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2008. 5. 7. 20: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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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을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들 삼장 가운데 집장이, 아라야식이 망식(妄識)으로 있는 한 아라야식의 뜻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전7식의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능장과 소장의 뜻도 집장의 뜻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상(果相)의 내용도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능장의 뜻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상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초래되는 과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보는 업력을 보존한 장식 내의 종자로부터 업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서로 부합하고 화합하여야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업인을 보존하는 능장과 그 업인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果相)의 내용은 서로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인 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살펴본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은 아라야식 자체에서 야기되는 내용인 것이고,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과상은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중생의 과보를 받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대한 설명은 그 작용에 따라 별명을 붙여 다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8지 보살 이상의 성인들이 수행력에 의하여 말나식의 아집을 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상에 속하는 집장의(執藏義)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상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상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과상(果相)은 아라야식의 업력에 의하여 받은 결과로서 한 세상만 살고 죽을 때에는 과상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과상은 자상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상을 유식학에서는 일취생(一趣生)의 과체(果體)라고 한다. 일취생이란 삼계육도 가운데 한 중생계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중생의 탈을 쓴 과보를 받고 살다가 사망할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상은 아라야식이 자체 내에 보존한 업력에 끌려 어느 세상에서 과보를 받고 사망할 때까지의 과체를 뜻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아라야식(靈魂)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중 과상(果相)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과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8식은 선업종자(善業種子)와 악업종자(惡業種子)에 의하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초생(招生)하게 되며 이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사생(四生)의 총보(總報)로서 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이는 과상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無覆)는 아라야식 자체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부(覆)는 번뇌라는 말과 그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 수동적인 소집장(所執藏)의 뜻만 있고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능집(能執)의 작용은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제6의식 등 육식이 악업을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뜻에서 아라야식을 무부성(無覆性)이라 한다.

그리고 무기성(無記性)이라는 말은 아라야식이 선성(善性)에 속하지도 않고, 악성(惡性)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성에도 기록(記)되지 않고 또 악성에도 기록되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무기성(無記性)이어야 선보와 악보를 받을 종자를 공정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논사에 의하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 때문에 무기성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아라야식이 선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거나 악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미래의 과보를 받을 주체로서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이미 선성이라면 악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또 아라야식이 이미 악성이라면 역시 선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바탕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무부성(無覆性)이어야 하고 또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으로서 당당히 업력을 보존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문헌과 같이 아라야식은 선업종자와 악업종자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가 그 선업과 악업의 세력에 의하여 삼계와 육도의 세계에 출생하여 과보를 받게 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뜻하며 이를 다시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의 내용도 확실히 알아야 아라야식을 중심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설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업력에 따라 삼계 육도에 두루두루 다니며 윤회하게 되는데 그 과보를 받는 출생의 형태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생(四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말한다. 태생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모친의 태중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난생은 닭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알(卵)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습생은 곤충과 같은 생명체가 습기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화생은 지옥중생과 천국의 천인들과 같이 부모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나투어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중도적 입장에서 악업의 세력이 강하면 악도에 출생하고 선업의 세력이 강하면 선도에 태어나는 등 삼계육도의 여러 세계에 사생의 여러 모습으로 출생하게 되는데, 최초에 태어나는 총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이때의 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총보의 뜻은 아라야식이 총체가 되어 출생할 때 출생하는 태아의 전체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태아로 태어날 때, 이목구비 등 여러 신체적조건과 정신적인 작용 등을 구비하고 발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총체를 총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이 총보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작용과 육체의 별체가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총보를 성립시키는 아라야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총보에서 다시 여러 가지 업력(異熟習氣)의 도움으로 정신과 육체가 점차 구비되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숙생은 총체에서 별체가 발생하여 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가운데 출생의 근본이 되는 이숙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숙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숙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 과보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숙식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시간적으로 찰나찰나 몸과 마음이 변천한다는 뜻(異時而熟)과

둘째, 공간적으로도 찰나찰나 마음이 변한다는 뜻(變異而熟)이 있고

셋째, 과보의 종류를 달리 바꾼다는 뜻(異類而熟)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이숙의 뜻 가운데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은 세 번째의 이숙설이 가장 적합한 학설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이숙은 우리 인간이 현재 살고 있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선과 악으로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뜻 가운데 동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하여 내생에 다른 몸으로 출생하는 것에서 이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숙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모든 이숙의 뜻은 아라야식을 제외시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고 종자를 보존할 수 없으며 또 윤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이 되고 또 과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에 의하면 “진이숙(眞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업과(業果)요, 둘째는 부단(不斷)이며 셋째는 변삼계(遍三界)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업과(業果) : 이는 위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야식이 중심하여 전생의 업력에 따라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질이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기 때문에 선업과 악업을 함께 보존하여 선보도 받을 수 있고 악보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부단(不斷) : 부단은 아라야식의 체성이 계속 유지되며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없이 계속 삼계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변삼계(遍三界) : 변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를 두루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 새로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심식(心識)은 오직 아라야식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단절됨이 없어 계속 상속하고 동시에 어떤 업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업보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세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진이숙(眞異熟)인 이숙식(異熟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밖의 심식들은 어찌하여 진이숙이라 할 수 없고 또 이숙식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7말나식은 그 체성에 염성(染性)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 염성은 곧 번뇌를 야기하며 번뇌는 다름 아닌 말나식의 성품이 악성(不善性)이며

또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주체는 그 바탕에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하는데 말나식에 번뇌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그 자격이 없다는 엄격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업력에 의한 과보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자격은 가지고 있다. 즉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7말나식은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항상 부단(不斷)하며 상속(相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계에 어디에나 두루두루 단절됨이 없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나 다만 업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이숙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제6의식의 경우를 보면 이 의식은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으나 부단의 뜻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6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선정에 들면 그 염오(染汚)의 체성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졸도하거나 의식을 상실했을 때의 극민절(極悶絶)과 수면(睡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극수면(極睡眠) 등 이러한 경우에는 의식이 단절된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이 단절되는 것을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위무심이 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윤회의 주체가 못되며 동시에 진이숙(眞異熟)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선과 악과 무기 등에 공정하게 통하고 또 삼계, 육도에도 두루 단절되지 않고 윤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식(眼識) 등 전오식은 업과의 뜻은 있어도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말나식과 의식과 함께 진이숙(眞異熟)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심식들은 업과와 변삼계와 부단의 뜻에서 하나 내지 둘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이숙의 자격이 없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진이숙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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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




위에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7식(七識)을 살펴보았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은 오근(五根)을 통하여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객관계를 접촉하고 또 선과 악을 대하며, 고와 낙을 맛보며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과 진여성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며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전칠식(前七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자들이 추구하고 탐구함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 주는 주체가 된다. 이 아라야식은 인도의 무착보살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다.




이미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체를 부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지만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고 무착보살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 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라야(阿梨耶. 阿蔾耶), 아라야(我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라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을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라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심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체에 대한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결과와 모습을 뜻한다.

그리고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만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 능장(能藏) :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업력이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7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그 중간의 무기행(無記行) 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 소장(所藏) :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 집장(執藏) :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麤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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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나식(末那識)과 사번뇌(四煩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나식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번뇌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말나식에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항상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는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번뇌는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해서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한 데서 나타나는 번뇌의 작용을 말한다.

그 번뇌의 종류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를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치(我痴) : 아치는 나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가 보통 집착심으로 나를 내세우는 나가 아니라 그 집착심이 있기 전의 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라고도 하며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이러한 나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진여성(眞如性) 또는 불성(佛性) 그리고 법성(法性)과도 통하는 나이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하여 전도된 마음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을 치(痴)라 하며 치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무지로서 모든 진리를 비진리적으로 전도(顚倒)하는 마음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도란 마음이 뒤집어졌다는 말이며 항상 진리를 정반대로 착각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이러한 작용에서 나타나는 마음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심을 아치(我痴)라 할 수 있는데 아치의 마음이 야기하는 그 순간을 해설하여

아집(我執) 또는 법집(法執)이라 한다.

아집은 아치와 통하는 말로서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또 평등한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집착함을 뜻한다.

또 법집은 진리로운 법칙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를 집착함을 뜻한다. 즉 마음속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법집이고 동시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을 아집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집과 법집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곧 무아(無我)인 것이며 이 무아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부단히 수행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하는 도상에서 제일 먼저 정화되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이고, 그 다음에 정화되는 마음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최후에 정화되는 마음은 말나식(末那識)으로서 이 말나식이 정화 될 때, 위에서 말한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고 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치(我痴)의 번뇌도 없어진다. 이러한 경지를 우리는 성불(成佛)의 경지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또한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심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범부의 것이며, 반대로 만약 말나식의 번뇌가 다 정화되었다면 성불의 경지로서 다시는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곧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한 진여의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번뇌사상과 수행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말나식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종래의 학자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의 위치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설명할 때에 매우 필요할 뿐 아니라 번뇌와 수행을 설명할 때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아왔다.




* 아견(我見) : 아견은 위에서 살펴본 아치라는 번뇌가 야기한 후에 곧 나타나는 망견(妄見)을 뜻한다.

즉 무아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견(邪見)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번뇌심이 매우 고정되어 나라는 집념이 강화된 경지를 말한다.




아집의 작용이 고정화되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7말나식이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의 영향을 받아 자기 이익을 위한 모든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에 의하여 작용되는 아견의 현상은 보통 행동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아만(我慢) : 아만은 아치의 번뇌에서 아집이 생기고, 아견에서 더욱 객관화된 번뇌이다.

즉 나를 밖으로 나타내려는 심리가 싹 튼 것이며, 그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면 오직 자기만이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못하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평등한 진리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집착한 나를 거만하게 나타내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아만에는 자신이 남보다 수승하다는 아승만(我勝慢)이 있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이 고귀하다는 아등만(我等慢)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높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나타내는 태도는 겸손한 체 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의 구별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는 모두 아만에 속한다.




* 아애(我愛) : 아애는 마음속 깊이 집착한 자아(自我)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하는 정신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속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망각한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비진리적이고 일시적인 자아(假我)를 설정하여 고정적으로 탐심(貪心)과 애착심을 야기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에는 사번뇌(四煩惱)가 항상 야기하게 된다.

이들 사번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나(我)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참다운 나에 대한 망각(痴)과 더불어 파생되는 망견(妄見)과 거만과 탐애 등의 심리작용을 사번뇌라고 하는데 이들 심리작용은 항상 자아를 유일무이한 제왕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서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작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집착된 나(有我)는 항상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실체는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들을 모두 번뇌의 근본이 된다고 해서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가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밖에 가지와 같은 번뇌(枝末煩惱)를 야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말나식과 더불어 시작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과거로부터(無始劫來)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시도 단절됨이 없이 야기하는 번뇌라고 일러오는 것이다.

참으로 이들 번뇌는 가장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범부들의 지혜로는 가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팔지(八地)보살 이상의 성인들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전해온다.

그것은 이들 번뇌 가운데서도 아치(我痴)는 평등한 일여(平等一如)의 진아(眞我)에 대하여 최초로 착각하는 번뇌에 속한다. 이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아직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번뇌로서 이러한 번뇌의 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상분과 견분이 미분화된 상태의 번뇌라는 뜻은 상분(相分)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며,

견분(見分)은 능히 인식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음속의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분별의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절대경지인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아치의 번뇌로서 그 망각한 심리작용이 아직 객관화되지 않은 채 무명만이 나타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업상(業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원효대사와 현수대사 등이 주석한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의하면

업(業)이란 동념(動念)을 뜻하며 일심(一心) 위에서 일념(一念)이 최초로 동요한 상태를 업상(業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미세한 경지를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식학(唯識學)의 심분설(心分說)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의 작용은 무궁무진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모든 심식의 인식내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 사분설(四分說)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서 기신론 주석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가령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할 때 마음 위에 떠오르는 영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동시에 그 상분을 상대로 하여 선악(善惡)의 내용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그리고 그 견분작용을 다시 자체 내에서 틀림없는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自證分)이라 이름하며,

또 자증분을 뒤에서 재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사분(四分)작용이 있는데 이는 주로 상대적 인식내용을 설명할 때 많이 활용한다. 이에 의하여 상대를 떠난 절대의 진리는 상분과 견분의 상대성이 없는 경지인 것이며, 따라서 설사 진리를 망각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객관화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에서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기신론의 업상(業相)의 상태나 유식학의 아치의 상태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의 사번뇌는 매우 미세한 것이며 동시에 이를 정화하는 데는 부단한 수행이 뒤따르게 된다.

이를 완전히 정화하려면 이른바 삼현(三賢)보살의 수행으로도 불가능하며 적어도 십지보살(十地菩薩) 중 제7지보살(第七地菩薩)의 지위에 올라야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집의 번뇌가 겨우 없어진다.

그 밖의 법집과 미망의 습기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로서 구경각(究竟覺)을 증득한 경지에 도달해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생기번뇌란 선천적이며 또한 원천적인 번뇌라는 뜻으로서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번뇌이다.

이러한 경지에 대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성위(聖位)와 멸진정의 선정과 출세간의 경지에서만이 말나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阿羅漢滅盡定出世道無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한의 경지는 불타의 경지를 말하며, 또 멸진정은 구경(究竟)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금강유정(金剛喩定)에 해당하는 선정을 뜻한다. 그리고 출세도는 속세적인 번뇌와 세간적인 번뇌를 해탈한 진리의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청정한 마음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 보살도의 수행력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되고 정화되니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진여의 성(眞如性)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진여성을 아무런 번뇌의 장애없이 완전히 증득하고 관찰하는 경지를 또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선가에서도 말나식의 사량심(思量心)과 도거심(掉擧心)을 정화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였고 또 말나식의 번뇌를 완전히 정화한 경지를 견성이라고 하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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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1. 말나식(末那識)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은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의 발견이다.

말나식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육식(六識)사

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육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평상시의 의식생활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구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내용을 보면 평상시의 의식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의 행동

과 악의 행동 가운데 특히 선의 행동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에 귀의하여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을 낙으로 알고 생활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갖게 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평소의 생활태도가 매우

착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범행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가끔 화제거리로 등장하는 예가 흔히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있다가 다시 의식

을 통하여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마음을 관찰하며 탐구하는

유식학도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정화해 갈 때,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자들은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

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요가(yoga)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한역(漢譯)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데

이들이 닦는 요가, 즉 명상은 불교적 선정(禪定)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선정을 닦는 유가행파들이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였다.

부사의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

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를 지니고 있어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

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말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심의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방법은 종래에 내려오던 심의식사상을 소승불교와는 달리 확대 해석하여

심(心)을 아라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하였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들은 곧 유식학도로서 종래의 심의식 사상을 혁신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라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팔식(八識)으로 분류되어

작용하고 있다고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이 후세에 중국에서 번역될 때 한문으로 제7식(第七識)을 의(意) 그리고 육식

가운데 제6식(第六識)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진제삼장 등 구역가(舊譯家)에 속하는 유식학자들이 번역한 것이고

그 뒤에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많은 범본(梵本)을 번역할 때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번역하였고, 제6식은 의식(意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구유식가(舊唯識家)들이 번역한 의(意), 의식(意識)은 의(意) 자가 두 번 반복

되어 논전 등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학들이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법사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7식인 의(意)를 원어로 두기로 하고

말나(manas)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의 유식학계에서는 그 후 말나식과 의식으로 그 성질을 분명히 하여 읽게

되었고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

는 심식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에서는 의식과 말나식에 나타나는 번뇌의 성질과 심체의 성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선정(禪定)의 이름도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선정을 수행할 때 의식의 번뇌만을 정화하는 선정의 이름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하

였고, 또 의식의 번뇌는 정화되었지만 때때로 의식에 영향을 주면서 아직도 번뇌의 작용을

야기하며 또한 번뇌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지니고 있는 말나식까

지 정화하여 완전히 해탈케 하는 선정의 이름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선정의 이름을 정하여 불교 이외의 종교인 외도(外道)들은 무상정을 닦아

의식까지의 번뇌만을 정화하지만 불교(聖敎)에서는 더욱 깊이 있는 말나식의 번뇌까지 정화

하고, 완전히 해탈의 경지에 도달케 하는 멸진정을 수행한다고 외도의 선정사상과 구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이 우리 인간의 심성 내에 있다고 보고 그 체성을 독특하게 설명하는 것

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말나식의 체성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말나식(末那識)의 체성론(體性論)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삼량(三量)설에 비하면 비량(非量)에 속한다.

비량이라는 말은 비(非)는 그릇 비(非)자로 해석하고 량(量)은 헤아린다는 말로서, 즉 인식한

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하여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이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량(思量)이라는 뜻도 식의 작용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8식(八識)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는 데 있다.

이제 말나식을 다른 식과 몇 가지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안식(眼識) 등 전5식(前五識) : 이들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않으며 또 오식의 심체는 그 작용이 간간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항상(恒) 지속하고 심세한 사량심이 부족하다(恒審俱無).



* 제6의식(意識) : 의식은 심세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작용이 가끔 단절되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출생하면 사량의 작용이 단절되고 무상정(無想定)에 들면 역시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또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역시 의식의 작용이 단절되고 극심한 수면(極睡眠)에 들면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그리고 졸도하거나 의식불명(極悶絶)일 때 의식작용이 단절되는 등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작용이 단절된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은 오위무심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야기하지만 말나식과 같이 심체가 항상 지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審而非恒).




* 제8아라야식 :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심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

(恒而非審).



* 제7말나식 : 말나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명실공히 사량심의 자격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

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恒審俱有).




이상과 같이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

하므로 이 식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어떻게 사량의 작용을 일으키며 그 사량의 내용은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

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세친논사(世親論師)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다.




다음의 제이능변(次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 (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 (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 (思量爲性相).




이를 해석해 보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가령 어머니 태(母胎) 안에 태어날 때 인간의 모습으로

아라야식이 최초로 능히 변화한다고 해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依彼)하여 전생(轉)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반연(緣彼)하며 사량하는 것이며 이것을 성질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량의 뜻은 아라야식의 참 모습인 무아(無我)의 경지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번뇌를 야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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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번뇌(隨煩惱)


이는 근본번뇌에 의하여 파생된 것이므로 지말번뇌(枝末煩惱)라 하며

본명은 수번뇌(隨煩惱)이다. 이는 수혹(隨惑)이라고도 호칭되는데 혹(惑)은 곧 번뇌의 뜻과

같다.

이 수번뇌에는 분(忿). 한(恨). 부(覆). 뇌(惱). 질(嫉). 간(慳). 광(誑). 첨(諂). 해(害). 교(憍).

무참(無慙). 무괴(無愧). 도거(掉擧). 혼침(惛沈).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실념(失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 등 20종의 번뇌가 있다.

이들 20종의 수번뇌를 소. 중. 대로 나누어 소수혹(小隨惑), 중수혹(中隨惑), 대수혹(大隨惑)

이라고 한다.

이들 수번뇌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 소수혹(小隨惑)

* 분(忿) : 분은 자기 이익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성내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진심(瞋心)보

다는 약한 작용이다. 이러한 분에 의하여 포악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 한(恨) ; 한은 위에서 말한 분심을 앞세워 항상 악을 품고 원수로 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음에는 항상 원한이 있고 고통(熱惱)이 있게 된다.

* 부(覆) : 부는 자신의 죄를 덮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자신의 죄업이 널리 알려지면 명예와 이익이 손실될까 두려워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는 번뇌이다.

* 뇌(惱) : 뇌는 분함과 한탄함을 갖고 항상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는 번뇌이다.

* 질(嫉) : 질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말한다.

* 간(慳) : 간은 재산과 진리를 아끼기만 하고 남에게 물질을 베풀어 주지 않고 진리를 설하

여 지혜를 심어주지 않는 것을 뜻한다.

* 광(誑) : 광은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고 교만하고 부덕하면서도 덕이 있는 것처

럼 남을 속이기만 하며 동시에 정직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 첨(諂) : 첨은 남에게 아첨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며 또한 본심을 속여 정직하

지 못한 행동을 하는 번뇌이다.

* 해(害) : 해는 모든 사람과 생명체에게 자비롭지 못한 마음으로 손해와 괴로움을 끼치는

행위를 말한다.

* 교(憍) : 교는 자신이 성공한 일이 있으면 교만을 부리거나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상의 번뇌는 10가지 작은 번뇌라는 뜻에서 십소수혹(十小隨惑)이라고 한다.







나) 중수혹(中隨惑)

다음은 중수혹을 알아보기로 하는 바 여기에는 무참과 무괴 등 두 가지가 있다.

* 무참(無慙) : 무참은 잘못을 범하고도 마음속 깊이 부끄러운 생각을 갖지 않으며

동시에 현인과 선법(善法)을 경거망동하게 경멸히 여기는 행위를 뜻한다.

* 무괴(無愧) : 무괴는 세상의 안정을 돌보지 않고 포악한 일에만 종사하면서 추호도 부끄

러운 생각을 갖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르는 악덕을 말한다.




이상 두 가지 번뇌를 중수혹이라 한다.







다) 대수혹(大隨惑)

다음 대수혹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도거(掉擧) : 도거는 마음이 요동하여 안정을 잃게 하는 번뇌이다. 그리하여 평등한 마음

과 선정(奢摩他)를 방해하는 작용을 항상 한다.

* 혼침(惛沈) : 혼침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항상 혼미하게 하고 침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경쾌하고 안정된 마음(輕安)과 지혜로운 선정(毘鉢舍那)을 방해하는

심리작용인 것이다.

이는 도거심소와 함께 선정을 방해하는 작용이라고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 불신(不信) : 불신은 진리에 대한 소신이 없고 불타의 덕성과 인과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

한 번뇌이다. 그러므로 게으름만 피고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만 하게 된다.

* 해태(懈怠) : 해태는 글자 그대로 게으름을 뜻한다. 이는 악을 끊고 선을 닦는 일에 태만

하며 평소에 노력하지 않는 번뇌를 말한다.

* 방일(放逸) : 방일은 진리관을 뚜렷이 갖지 못하고 선업을 닦는 일에 방종하며 방탕함을

뜻한다.

* 실념(失念) : 실념은 진리로운 일을 명백하게 기억(明記)하지 못하고 동시에 산란한 마음

에 의존하여 정념(正念)을 상실한 번뇌이다.

* 산란(散亂) : 산란은 정신을 밖으로만 향하여 달리게 하고 또 객관계의 대상(所緣境)에

대해서 나쁜 견해(惡慧)만을 유발하도록 한다.

* 부정지(不正知) : 부정지는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항상 오해하도록 하는 심리작용이다.

이는 능히 정당한 지식을 방해하고 선업을 닦지 못하게 하는 치심(痴心)의 일부분으로서

마음을 우매하게 작용하는 번뇌이다.




이상과 같은 8가지 번뇌를 8대수혹(八大隨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번뇌 가운데서 가장 큰 작용을 가진 번뇌로서 정신을 혼란케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수번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나타나는 번뇌들로서 정신수행에서 항상 경계

해야 할 번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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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본번뇌(根本煩惱)


악의 작용은 곧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오히려 앞에서 말한 선(善)의 작용을 방해하고 교란시키며 무지의 세계로 빠뜨리는

작용을 뜻한다. 그러므로 번뇌의 뜻은 다양하며 대소(大小)의 번뇌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

다.

번뇌는 항상 내심(內心)을 요란시키고 혼탁(濁)케 하며

안정된 마음을 전횐시켜 여러 유정(有情)들을 복잡하게 하고 흐리게 만든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번뇌는 안정된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고뇌케 하며 지혜로운 마음을 덮어 버리고

장애하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부장(覆藏) 또는 장애(障礙)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리고 번뇌는 인간의 내심에서 여러 가지 잡념을 야기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신을 방해

하며 스스로 고민하고 불안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구속된 생활을 하게 한다고 해서

계박(繫縛) 또는 결박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번뇌는 작용이 다양하며 별명도 많다.

그러므로 번뇌를 백팔번뇌(百八煩惱)라 하고 또 팔만사천번뇌(八萬四千煩惱)라고도 한다.

마음의 작용이 한이 없음과 같이 번뇌의 작용도 한이 없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본이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여섯(六)이고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수번뇌(隨煩惱)가 20종류가 있다고 하며

이들 번뇌는 수많은 번뇌 가운데서 극히 제한된 수만을 엄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근본번뇌라고 하는 것은 번뇌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말하고

이와 같이 뿌리 역할을 하는 근본번뇌에서 다시 파생하여 가지처럼 뻗어나는 번뇌를 수번뇌, 또는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 한다.

즉 수번뇌는 근본번뇌에 따라서 나타나는 번뇌라는 뜻으로 사실상 우리 현실에서 번뇌로 작

용하는 마음은 거의 수번뇌이다.

그러나 근본번뇌의 작용은 제7말나식의 미망(迷妄)으로 인하여

최초에 나타나는 탐(貪), 진(瞋) 치(痴) 등 근본번뇌에 의하여 작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탐, 진, 치 등 번뇌를 근본번뇌라고 하는데 이는 원시불교에서도 가장 중요시 하였고, 소승불교를 거쳐 대승불교에 와서도 가장 중요시 하고 있다.

그것은 치심(痴心) 때문이다.

치심은 무명(無明)을 의미하며 무명은 무아(無我)에 대한 망각으로 말미암아

아집(我執)을 야기하게 하고 더불어 물질계의 법칙까지도 망각하여 법집(法執)을 야기하는 무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 가운데서 치심이 으뜸이라고 한다.

이러한 치심을 유식학에서는 심리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결국 제7말나식의 치심

(痴心)이 진여성에 해당하는 무아(無我)를 최초로 망각하여 나타나는 번뇌를 아치(我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아치의 번뇌에 의하여 지혜로운 본성이 가려지고 망심들이 부각하여 범부

심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데 이를 아견(我見)이라고 이름한다.



즉, 자아에 대한 망견(妄見)을 뜻하는 것이며 이들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도 한다.

전도된 마음에 나타나는 정신작용이 올바르게 나타날리 없으며 이들 잘못된 정신작용을

내용별로 나누어 근본번뇌 또는 수번뇌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함은 이들 번뇌들은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모두 죄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죄악인 것이며 이들 주관적인 죄악에서 객관화한 것이 육체적인 행동

의 죄악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앞에서 살펴본 선의 심소(善心所)에 대하여 번뇌

들을 악의 심소(惡心所)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작용(心所)에 의하여 선행(善行), 또는 악행(惡行)으로 나타나며 선행과 악행은

곧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되며 이 선업과 악업은 다음의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를

가져올 인과응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악의 작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식학에 있어서도 악은 곧 번뇌를 뜻한다.

번뇌는 마음에서 발생하여 마음을 다시 어지럽히고 어둡게 하는 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하고 아집을 야기하며 또 법집을 야기하는 것을 비롯하여

온갖 무지의 작용을 일으킨다.



아집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이 공(空)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인연의 집합체인 자아에

대해서 실로 고정적인 자기가 있는 양 집착하는 번뇌를 말한다.

그래서 이 아집을 없애려면 내가 공했다고 관찰하는 아공관(我空觀)을 닦아야 한다.

또 법집이란 모든 사물이 법칙을 망각하여 마치 그 사물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양 착각하여

집착을 야기한 번뇌를 말한다. 이러한 법집을 없애려면 만법(萬法)이 공하였음을 철저히

관찰하는 법공관(法空觀)을 수행하여야 한다.

아무튼 아집과 법집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데 이에 의하여 이른바

근본번뇌가 야기하고 이 근본번뇌에 의하여 다시 지말적인 수번뇌가 발생한다.




근본번뇌는 번뇌의 뿌리 역할을 하고 지말번뇌는 가지 역할을 하는 번뇌이다.

그 종류를 보면 근본번뇌에는 육종(六種)이 있고, 지말번뇌에는 20종의 번뇌가 있다.

이를 따로따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근본번뇌는 번뇌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본혹(本惑)이라고도 칭한다.

혹(惑)이라는 말은 번뇌와 통하는 말로서 진리에 미혹했다는 뜻이 있다.

여기에는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 육종의 번뇌가 있는데

이들은 극히 근원적인 번뇌들이다.

차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탐(貪)은 자신에 대한 탐심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이를 아집이라 한다.

또 사물에 대한 탐심이 있는데 이는 법집이 기본적이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는 한 악행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미래에 나쁜 과보를 받을 업인이 되며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기심이 되는 아집을 앞세우는 탐심은 금물이며 항상 진리로운 정진(精進)에

의하여 정당하게 재산을 모으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 진(瞋)은 성내는 마음을 뜻한다. 성내는 것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모두 진심의 대상이 된

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상대에서 마음에 거슬리면 성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좁은 생각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 오관을 통한 모든 인식의 대상물이 마음에 거슬리면 성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그리고 내면세계의 불만족도 마찬가지로 본다.

이는 자비를 방해하는 심리작용이며 심리적 불안과 마음과 몸에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작용

을 야기하게 된다.




* 치(痴)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연기(緣起)의 도리와 아공(我空)과 법공

(法空)의 진리를 망각한 것을 의미하며 이를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치는 모든

지리에 어리석다는 뜻이며 어리석다는 것은 곧 무지를 뜻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도 한다.

이는 모든 사리(事理)에 대하여 망각한 것을 뜻하며 정상적인 마음이 비정상적으로 전화되

었다는 뜻으로 전도심(顚倒心)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치심은 모든 번뇌의 의지처가 된다. 그 이유는 진리를 망각하여 모든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 것은 치심이기 때문이다. 치심에 반대되는 것을 지혜라 하며 지혜를 항상

방해하기 때문에 번뇌 중 치심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다.




* 만(慢)은 치심으로 말미암아 아집 등 이기심이 나타나 나라는 것을 확고하게 맹신하고,

자기 이외의 사람들은 하찮케 생각한 데서 나타난 거만심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남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추태를 부린다. 그리하여 자신의 덕성을 상실하고

천한 태도만을 보이는 심리작용이다.




* 의(疑)는 오관을 통하여 인식하는 상대를 잘 모르고 확신을 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심리작

용이다. 이를 유예(猶豫)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한 소신을 방해하는 것을 뜻한다.




* 악견(惡見)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망각하고 착각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견해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는 번뇌에 가려서 진리를 잘못 판단하는 염혜(染慧)를 항상 야기하며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고 동시에 선견(善見)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작용까지도 한다.

이 악견은 유신견,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통례이다.




첫째, 유신견(有身見)은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번역한 말로서 살가야(Salkaya)는 유신(有身)

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몸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이 모여 임시로 구성된

것인데 이 오온(五蘊)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 것이며 이를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며 또한

위신견(僞身見)이라고도 한다.

둘째, 변견(邊見)은 자신의 몸에 집착한 유신견의 망견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 몸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말하며 이러한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한다.

또 이 몸은 사망 후에는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며 단멸하게 될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

데 이를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진리는 항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견과

상견을 갖는 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생각이기 때문에 이를 변견이라고 한다.

셋째, 사견(邪見)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고 선악의 윤리적 사상을 부정하는 견해를 뜻한다.

넷째,견취견(見取見)은 유신견과 같이 자신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그것을 최고의 것이라

고 집착하며 진리에 맞지 않는 견해를 나타내서 많은 비난을 받을 만한 견해를 말한다.

다섯째, 계금취견(戒禁取見)은 계금(戒禁)은 계법으로 금한 것을 말하며

취견(取見)은 그 계법에 집착하여 현실과 진리에 맞지 않는 계법을 강요하는 견해를 뜻한다.

이는 특히 외도(外道)들이 생천(生天)을 목적으로 나체로 있거나 머리를 뽑고 회가루를 바르

며 불속과 물속에 투신하는 등 불필요하게 삿된 계율(邪戒)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어서

이러한 계법을 경계하는 뜻이 있다.




이상과 같은 오견(五見)을 합쳐서 악견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른 진리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육번뇌는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악(惡)을 논할 때

항상 이들 번뇌가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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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심소(善心所)


유식론에 의하면 선의 심소는 11가지가 있다. 그 종류를 보면,

신(信), 참(慙),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 근(勤),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 불해(不害) 등 11종(種)을 말한다.

이들 선심소 살펴보기로 한다.




* 신(信)은 신심(信心)을 뜻한다.

불교에서 선을 논할 때 신심이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여러 선행의 종류를 얼마든지 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으로

선(善)을 논할 때는 먼저 부처님의 진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교적 선행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선행 가운데서도 신앙심이 으뜸이 되며 이 신앙심 여하에 따라

선행의 결과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신앙은 첫째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신(信)을

수정주(水淨珠)에다 비교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수정주는 아무리 혼탁한 물이라

할지라도 이 수정주만 혼탁한 물속에 넣으면 즉각 맑아지게 되며 모든 것이 밝게 비칠 만큼

청정하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갖는 신심도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있어 수정주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진리의 실성(實性)을 확신하는 것이다.

진리의 실성은 곧 우리 자신이 보존하고 있는 본성이며 넓은 뜻으로 보면 진여성(眞如性)이

며 불성(佛性)을 뜻한다. 이는 절대의 진리로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진실성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무한한 지혜와 가능성을 나타내 주며 온 세상을 극락세계로 환원하여 진리로운 세계를 구현해 주는 본질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덕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불타의 덕성을 확신하며 불법을 신앙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신앙한 만큼 불타의 가호가 내리며 항상 보살펴 주신다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인과(因果)의 공능(功能)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즉 세간적인 선업과 출세간적인 선업은 반드시 능력과 세력이 있어 세속적인 행복은 물론

출세간적인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또 창조할 수 있으며 무한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공능(功能)을 확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을 하면 반드시 선과가 성취되고 악행을 하면 악과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

를 확신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사상인 것이다. 동시에 삼라만상의 실체에도 각각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앙은 진리를 확신하고 불타를 비롯한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과 인과응보의 확신을 포함하여 종합적인 신앙관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앙심은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에 속한다.




* 참(慙)은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를 즉각 반성하고 어질고 착한 것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는 특히 마음속으로 어떤 잘못을 범했으면 곧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동시

에 반성하며 다시는 악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 괴(愧)는 세속에서 정해 놓은 규칙과 윤리 도덕을 위반했을 때 곧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

을 뜻한다. 이와 더불어 악법을 멀리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며 이미 착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앞으로 윤리와 도덕에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을 굳게 하는 정신작용이다.




* 무탐(無貪)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칙과 집착을 아니하며 자기 소유의 재산도 극단적인

탐심을 내지 않는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심을 버리고 정당한

노력에 의하여 진리롭게 자신과 재산을 유지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

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 무진(無瞋)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성내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고통스러움이 있어도 이를 참고 자비롭게 대하는 마음이다.

춥고 더우며 갈증이 나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일체 짜증을 내지 않고 참고 견디며

여유있는 마음으로 대하는 정신작용이다.




* 무치(無痴)는 모든 진리와 사물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무지를 야기하

지 않는 마음이다. 즉 일상생활을 통하여 항상 지혜롭게 살며 자신의 심성(心性)과 객관계의

사물을 옳게 관찰하여 행동에 있어서도 선행만을 하는 정신작용이다.




* 근(勤)은 곧 정진을 뜻하며 선행에 근면함을 뜻한다. 평소 악을 정화하고 자신과 사회를

정화하는데 근면하고 진리를 실현함에 있어 모든 게으름을 퇴치하며 용감하게 추진해 나가

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 경안(輕安)은 여러 가지 번뇌에 의하여 몸과 마음이 무거운 것을 떨쳐버리고 수행력으로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함을 뜻한다. 그리고 혼탁하게 하고 침체시키는 이른바

혼침(昏沈)을 정화하고 또 마음을 동요케 하는 도거(掉擧)를 제거하는 선정의 마음으로

일체의 산란심이 없는 정신상태를 뜻한다.




* 불방일(不放逸)은 모든 생활에서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방탕하는 것을 방지하고 뚜렷한 수행관과 생활관을 갖고 목적을 향하

여 꾸준히 정진해가는 것을 뜻한다.




* 행사(行捨)는 마음의 동요를 없애고 항상 평등하게 유지하는 마음이다.

즉 사(捨)는 마음의 침체와 혼탁함에 끌리지 않고 또 동요(掉擧)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등심

으로서 매사에 꾸준하면서 안정을 유지하는 정신작용이다.




* 불해(不害)는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해를 끼치지 않고 아껴주는 자비심을 말한다.




이상으로 선심소(善心所)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선의 정신작용은 심체(心體)에 의하여 그때 그 때 나타나게 된다. 이 내용으로 봐서

선의 심소는 마음과 육체의 정화는 물론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선의 심소만을 잘 수용하며 생활한다면 참으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시회를 건설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회도상에 있는 우리 인간의 심성은 후천적으로 선과 악의 양대정신으로 나누어져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의 정신작용과는 달리 악의 정신작용도 수시로 야기하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번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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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과의 관계






이제까지 안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왔다.

그 다음의 순서는 제7말나식을 살펴야 할 차례다.

그러나 여기서 말나식을 설명하기 전에 마음의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를 먼저 살펴보

고자 한다. 그것은 위에서 6종의 심식을 이미 설명하였는데 이들 심식에는 수많은 작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들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심식의 내용도 완전히 알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의 체성과 작용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의 체성과 작용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마음의 체성을 흔히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음의 체성이 마치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그 밑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하는 바와 같은 비유를 들어 명칭한 이름이다.

즉 심왕은 마음의 체성이고,

심소(心所)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신하가 국왕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듯

마음의 체성에 의하여 나타나는 작용도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심식(心識)은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심소는 신하가 국왕에 소속되어 수족처럼 역할을 하듯이

심왕의 소유물로서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다하는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소라는 뜻은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한 명칭을

줄인 이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왕과 심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불가분의 관계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5에 의하면

첫째,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하여 작용을 야기한다(恒依心起故).

둘째,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한다(與心相應).

셋째,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하고 계속된다(繫屬於心).

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심소는 심왕에 소속하여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소는 심왕의 소유물로서 아소(我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깊은 관계가 있는 마음의 체성과 마음의 작용은 거의 행동을 같이 한다.

그 행동을 같이하는 관계를 상응(相應)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그 4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心王)과 마음의 작용(心所)은 행동을 야기할 때 그 시간이 동일하고,

둘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의지하는 장소(所依根)가 동일하며,

셋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의 대상(所緣境)이 같고,

넷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동일한 일(事)만을 한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체성과 마음의 작용은 행동하는 시간(時)과 의지할 곳(所依根)과

인식의 대상(所緣境)과 활동하는 일 등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그 대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내용만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같이 나타나 어떠한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의 체성인 심왕은 그 대상에 대한 전체의 모습(總相)을 인식하고

또 마음의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는 그 대상의 전체는 물론, 그 대상 안에 지니고 있는

낱낱의 모습(別相)을 일일이 인식하는 성질을 가진다.

이러한 활동들을 행상(行相)이라고 하는데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인식하는 행동의 모습을

뜻한다.

이들 심왕과 심소의 행상관계를 예를 들어보면 마치 그림 그리는 화가가 하나의 화폭에

전체의 본을 그려 놓으면 그 제자가 화폭의 구석구석을 그려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 즉 심왕과 심소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며

동시에 모든 대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따로 분리시켜 말할 수 없는 것

이 정신세계이기는 하나,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들의 성격을 분명히 따로 작용(心所)만을

분리하여 그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심소론(心所論)이라고 한다. 즉 심소만을 가지고 논술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심소론에 의하면 마음의 작용은 51종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들 51종을 각각 성질별로 구별하여 다시 육위(六位)의 분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6위 51종의 심소(六位 五十一心所)라고 한다.



물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무한한 작용들이 있으며 또 원시불교에서 소승불교에 이르기까

지 마음(心王)의 작용(心所)설을 해설한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종래에

설명되어 왔던 심소설들을 엄밀하게 취사선택하여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필히 없어서는

안 되는 심적 작용만을 재조직하였다.

이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심체와 심작용에 대하여 그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육위(六位)의 심작용을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심소의 육위를 보면



1) 변행심소(邊行心所)

2) 별경심소(別境心所)

3) 선심소(善心所)

4) 번뇌심소(煩惱心所)

5)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6) 부정심소(不定心所) 등으로 분류된 심소를 말한다.



이들 육위의 심소들은 마음의 작용에 나타나는 그 기능과 성질별로 구별한 것이다.

이들 육위심소에 대해서 하나하나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변행심소(遍行心所)



변행심소는 어떤 심식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심식에 두루 나타나면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뜻한다.

여기에는 5종의 심소가 있는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을 말한다.




촉의 심소는 팔식(八識) 가운데 한 식(識)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최초로 그 심식의 작용이 대상에 닿는 것을 촉(觸)이라 한다.

예를 들면 눈의 시선(眼識)이 보고자 하는 대상물(色境)에 닿거나 귀로 듣는 마음(耳識)이

어떤 소리에 닿았을 때의 찰나를 촉이라 한다. 이는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물에

마음이 닿는 순간을 뜻한다.



이와 같이 촉이 성립되면 그 즉시에 마음 안에는 경각심(警覺心)이 나타난다.

이를 작의심소(作意心所)라고 한다.

이 작의심소는 갑자기 큰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는 등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보통은 자연스럽게 작용하니까 작의심소의 작용을 알 수 없지만 불의의 사건

을 접할 때는 능히 알 수 있는 작용이다.




그 다음에는 수심소(受心所)가 야기한다.

이는 작의심소가 앞에 무엇이 나타났다고 경종을 울려주면 그 대상의 내용을 영접하여

사실 그대로 안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 대상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고(苦受) 또 마음에 알맞으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樂受) 된다. 그리고 대상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그저 그런대로 좋고 나쁜 생각 없이 무심히 받아들이게(捨受) 된다.



그 다음 상(想)은 밖을 통하여 어떤 대상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대상의 모습을 구별(取像)하는 작용을 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심소(思心所)는 마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모습에 대하여 선(善)이다,

악(惡)이다 하는 선악의 결정을 내려주는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심소를 오변행 심소라고 하는데 이들 작용은 어떤 심식

에든지 반드시 나타나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는 정신작용인 것이다.








2) 별경심소(別境心所)



별경심소는 위에서 말한 변행심소와 같이 모든 대상(境)에 다 같이 두루두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인식의 대상 위에 나타나 특성 있게 인식활동을 한다.

그 종류는 욕(慾),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 등 다섯 가지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욕(慾)은 인식의 대상에 나아가고자 하며 항상 희망을 갖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희망

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음이 지혜로우면 선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고, 마음이 무지하여 번뇌가 많으면

악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누구나 욕심(慾心)을 갖고 있는데 선욕(善慾)을

갖느냐 아니면 악욕(惡慾)을 갖느냐에 따라 그 행위도 선행 또는 악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 승해(勝解)는 어떤 경지를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정(正)과 사(邪)를 분명히 아는 심리작용

이다. 이러한 것은 선정(禪定)의 수행과 여러 수행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청정하여져서

모든 사물과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 염(念)은 일찍이 마음에 암기하고 익혔거나 있었던 일들을 마음속에 분명히 기억해 두는

심리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염은 다른 생각과는 달라서 안정된 마음에 의지(定依)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받아서 기억할 때 그 내용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기록(明記)하

여 두는 심소이다.



* 정(定)은 첫째로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여 모든 잡념을 없애며 동시에 심식이 대상을

인식할 때 동요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관(觀)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이 정심(定心)은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마음속의 지혜를 나타나게

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심이 나타나면 반드시 지혜가 나타나게 되며 그 지혜는 인식대상의 모습(相)만

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性)까지도 관찰하여 그 대상이 지닌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결택지(決擇智)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사리(事理)를 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력(智力)이 있기 때문이다.



* 혜(慧)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찰하는 대상(所觀境)에 대하여 옳고 그름(是非)을 분명

하게 선별하여 주는 마음이다.

이 혜는 간택(簡擇)함을 성(性)으로 하고 또 모든 의심을 끊고 확신을 갖게 하는

인식능력으로서 단의(斷疑)를 업(業)으로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오종의 별경심소는 여러 심소 가운데 하나하나 나타나서 비록 번뇌심이지만

지혜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심리작용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변행심소는 어느 심식에나 자주 나타나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반면에

오별경심소는 모든 객관계의 대상을 올바로 인식하고 내면의 정신계를 안정시키며 지혜롭고

조화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심리작용들이다.

이들 심소들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번뇌가 감소할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을 정화하여 바람직한 심소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불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다.

수행은 곧 정(定)과 혜(慧)를 나타내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행복과 안락을 가져다 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마음의 체성(心體)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마음의 작용(心所) 가운데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 가운데는 그 성질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의 심소(善心所)와 악의 심소(惡心所)를 말한다. 이들 두 심소는 마음의 체성(心王)

에서 나타나는 작용들로서 그 성질이 상대적이며 내면세계는 물론 객관세계에 미치는 영향

도 매우 대조적이다.



다시 말하면 착한 행동은 선의 심소에서 나타나며,

악한 행동은 악의 심소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심소의 행위에 따라 선업(善業) 또는 악업(惡業)이 조성된다.

동시에 이들 업력에 의하여 우리 자신의 정신계와 객관세계의 고락(苦樂)을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 선업과 악업은 사망할 때 선도(善道)로 이끌어 주고

또 악도(惡道)로 이끌어 주는 핵심역할을 한다.

이제 선심소(善心所)와 악심소(惡心所)의 종류와 내용이 무엇인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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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의식(意識)과 번뇌작용(煩惱作用)



이상으로 제6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제6의식은 우리 인간의 심식(心識)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며 우리 생활의 전부를 결정하는 정신이다.




때로는 눈. 귀. 코. 입. 몸 등 오관(五根)을 통하여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객관세계(六境)를 인식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의 역할을 하고,

또 대내적으로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추측하며 계획도 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몽중의식(夢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이와 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淸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 가운데서 가장 넓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광범의한 역할을 하는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은 이들 의식생활이 핵심이 되며 의식생활 여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하고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중의식의 생활이다.

현대인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주체는 곧 정중의식 뿐이며 동시에 복잡한 산업시대에 잡념과 망상을 극복하고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까지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정중의식의 생활화를 실천하는 길 뿐이다.

이제 정중의식에 의하여 정화되는 대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위에서 소개한 산란의식이며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6의식을 산란케 하는 것이 곧 번뇌이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뇌를 야기하는 근원은 제6의식이 아니라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고 한다.

이 말나식이 진리를 망각하여 비진리적인 번뇌망상을 야기하며 제6의식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제7말나식을 설명할 때 다루기로 하고 제6의식 자체에도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나식만큼 근원적인 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번뇌는 제6의식이 오히려 광범위하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정신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제6의식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산란의식의 상태가 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곧 정중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지혜를 방해하고 의식을 흐리게 하여 불행한 업력만 조성하는 정신작용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진리를 망각하여 진리로운 가치관을 상실한 채 고통을 받게 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야기하는 무명(無明)이 있게 되는데 이는 의식의 행위를 그릇되게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며 열반(涅槃)과 보리(菩堤)를 장애한다.

아집은 무아(無我)의 경지인 순수한 자아를 망각하고 집착하여 끝없는 이기심을 나타내는 근원이 되며,

법집은 모든 인연으로 구성된 사물의 진실성을 망각하고 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끝없는 소유욕을 나타내며 온갖 악행을 유도하는 근원이 된다.

이들 탐심이 앞서니까 자신의 의식에 거슬리면 즉각 진심(瞋心)을 내며 또한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아만(我慢)을 나타낸다.




이러한 마음들은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는 정신작용들이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들은

남을 멸시하고 질투하며(嫉),

한탄(恨)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을 속이며(誑),

동시에 자기 이익을 위하여 아첨(諂)하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한다.

이와 같이 아집과 법집에 의하여 나타나는 의식은 뚜렷한 진리관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차지 못하고 오히려 놀고, 방탕한 것이 행복인양 착각한다.

동시에 게으른 마음(懈怠心)과

방종(放逸)하는 마음을 갖고 세월을 하송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참(無慙)과 무괴(無愧)라는 마음으로 반성과 참회를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에 가로막힌 의식은 항상 혼침(惛沈)과 흔들리는 도거(掉擧)의 마음을 중심하여 산란하고 침체된 의식 속에서 악업(惡業)만 조성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의식작용들을 유식학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라고 부른다. 번뇌는 마음을 번거롭게 하며 혼란시키고 고뇌를 일으키는 작용으로서 이를 곧 악(惡)이라고 표현한다. 악은 또 고통과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모든 의식의 번뇌현상은 죄업과 일치되며 불행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통한 살생 등

십악업(十惡業)과 불살생 등 십선업(十善業)과는 매우 다른 심리적인 업력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욱 심리적으로 세분화한 죄업설인 것이다.




이상으로 제6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의 현상 그리고 산란의식적인 내용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의식생활은 각자의 수행력에 의하여 정화되며 정화된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이 정중의식은 선업(善業)의 핵심이 되며 위에서 말한 번뇌의식과는 달리 모든 생활을 밝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정(定)에서 나타나는 의식은 모든 진리를 확신하는 지혜를 동반하며 그 생활을 열반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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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독두의식(獨頭意識)



의식의 또 하나의 별명을 보면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의식의 객관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마음 안에서 단독으로 활동하는 의식을 이름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두의식은 내면세계에서 단독으로 의식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생각하는 일이라든가 또 현재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을 추리하고 예측하며 계획하는 일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깊은 사유에 빠져 생각하는 일이 많고 또 여러 가지 잡념을 야기하여 온갖 생각을 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심리작용은 모두 독두의식에 속하는 것이며 그 내용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독두의식도 내용별로 다시 분류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그것은 곧 몽중의식(夢中意識)과 독산의식(獨散意識) 그리고 정중의식(定中意識) 등을 말한다. 이들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 몽중의식(夢中意識)

몽중의식은 글자 그대로 꿈 가운데서의 의식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은 천태망상으로 나타나고 또 비현실적인 꿈들이 너무 많아 꿈을 꾼 자신도 꿈의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고 동시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꿈의 주인공을 불교에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이들 꿈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순전히 환상이며 거짓된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식이 아무런 근거없이 헤매는 거짓작용을 나타낸 것으로서 되도록 꿈이 없는 것을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꿈은 공허한 의식작용으로서 실다운 것이 없기 때문에 의식의 피로만 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전한 의식에는 꿈이 없다고 하며 꿈이 없는 의식은 정신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하나의 꿈은 전혀 거짓된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유가사지론 등에서 꿈이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사실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은 전혀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꿈은 가몽(假夢)과 실몽(實夢)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가몽은 거짓된 꿈을 날하고 실몽은 실제의 체험과 경험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실몽의 경우는 유식학적으로 해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생활 속에서 객관계와 주관계를 모두 포함한 법경(法境)을 인식하는 심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오식과 같이 인식의 활동을 하면서도 최종적인 결정은 의식이 하기 때문에 그 결정적인 의식활동이 꿈속에서 사실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구별하여 수발업(隨發業)과 정발업(正發業)이라고도 한다.




발업이라는 말은 행동을 하고 또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눈, 귀, 코, 입, 몸 등 오온을 통하여 활동하는 전오식은 자연발생적으로 외부의 인연에 따라 나타나며 또 수동적으로 의식에 따라서 활동하는 심식들이기 때문에

전오식의 행동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오식과 는 달리 의식적이고 사유적이며 어떤 동작을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다. 그리고 전오식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도 그 내용과 가치를 결정하는 심식은 곧 의식이기 때문에 이 의식의 활동을 정발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매우 강력하고 주관계의 활동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그 활동의 업력이 이른바 아라야식 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는 잠이 깬 상태나 잠을 자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항상 의식을 통하여 평소 익혔던 일들이 현재의 심행(心行)과 신행(身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에 익혔든 아니면 몇 년 전에 익혔든 관계없이 한 번 경험하고 체험한 것은 의식을 통하여 다시 실현되기 때문에 꿈속에 실현된 것에 대한 의식을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고 이름한다.







나) 독산의식(獨散意識)

다음에는 독산의식(獨散意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산의식은 평소의 의식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른 심식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헤매는 것을 뜻한다. 단독으로 헤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상실하고 인식의 대상(法境)과도 일치하지 못하며 방탕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의 의식은 산만하고 분열된 현상을 보이며 정처없이 밖을 향하여 달려 나가려는 산란심소(散亂心所)를 야기하게 된다.




심소(心所)는 의식의 체(體)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행동에 의하여 나타나는 작용을 말한 것으로 이러한 독산의식은 산란하여 흩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암기력(暗記力)이 없어지게 된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여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고 명칭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극도로 정상을 잃고 산만하게 되면 비정상의식으로 변하게 되며 결국 광식(狂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때의 광식은 사실을 곡해하는 전도(顚倒)된 마음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를 미쳤다고 표현한다.




예들 들면 눈병이 난 사람이 푸른하늘을 누렇게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착각과 환각을 야기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비량심(非量心)이라고 한다. 즉 그릇되게 인식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인식 내용을 세 가지로 구별하여 말한다.

그것을 삼량(三量)이라고 하는데 양(量)이라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양탁(量度)이라고 하며 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삼량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현량(現量)이요,

둘째는 비량(比量)이며

셋째는 비량(非量)의 내용으로 구별한다.

현량은 앞에 놓인 사물을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무엇이나 틀림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량(比量)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량은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간혹 틀리게 인식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예를 들면 담장 너머에 뿔이 보였을 때 이를 추리하여 소가 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반면에 소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소와 비슷한 뿔을 가진 또다른 동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먼 곳에 연기가 보일 때 그곳에는 불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구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량(比量)은 간혹 틀릴 수 있는 인식의 내용을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사를 그릇되게 판단하는 인식의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인식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산란의식은 비량의 인식을 파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여 산란심을 없애는 정신생활이 매우 긴요한 것이다.









6) 정중의식(定中意識)



다음으로 제6의식에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는 별명이 있다.

정중의식은 마음의 안정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산란의식과 같은 마음을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정(禪定) 가운데 유지되는 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입정(入定) 가운데 나타나는 지혜로운 마음을 정중의식이라 한다. 여기서 정(定)이라는 말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은 경지(不動心)를 말하며 또한 산란하지 않은 마음(不亂心)의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마음은 마음을 요란케 하고 분열시키며 지혜의 활동을 장애하는 번뇌(煩惱)를 정화한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또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에서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定)의 뜻을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과 대상이 하나가 된 경지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는 마음에 한 점의 잡념도 없고 번뇌가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과 인식의 장애를 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상과 같이 정중의식은 마음이 가장 잘 정화된 청정심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말한다.

이 의식에서는 오직 진리만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열(禪悅)과 법열(法悅)에 해당하는

희열(喜悅)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심식을 말하여 무분별식(無分別識) 또는 무차별식(無差別識)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통일되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평등심만이 나타날 뿐이며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나타난 심일경성(心一境性)이기 때문에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중의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모든 대상(法相)은 그 실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히 나타나며 차별없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경지를 증득(證得)이라 한다.




증(證)이라는 말은 경계(境界)가 없다는 뜻으로서 합일(合一)의 경지를 뜻한다. 이는 곧 각(覺)과도 통한다. 모든 대상(法相)을 진리롭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깨닫는 경지는 피차(彼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피차가 없는 하나의 경지에서 체득하고 득입(得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체(法體)가 지닌 체성(體性)까지도 인식한다. 이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정중의식인 것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번뇌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유로우며 고통이 없고 편안한 열반(涅槃)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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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6의식(第六意識)과 의근(意根)



제6의식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할 때 앞에서 살펴본 안식 등 전오식 다음에 설명하게 되고 또 전오식 다음의 제6위에서 설명하는 식이라는 뜻이다.




이 의식은 전오식에 의하여 식별되는 대상을 다시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 마음을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심식은 본래 전오식과 함께 단순히 식(識)이라고만 호칭되었던 것을 이 식의 의지처인 근(根)의 이름을 따서 식명을 붙인다는 원칙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의식(意識)과 의근(意根)



본래 의식(意識)이라는 명칭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도 이미 써 왔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대승불교와 크게 다르다. 먼저 소승불교의 경우를 보면 대승불교와 같이 의식이 의지하는 소의근(所依根)의 이름을 따서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의식이 의지한다는 의근(意根)의 사상에 있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와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




그 내용을 보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은 안근 등과 같이 육체의 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인 것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근을 일명 심근(心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심근에 해당하는 의근은 대승불교에서와 같이 일정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 중 앞의 작용이라고 단정하였다. 여기서 마음의 전 작용이란 눈(眼識), 귀(耳識), 코(鼻識), 혀(舌識), 몸(身識), 뜻(意識) 등 여섯 가지 마음(六識)이 앞 생각(前念)과 뒷 생각(後念)을 나타내는데 이 중 앞 생각을 뜻한다.

앞 생각은 앞에서 없어지면서 뒷 생각을 발생시키는(前滅後生)바탕이 되며 뒷 생각은 앞 생각에 의지하여 발생하게 되므로 뒷 생각의 의지처인 앞 생각을 의근(意根)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이들 육식에는 모두 전념과 후념을 되풀이하는 마음으로 모두 의근의 뜻이 있으나 그러나 안식 등 전오식은 안근 등 육체상의 의지처(所依處)가 있으므로 심근(心根)에 해당하는 의근의 뜻이 약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육체상의 의지처가 없는 의식에만 의근의 뜻을 부여하게 되었다. 즉 의식이 내면세계의 주체가 되면서 의식의 전념을 의근으로 하여 후념이 나타나는 등 의식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을 의식 자체에서 발생하는 앞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의 앞 생각을 의근이라고 한다면 평소 건전한 정신상태하에서는 이 이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만약 의식불명이 되거나 어떤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상태가 고르지 않는

등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된다면 그 때는 그 의근의 의미를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식학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없애고 영원성이 있는 의근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식의 종류를 소승불교의 육식(六識)사상에다 말나식과 아라야식을 더하여 팔식(八識)사상을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단절됨이 없는 의근사상도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의근(意根)은 곧 제7말나식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유식학에서는 심의식(心意識)사상을 논할 때

심(心)을 아라야식이라 하였고,

의(意)를 말나식이라 하였으며,

식(識)을 안식 등 6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6식 가운데 여섯 번 째의 식을 의식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식의 의지처인 소의근에 따라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즉 제6식은 제7말나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종래의 소승불교에서 앞 생각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을 혁신하여 말나식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말나(manas)라는 말을 의역하면 의(意)라는 뜻인데

이 의(意)라는 이름을 제6식에 양보하여 제6의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제7식은 제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원어 그대로 말나(末那, manas)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중국의 현장법사가 역경할 때 정한 것이며 현장법사 이전에는 제6식과 제7식을 의의식(意意識)이라고 번역하여 후세 학인들에게 혼돈을 야기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의근사상은 소승과 대승의 견해가 크게 다르며 유식학에서 크게 발전시켜 과거, 현재, 미래 할 것이 없이 삼세(三世)를 통하여 단절되지 않은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설사 의식불명이 된다 하더라도 그 의근은 단절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 이유는 의식의 의지처인 말나식이 단절되는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다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의근(意根)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의근은 소승불교적인 앞 생각(前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제7말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의근은 의식을 비롯한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의근은 직접적으로는 제6의식의 의지처이기는 하지만 이는 서로 주종(主從)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은 그 체성(體性)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상호간에 의지하고 공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근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이 의근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잘 유지시켜 주는 의지처가 된다.

그런데 뒤에 이야기할 문제이지만 말나식과 아라야식은 식 자체인 체성의 내용에 의하여 이름이 정해진 것이고 제6의식만은 의지처인 의근을 이름을 따서 식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2) 의식(意識)의 광연(廣緣)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근에 의지하는 의식은 안식과 이식 등 전오식과는 달리 내면의

의식활동을 전담하는 등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그 활동의 범위에 따라 의식을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광연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 의식은 법경(法境)을 인식한다. 법경이라고 하는 법(法)은 물질계(色法)와 정신계(心法)를 모두 포함한 진리를 말하며 경(境)은 곧 인식의 대상을 뜻한다.

동시에 이들 물질계와 정신계는 그 내용별로 부정(不淨)한 것(有漏法)과 청정한 것(無漏法)으로 나누어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들 유루법과 무루법을 모두 상대하여 인식활동을 펴는 것이 제6의식의 활동영역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모든 대상을 상대적인 경지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도 인식한다. 만약 의식에 여러 가지 번뇌가 있는 심식일 때는 모든 법을 상대하여 선과 악 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無記) 등으로 분별하지만 그러나 의식이 정화(淨化)되어 청정심으로 있을 때는 모든 법(諸法)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마음과 물질계가 하나의 경지를 이루는 절대의 경지(唯識無境)를 관조하게 된다. 이때는 번뇌의 장애를 받는 의식이 아니라 의식 속의 번뇌를 정화하여 나타나는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상(眞相) 그대로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역할을 하고 또 다양하게 작용을 하는 의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역할을 하는지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3) 오구의식(五俱意識)



의식은 객관세계를 관찰하며 판단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나 객관세계의 사물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앞에 안식 등 오종의 심식(五蘊)에 가담하여 그 대상을 분별한다. 그러므로 이 의식의 별명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 눈(眼根)에 의하여 색깔(色境)을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이에 가담하여 청색, 황색 등 색깔의 내용을 파악하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최종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또 이식이 소리(聲境)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그 소리가 높고, 낮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여러 가지 소리의 내용을 식별한다.




다른 심식도 마찬가지이다. 즉 코로 냄새를 맡는 비식이 냄새(香境)를 맡을 때, 그리고 혀로 맛을 아는 마음인 설식이 맛(味境)을 식별하고자 할 때, 또는 몸으로 닿는 곳마다 촉감(觸境)을 느낄 때와 같은 모든 현상에 의식은 즉각 그들 심식과 함께 반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식은 냄새가 좋다거나 나쁘다든가 또 맛에 대하여 쓰다, 달다, 시다, 짜다, 등을 구별하고 그리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그 내용이 딱딱하다, 부드럽다, 차다, 덥다 등은 이 의식이 모두 구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 그 대상을 식별하기는 하나 완전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의식이 이들 심식들에 필히 가담하여 분별하는 식이라는 뜻에서 오구의식이라고 한다.









4) 분별의식(分別意識)




제6의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인식활동을 한다고 해서 오구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또 의식은 전오식의 인식대상인 색깔(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 촉감(觸境) 등 오경(五境)의 대상을 안식 등 오식보다 더욱 분별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분별의식(分別意識)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분별력이라고 말할 때 곧 이 의식의 분별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6의식은 전오식의 의지처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전오식에 대한 의식을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에게 네 가지 의지처(四依)가 있는데 이 가운데 의식은 분별력을 빌리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분별의식이라고 하며 또 전오식에 대한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그런데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객관계의 인식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물론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다가 단독으로 인식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과 인식의 대상을 같이 반연하여 식별하는 오구동연의식(五俱同緣意識)이 있는가 하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그 대상에는 같이 반연하지 않고 단독으로 어떤 대상을 생각하며 반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고 이름한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 어떤 그림을 볼 때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주시라고 한다.

주시는 그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보고 이해한다는 뜻인데 그러나 그 그림만을 계속 응시하며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그림에서 눈을 떼고 또 다른 대상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감각기관은 육체상에 조직된 눈, 코, 혀, 귀, 몸 등 오관으로 구별되는데 이들 오관을 통하여 그 기능에 따라 소리, 냄새, 촉감 등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한 대상만을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6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분별하다가 다른 대상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전오식과 관계없이 단독으로 전오식과 함께 보고 들었던 일들을 그 후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하며 또한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전오식과 동일한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별명이 많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