)에 맞게 시리 행동하는 분이 성자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생명의 내 본바탕이 뭣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다 준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 뭣인가?
자기생명을 모르면은 가치가 없습니다.
하늘을 주고 땅을 준다 하더라도 내가 뭣인지 모르고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인가?
이것도 모르면은
외형적(外形的)인 문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 가르침은
이른바 삼보(三寶)라 하지 않습니까.
삼보(三寶)라, 세 가지 보배란 말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대체로 삼보를 믿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삼보는 우리 불자가 삼보 모르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삼보, 삼보 해서 이치로는 다 알지마는
심정적으로 감명 깊게 시리 잘 못 깨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문 할 때는
과거(過去)에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은 뭣 인고 하면은
과거에 몇 번 할 때는 잘 못 알아먹었다 하더라도
어느 계기에 자꾸만 되풀이 하면
그때는 그 순간 아, 그렇구나.
우리 법문이라는 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면은
그때그때 과거에는 몇 번 들어도 모르던 것이
나중에는 순간 찰나에 깨달아버린단 말입니다.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 이해인 

 

하늘은 구름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세월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날엔 항상
하늘이 열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지혜로운 삶 / 잡보장경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여 주고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편안과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제 몸 위해 턱없이 악행하지 말고 핑계대어 정법을 어기지 말며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질투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 부려 만용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며
지혜롭게 중도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니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중도를 지켜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임금처럼 위엄을 갖추고 구름처럼 한가로워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Jag Har Hort Om En Stad Ovan Mai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