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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 대체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물리학의 주장대로라면 그 누구도 물리학이 말하는 진실을 알 길이 없지 않겠는가? 또 설사 알 수 있다고 할진댄 이는 이미 물리학 이외의 다른 것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대로라면, 어떤 유기체도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세계가 물리학이 설명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어떤 유기체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물리학이 아닌, 보다 빈틈없이 분명한 그 어떤 원칙, 가장 수승한 유추 방식을 알지 않고선 안 된다."
-물리학과 경험에서- 버트란드 러셀 주1
이상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사전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이 우주의 온갖 신비를 다 푸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믿던 시대에는 생명에 대해서도 유물론적인 해석이 확고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열쇠를 돌리기만 하면, 다시 말해 원자의 세계를 열어 제쳐 조사하기만 하면 모든 물질적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원칙들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과 사고 과정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종교와 같은 초자연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기계적 과정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물리학의 이와 같은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천문학, 심리학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 등 여러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이 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자 세계의 속성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만약에 어떤 특정한 순간에 있어서 모든 원자들의 상대적 위치, 방향 그리고 힘(원자력)을 알기만 하면 미래의 시공(時空)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다고까지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은 문제는 자료를 모으는 일 뿐이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열쇠는 마침내 돌려졌다. 원자의 구조가 분석된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은 뜻밖에도 원자는 그 자체가 에너지화한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한 가지 형태의 에너지 방출에서 다른 형태의 에너지 방출로 변환하는 과정이며, 전자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멸해 가는 사이클이라는 것이었다. 양자 역학이 발견되자 기존의 엄격한 인과율의 체계에 새로운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다. 즉 예측률은 원자 집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타당하지만 개개의 원자들에 대해서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발견된 것이다. 결정론적 인과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많은 원자 집단들을 취급하는 경우에 한해 통계적, 또는 수량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념은 이른바 '불확정성의 원리 주2 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사실 순수 과학자들은 엄밀히 말해서 현상을 탐구할 뿐 현상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므로 철학적 관점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불확정성 원리'는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성립될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일체의 예외적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인과법만으로 이 우주가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우주관에서는 자유 의지가 발붙일 틈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의 개념이 정적 개념으로부터 동적 개념으로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견지해 오던 유물론적 이론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이는 과학 그 자체의 성격상 자신이 취급하고 있는 물질이 실체를 갖고 있거나 또는 실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식 자체를 대하는 과학의 자세에 있어서만은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현상계를 조사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 자신의 두뇌 활동을 들여다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기라고 여기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인 것이며, 따라서 그로부터 벗어나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용이할 리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이 제시하는 우주의 그림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감관을 통해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그의 감관이 '여기에 형상과 실체를 갖춘 고체성의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해 주는 상황에 대해서, 물리학은 '거기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바의, 영구한 변천 상태에 있는 힘들의 어떤 배열이 있을 뿐이며, 더구나 그 고체적 형상이란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 주3 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소위 물질적 대상이란 것도 그 자체는 주로 공간이라고 물리학은 이야기해 준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말 그대로의 '고체적'인 것과 같은 것은 없으며, 그것은 단지 감관이 제공하는 기만적 자료에 근거한 언어적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외부에 생기는 사건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우리의 감관이며, 따라서 물리학이 다루는 자료들도 이 감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그 그림을 우리는 진실한 그림으로 믿어도 좋을 것인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그림은 순전히 이론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로 수학적 공식의 문제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 마음이 가장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학의 우주는 전적으로 정신적 개념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주4 의 시-공 다차원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도 그려낼 재주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이 증명해 주는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우리의 정신적 경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 차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물리학자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하는 일까지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마음 그 자체가 완전히 현혹적인 허구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러셀은 서두에서처럼 "만약 물리학이 진실이라면,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혁명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대상을 구분하는, 주객관계에 의한 인식 자체가 송두리째 문제가 된다. 가령 마음이 어떤 인상을 입력시킬 때 즉, 흔히 말하는 대로 '어떤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보여진 그 대상이 우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과 조금이라도 닮은 어떤 사건이 시 공속에 실제 일어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은 것이가? 이 점에 대해 과학은 어떤 확실한 해답도 주지 못한다.현상적 우주에 대한 과학적 관점은 이러한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는데 이 국면을 좀처럼 타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주의 모습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마음 그 자체가 현상계의 전개 과정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하며, 일체의 주객 관계 내지 인과의 영역을 떠난 초월적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리학이 아닌 어떤 것을 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까지는 과학이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우리가 불교 원리인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 설명하는 우주의 모습이 불교 철학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되기 때문이다. 우주 전개 과정의 무상한 흐름[諸行無常]과 물질의 본질적 무실체성[諸法無我]은 불교 교리의 기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리상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선정(禪定) 과정을 통해 실제로 관찰,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 전개 과정을 '자아'라고 착각하기를 멈춘, 즉 불교 용어로는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주5 을 여읜 마음에게는 원자의 구성 요소들이 보여지고 느껴지며, 그것들이 생멸하는 고[諸行皆苦]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본래 불교의 출세간적 지혜는 과학이 하차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불교는 궁극의 진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제반 발견이, 오늘날 보듯이, 불교의 지혜를 일일이 확인시켜 주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현상들이 부질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은 범어의 '마야(maayaa)'라는 단어에 의해 포괄되고 있다. 이 단어는 보통 환영(illusion)이라고 번역되지만 반드시 정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야란 말이 뜻하는 범위는 '상대적 실재'란 말이 뜻하는 범위와 같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수준에서는 실재이지만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어떤 차원, 혹은 어떤 파장 선상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한 고체는 오관을 통해 나타난 모습대로의 단단한 고체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식에게 그 고체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며 어쩌면 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원자들의 집합체로 보여질 것이다. 그 때 이 '고체'라는 대상은 주로 공간으로 보여질 것이며, 그 공간 속에 원자 성분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넓게 퍼져 있고, 또 우주의 온갖 행성계들이 인력과 척력에 의해 서로 유지되고 있듯이 이 요소들도 오로지 전기적 인력과 척력에 의해 각기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어떤 법칙의 작용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차원의 의식에서 보면 그것이 비존재(非存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공(空) 또는 무위법(無爲法) 주6 일 뿐일 것이다. 그 차원은 인과율의 영역 밖일 것이며, 시공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을 의식 대상으로 하는 보통의 마음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일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생도 멸도 없는 저 열반(涅槃)이라는 궁극적 상태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현상적 지각의 시공 연속체(4차원 세계)는 초월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여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체가 점차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져 의식 수준이 올라갈수록 이전 수준에서보다 점점 더 비물질적으로 보여지게 되는 이런 현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범주처 주7 와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사범주처에 이르면 의식은 조잡한 물질의 환영으로부터 해방되게 되며, 물질 대신 그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성을 인식하게 되고, 궁극에 가서는 '물질'이란 그 법칙의 표현에 불과하며 이 표현 방식은 다양한 인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제각기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욕계(欲界)의 식(識)에게는 루파(ruupa),즉 색은 단단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차원에서는 나타나 보이는 그대로가 존재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을 얻은 식에게는 인과법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색 대신에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존재의 세 가지 특징이 인지되게 된다.
지성의 차원에서 보면 인류는 발전의 종착점에 이르른 듯한 징후들이 보인다. 즉 물질적 현상에 대한 분석에 관한 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물질의 궁극적 비밀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작용하는 인과의 영역은 이미 다 밝혀냈지만 마음이 탐구해 내지 못하는 세계가 저 너머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다음 발전 단계는 전혀 새로운 다른 차원에 위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인간과 인간의 거주처인 이 지구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성 관념을 우주적 모형에 맞춰 완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들이 그 동안 충분히 발생되었으며, 여태껏 판쳐 오던 정령 숭배나 유물론적 견해에 비해 보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우리의 이성도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고 있다. 개념적 사유의 한계성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하는 주체인 '자아'와 관찰되는 객체인 '생'의 전개 과정을 구별해 내겠다는 가망 없는 헛 애를 쓰느라고 끝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집착을 불교에서는 유신견이라 부르며 인간의 향상을 가로막는 가장 기본적인 장애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 생의 전개 과정 이외에 따로 '자아'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나' 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언어는 단지 문법적인 인습에 불과한 것이다. 사유의 전개 과정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언어를 쓰지 않고도 표현해 낼 수 있다. 이 점은 버트란트 러셀이나 그 밖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들에 상응하는 것이 심리학에도 있다. 정신적 과정을 분석함에 따라 여태껏 숨겨져 있던 많은 정신 활동들이 밝혀졌으며, 마음의 의식층과 무의식층 간에 분명한 인과 관계가 작용한다는 것도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개인이 쌓아 온 경험을 저장하고 있는 무의식은 심리적 경향(Tendencies)을 마련해 주며, 이 경향은 의식적 활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한 상태의 의식과 그 다음 상태의 의식 사이에 일종의 연결체 역할을 하는 유분(有分) 주8, 즉 생명 연속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주9 교수는 의식이 점과 같은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세운 최초의 심리 학자였다. 그는 이런 점-순간(point moment)들이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지속하는 실재처럼 인식되지만, 실제 그것들은 단지 연속물을 이루고 있는 극미 단위들에 불과하며 각각은 몇 분의 일 초 동안 존재하다가 후속물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것들은 사실은 필름 감개에 감긴 수천 장의 정지된 사진과 같은데, 영사기를 통해 돌리면 하나의 활동 사진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각각의 그림을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야 겨우 지각할 따름이다. 이러한 까닭에 점-순간들은 왕왕 사멸점(death spots)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이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은 기억에 의존한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인과율을 따라 생기(生起)하기에 각 순간은 그 앞의 순간에서 발생 동기를 찾을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별도의 연결 고리는 있지 않다. 심리학에서 우리는 생각, 정신적 인상 그리고 인지의 모든 분야를 한결같이 관통하고 있는 인과적 전개 과정과 지속적 유동 상태를 보게 되는데 어디서도 이들 연속 사항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항구적 실체는 찾아낼 수가 없다. 결국 여기서도 물리학에서처럼 우리는 다만 인과적 관계성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아비담마의 분석은 모든 분야에서 그 타당성을 견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프로이드(Freud)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의식적 마음의 행위는 그에 선행(先行)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며 어떤 생각도 임의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그는 그의 저서 '일상 생활에서의 정신 병리학'에서 증명해 보였다. 그는 의식 속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찾아보았다. 연구를 해나감에 따라 그는 대부분의 소위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던 잠재 의식의 결과라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즉 잠재 의식은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그런 사건들을 획책해 낸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놓고 그 후 많은 연구가들이 분분한 논쟁을 벌여 왔지만 프로이드는 프로이드대로 자기 이론을 뒷받침해 줄 방대한 자료를 모아 놓았던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 진실은 될 수 있다 하겠다. 어떤 개인이 지어 온 업력이 점점 쌓여서 마침내 그 개인의 경향(傾向)과 소인(素因)을 이루게 되고 이 경향과 소인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의 무의식층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개인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사건이나 경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 그 부분(무의식)의 활동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적 마음이 그 사건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다만 유분(有分)의 성질을 가질 뿐으로 과거의 습관적인 사고에 의해 지배되는 흐름에 불과할 뿐 의지(意志)하는 자질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자질은, 의식적인 마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인 것이다. 다만 '우연적 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무의식의 마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업에 알맞은 경험을 겪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기능을 기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지게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Mano-Pubbangamaa dhammaa, manose.t.thaa manomayaa. 모든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마음은 주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프로이드가 실수한 점은 잠재의식에 있어서의 인과 과정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 못한 탓으로 이것을 의지 행위로 오해한 것 뿐이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매우 성공적인 실험을 하고서도 끝내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불교에 접근은 하지만 마지막 문을 열 열쇠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 하겠다.
유물론자들은 마음이나 정신 상태가 물질적 기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단언하는 반면에, 유심론자들은 물질은 오로지 마음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마음은 단지 뇌의 생산물에 불과한데 이 뇌는 물질적 실체라는 것이다.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대상들은 눈, 귀, 코, 혀, 피부에 이어진 신경 통로를 통하여 접촉된다. 그 접촉의 결과로 생기는 감각은, 복잡한 물질적 신경 중추인 뇌가 그렇게 얻어진 자료들을 모으고 연관짓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 주기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뇌가 손상되면 감각은 불완전하게 작동하고 뇌가 파괴될 경우 감각은 아무 기능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요소들에 의존하는 하나의 인과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타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모든 사실이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정신적 과정이 순전히 기계적인 것이어서 물리적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물리적 원인은 다시 그 근원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하고 또 엄정한 인과법에 매여 있을 뿐이라면 자유 의지가 작용할 여지는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진화는 미리 결정된 자동적 과정이 되고 말 것이며 그럴 경우 갖가지 대안을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없어진다. 하지만,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자유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특수한 진화 형태의 출현은 대개 자연스런 선택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가령 마스토돈, 뇌룡, 익룡과 그 밖의 멸종된 종들의 경우 그들의 형태는 특정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발전의 결과였는데, 환경이 다시 바뀌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나치게 특수 진화해 버렸던 것이며 환경의 변화에 재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의 진화에서는 자동적인 것은 없다. 일련의 시행 착오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성공의 경우 못지않게 실패의 경우도 많다. 바로 인간도 이런 실패의 사례 중 하나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리적 힘은 나날이 증대시키면서 이에 상응한 정신적 진화는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멸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H.G.웰즈 주10 같은 사람은 2천년도 훨씬 넘는 옛 불교도 아쇼카 왕에게서 계명 통치의 극치를 보면서, 인간은 그 후 발전은커녕 정신적으로 퇴화해 왔으며 마침내는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진화를 통한 부단한 진보라는 생각은 이미 과학에 의해 폐기되었으며, 현재의 진화 이론들은, 개개인의 향상에 관한 이론들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진화는 옳고 그른 행위 중에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업(業)이 선 악중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진보 또는 퇴보가 있게 되며, 업의 개념은 전적으로 자유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때때로 오해되는 것처럼 숙명론이 아니다. 전생의 업은 금생에 겪어야 할 경험과 상황들을 결정하지만, 그런 상황들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그 개인의 개성적 경향의 문제인 것이며, 이 경향은 그 개인이 쌓아 온 의지적 행위들이 형성해 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우연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학에서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는 개개의 원자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예에서 보듯, 미지의 원인들이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을 놓고 볼 경우, 우리가 그 사람의 특징적 경향을 잘 알고 있다면 어떤 주어진 상황하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다. 정직한 사람도 환경의 압박이나 또는 잠재업의 경향으로 인해 부정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며, 용감한 사람이 겁장이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인간성이 왜 일관성이 없고 곧잘 모순성마저 띠게 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항상 정확하게 '성격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개성이란 순간순간 바뀌는 유동적 구조물이며 이를 지배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행(sankhaara-축적된 성향 또는 습관 형성력)에 해당되는 다소 광범한 원칙들 뿐이다.
여기서 행에 관해 말해 둘 것은 이 행의 개념은 개인의 진화 체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도 일찍이 그 어떤 철학 체계도 이에 대해 합당한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으며 오로지 불교에서만 그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37조도품 주11 중의 한 항목인 4정근 주12 이 가르치듯이 나쁜 성향은 제거하고 좋은 성향을 증강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쌓아나가면 우리 자신의 심리를 이상적으로 주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습관 형성력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대 심리학이 보여주고 있듯이 행(行)의 개념은 관념 연합의 개념과 긴밀히 이어지게 되었다.
파블로브(Pavlov) 주13 는 조건 반사에 관한 실험에서, 연상 관념과 신체적 반응 사이의 상관성을 정립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개들에게 종소리나 그 밖의 특정한 소리를 들려 주면 음식의 관념을 연상하도록 훈련시켰다. 개들은 그 특정한 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보거나 냄새를 맡았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개들은 침을 흘렸을 뿐 아니라, 다른 기쁨의 표시도 나타내었는데 이로 보아 개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 소리와 음식의 관념이 단단히 연합되어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개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에 비해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개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추이와 그것이 신체상에 일으키는 결과를 추적하기가 휠씬 용이하다. 그것은 거의 조건 반사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개의 이성적 능력은 초보적이며 또 하위층의 생물체로 내려갈수록 더욱 더 본능적이고 기계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미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한 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적 단위에 불과하다. 흰개미 집단에 관한 최근의 실험에 의하면, 지령자는 여왕개미이고 개미떼는 두뇌와 신경 중심을 여왕개미에게 온통 맡기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만일 여왕개미가 제거되면 흰개미들은 혼란되어 아무 방향으로나 미친 듯이 달려가 버려 개미 집단의 질서 정연한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미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유기체가 아니며 단지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몸통에 붙은 사지와 같다. 따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꼭 한 마리 동물의 손발 같은 기능을 한다. 그들은 여왕개미로부터 나오는 일종의 레이다 같은 것에 의해 지시를 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왕개미가 죽거나 상처를 입으면 상황은 마치 동물이 두뇌를 다쳐서 미친 사람처럼 수족을 함부로 흔들어대는 꼴이 된다. 그런데 이 여왕개미라는 두뇌는 딱하리만치 발전이 제한된 기관이다. 그것은 대대로 여왕개미에게 전수되는 선천적인 경향에 따라서 개미 집단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능만을 수행한다.
그 필요성의 한계 내에서 그것은 완벽한 유기체이지만,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진화상의 한정된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 더 이상 가능한 대안에 대해서 선택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유 의지의 능력을 포기했으며 고정된 자동 기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업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그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 가운데 하나란 것을 표시한다. 그와 같은 의식 세계의 수준에서는 이전에 지은 선행 조건들이 가져온 결과대로 살 뿐, 그 상황을 향상에 도움되도록 선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각기 정도는 다르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인 4악취(四惡趣) 주14 의 공통 특징인 바로 그 의식 형태라 간주해도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아비담마 요론(Abhidhammattha Sangaha) 주15 의 '개체들의 분류' 절에서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자동적 의식 형태의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바, 권위나 전통 앞에 자기의 독립적 사유 능력을 제물로 바치고 노예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이 개미의 예야말로 적절한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개미 수준의 의식을 기르고 있는 셈이며, 만일 그들이 개미로서 환생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독립적인 선택에 따르는 모험과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손쉽고도 안이한 방법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책무이다. 그러나 책임을 떠맡은 이상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저버릴 수는 없다. 불교는 우리 인간이 서 있는 위치를 우리 안팎의 우주와 관련시켜 정확히 비추어 줌으로써 인성(人性)의 초인적 가능성[佛性]을 분명히 자각하게 만들어 준다. 불교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가장 힘찬 웅변인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색이 불러들인 혼란에 도로 빠져 버려 갈피를 못 잡은 채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도덕과는 전연 무관한 물리적 힘만으로 형성된 우주, 일정한 중심도 없는 불안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헛그림자만 설쳐대는 마술의 환등 같은 무상한 변화를 그 속에서 바라보며 자기 눈에 비치는 것들이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지성적(知性的) 입장은 절망에 찬 영웅이 전개하는 비극적 서사시의 한 편이라고 적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도덕적 가치를 믿어야 할 근거를 찾지 못하게 된 그는 도덕적 가치들이 과연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인류가 만들어낸 집단적 상상의 소산에 불과한지를 의심하게끔 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인생이 '한갖 천치가 지껄여대는 이야기, 격렬한 소동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정의, 자비, 지혜 그리고 진리와 같은 중요한 추상적 관념들이 그들에게는 단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라 결정될 뿐인 한낱 상대주의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자연히 윤리적 기준은 약해지고 편법이 판을 치게 되는 추세로 되어 가고 있다.
'물리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써 보다 높은 지혜가 갖추어야 할 여러 요소 중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그 요소-그 밖의 모든 요소를 각기 제자리 잡게 하여 완벽하고도 명료한 형태를 갖추도록 해줄 그 요소-는 불교만이 마련해 줄 수 있다. 붓다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세상을 바라볼 경우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일찍이 알려진 어떤 수준보다도 높은 수준에서 재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재어 보고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경험 요소들을 분석해 보도록, 그래서 도그마의 울타리를 치거나 선입관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불교는 우리를 격려해 주는 것이다. 붓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현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엄격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도록 가르치신 현재 겁(劫) 주16 에 있어 최초의 종교적 스승이셨으며, 이러한 그 분의 말씀은 2천5백년 전이나 다름없이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생생하게 울려 주고 있다. 우리는 그 분의 가르치심을 비단 긴 세월 동안 보존되어 온 불법을 통해서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 과학의 제 발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 분의 가르치심에는 어쩌면 후기의 해석자들이 첨부시킨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치신 핵심적 진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늘날의 사상가들이 놓치고 있는 결정적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에 넉넉하다. 오늘날 사상가들이 발견한 것들을 불교의 교의에 덧붙이면 그 전체상은, 합리적 마음이 음미할 수 있는 한 어디까지나 완벽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의 영역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보다 높은 불교의 선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확인해 보는 도리 밖에 없다.
지금 인류는 기껏 자신을 해칠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주의 비밀을 캐내고 있는 듯싶으며, 이 점은 우려에만 그칠 수는 없는 실재적 위험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대세에 일대 변화가 움트기 시작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의 과학 그 자체가 많은 그릇된 생각의 기반을 제거해 냄으로써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를 깨닫는 쪽으로 우리를 접근시켜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의 제목을 '불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라 붙인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의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불가항력적으로 불교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정신적으로 '자꾸만 커져 가는 고통'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제 곧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일상적인 종교적 도덕적 신조의 기반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거부해야 하는 고통을 치루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들이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정의, 진리 그리고 자비와 같은 보편적 원칙들에 대한 신념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체계적 연구에 근거한 보다 높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지금은 인류가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고 믿어마지 않는 분들도 그 때에 가면 그들이 한 가닥 실낱처럼 막연히 걸어보던 미래에의 전망이 활짝 트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침내 무지와 미망의 족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열반이라는 저 궁극적 목표의 의미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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