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소집성ㆍ의타기성ㆍ원성실성

2015. 4. 25. 21: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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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소집성ㆍ의타기성ㆍ원성실성 / 원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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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가운데 변계소집성은 망상으로서 없지만, 의타기성은 인연에

속하니 있는 것입니까?

 

답 : 이 두 가지는 능과 소로 서로 생겨나게 하나 모두 자기의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망상으로 인해 이름과 모양을 세우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해 인연을 세우기 때문이다.

 

만약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름과 모양이 있겠으며,

이름과 모양이 있지 않다면 인연 자체가 공한 것이다.

이것은 만법이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능가경」 게송에서는 다음 내용과 같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수행하는 일과 같아서

한 곳에서 여러 경계 나타나지만

수행처에 여러 경계 없는 것이니

망상의 참모습도 이와 같다네.

 

이것을 풀이하여 보자. 이 게송은 망상인 변계소집성을 타파하니,

이것은 마치 이승이 모든 관행을 닦는 것과 같다.

 

약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 관할 때에 천지만물 모두가 파랗지 않음이 없으니,

파란색이 없는 곳에서 파란색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변화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한 가지 색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이 같지 않다.

 

비유하면 범부가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 또한 생사가 없는 곳에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여러 가지 백태와 같아

망상으로 많은 색을 나타낸다네

색이다 아니다의 구별 없으나

인연으로 일어나서 그리 보이네.

 

이 게송은 인연으로 일어난 의타기성을 타파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백태가 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와 차별이 있어서 다른 것과 같다.

 

헛것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인연으로 일어난 법이다.

 

이러한즉 망상의 바탕은 공하고 인연은 무성으로 곧 원만하게

구경의 일법을 성취하니, 이것은 마치 눈 밝은 사람이 깨끗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하물며 하나의 진심에서 다시 더 망념으로 존재할 것이 있겠는가.

 

문 : 이 삼성 가운데 몇 가지 법이 가법이고 또한 실법입니까?

 

: 「식론」에서 다음 내용과 같이 말하였다.

변계소집성은 망상이 세웠으므로 가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체의 모습이 없으므로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의타기성은 진실로 있기도 하고 거짓으로 있기도 하다.

의타기성은 많은 인연이 모여 서로 이어지는 분위의 성질이 있으므로

임시로 존재하는 가유라고 설하나,

 

또 다른 면으로 심심소와 색이 인연해서 생겨나므로 실유라고 설한다.

만약 실법이 없다면 가법 또한 없으니,

가법은 실법이라는 인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은 오로지 실법으로 존재하니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아도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풀이하여 보자. 변계소집성은 이름이 있고 실체가 없어,

허망한 분별로 세워지니 가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의 실체를 이야기하나

 

이미 어떤 모습이 없어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토끼뿔과 같이 거짓이나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어떤 실체가 있음을 의지하여 전체와 부분으로

 구분되는 법 위에 가법이나 실법을 세우기 때문이다.

 

의타기성의 가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많은 인연이 모여 만들어지는 가유이니, 이것은 마치 병이나 화분,

유정물 등이 어떤 요소가 모이고 쌓여서 법이 된 것과 같다.

이것은 많은 요소의 법이 일시에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도 만들어진 것은 거짓이다.

 

둘째는 서로 이어짐으로 있는 가유이니, 이것은 마치 과거와 미래 등의

세상에 오직 인과가 있다는 것과 같아, 서로 이어져 지속되는 성품이다.

 

많은 법이 많은 시점 위에서 하나의 가법을 세우니 이것은 마치

부처님이 “옛날 사슴 왕이 지금의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오온에 의지해서 찰나에 멸하는 것이 비록 몸으로서 실제 있더라도

이것은 많은 법이 상속하여 임시로 하나의 유정물을 세워 지

금에 있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는 분위로서의 가유이니, 이것은 마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

분별로 자기의 위상을 갖는 것과 같으므로 모두 임시로 존재한다.

하나의 시점에서 하나의 법 위에 세워지니, 이것은 하나의 색 위에서

유루라 하여 볼 수 있거나 상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명색 등도 모두 하나의 법 위에서 가유로 시설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모두 실제라면 응당 많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憤(분)과 恨 등은 모두 이 가유에 속하나 심ㆍ심소와 색법은

인연의 종자에서 생기므로 실유라고 말한다.

 

또한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한 성품이니

하나의 성품으로 곧 무성이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실제의 어떤 모습이 없고,

의타기성은 생겨난 것이 없으며

 원성실성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심밀경」에서는 “눈병 난 사람은 변계소집성과 같고,

파란색이나 노란색이 나타남은 의타기성과 같으며,

 병이 없는 깨끗한 눈은 원성실성과 같다”고 하였다.

 

「섭론」에서는 “비유하면 분별성은 뱀과 같고 의타기성은 등나무 끈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ㆍ향ㆍ미ㆍ촉의 네 가지 경계를 반연하여

등나무 끈을 분석한다면 단지 네 가지 모습만을 볼 뿐,

 

 따로 등나무 끈을 보지 못한다. 등나무 끈은 단지 색ㆍ향ㆍ미ㆍ촉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에 등나무 끈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네 가지 경계를 벗어난 다른 곳에 달리 등나무 끈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섭론」의 게송에서는

다음 내용과 같이 말하였다.

 

등나무 줄 뱀이라고 알았을 때

끈이라는 사실 알면 뱀이 없다네

만들어진 끈의 인연 알 수 있다면

끈과 뱀의 실체를 알 수 있도다.

 

만약 등나무 끈의 성품을 분석하여 공한 것임을 알았다면 곧 이것을 예로 삼아

등나무 끈에서 허망하게 뱀이라는 생각을 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다.

 

문 : 내가 반연되는 영상을 보는 것이 의타성으로 있다면,

응당 의타성의 진실된 ‘나’가 있습니까?

 

답 : 의타성의 ‘나’라는 상은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나니 단지 의타기성의

환유인 법으로 실제의 ‘나’가 아니다. 그것을 허망하게 집착하여

‘나’로 삼기 때문에 이를 망집이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겹쳐지는 모습이 있으니 하나는 ‘나’라는 상이 인연에서

생겨난다는 입장에서 어떤 힘이 마음을 생겨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있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법이라 한다.

그러나 또 하나는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집착된 법의 측면에서

 

 변계소집성이라 하니, 이것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워진 길가의 돌을 가축인 소로 잘못 알았을 때,

돌의 실체가 없지 않은 것과 같다.

( 또는 길가에 떨어져있는 새끼노끈을 뱀으로 보는 허망함 )

 

내가 반연된 인연을 보는 것은 의타기성의 모습으로 있으니,

마치 돌이 본래 소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소로 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집착된 소는 그 실체가 전혀 없으니 이것은 ‘나’로 보여지는 모습이

본래 ‘나’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나’로 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집착된 ‘나’는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단지 집착할 수 있는 마음만 있고 집착된 ‘나’는 없다.

 

이것은 돌이 있는 곳에 반연되어진 돌은 있으나 집착된 소가 없는 것을 말한다.

 보여지는 모습 위에 반연된 법은 있으나 집착된 ‘나’는 없다.

 

또 비유하여 말하면 남쪽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낙타털을 알지 못했으나

일찍이 어느 곳에서 거북이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뒷

날 우연히 낙타털을 보았으나 낙타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망하게 낙타털을 거북이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눈앞에 보여진 낙타털은 있으므로 의타기성의 법과 같다.

 

그러나 낙타털 위에 거북이털은 없는데 허망한 마음으로 거북이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실제의 ‘나’라고 집착된 법과 같다.

 

그러므로 논에서 “일체의 사물과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난 법이

훈습된 힘으로 말미암아 변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한다.

또 하나는 이것에 의지해서 두루 짐작하고 생각하여 허망하게 ‘

 

있고 없음과 같고 다름과 갖추거나 갖추지 않았다’는 등에 반드시

어떤 실재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를 변계소집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마음을 바로 봅시다. 원순스님 역해]

 

흐려져가는 망심과 집착으로 인해 다시 불퇴전의 마음을 잡고

원성실성 바로  우리의 본성(本性)찾아
불성(佛性)으로 들어가기를 원 하나이다    .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에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에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