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현존, 그리고 마음과 감정에 대하여/에크하르톨레

2015. 12. 13. 13: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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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현존, 그리고 마음과 감정에 대하여/에크하르톨레    

           

 

▣.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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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자를 지켜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하면 의사는 그에게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머릿속으로 하나 이상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저절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독백 이나 대화對話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집니다.


거리를 걷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미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입 밖으로 큰 소리를 내지

않을 뿐이지요. 그 목소리는 뭔가 자기 의견을 내놓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비교

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그때그때의 특정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깝거나 먼 과거를 재현할

수도 있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연습하거나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못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소위 근심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 목소리는 시각 이미지나 영상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 목소리는 가까운 장래에 관한 상황일 때조차 과거에 비추어서 그 상황을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당신의 조건화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당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단적인 문화의 소산일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겪은 과거 역사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눈을 통해 현재를 보고 판단하면서 완전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소리야말로 당신 자기의 가장 큰 적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대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처벌하여 활력을 앗아가는 고문 도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 질병이 생겨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방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가능하면 자주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사고 유형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 는 의미입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자리에 목격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고 비난을 퍼붓지도 마십시오. 어떤 판단을 하고 비난을 하면

똑같은 목소리가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는 셈입니다. 목소리가 들리면,

 ‘아,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할 뿐, 거기에 끼어들지 않고

여기에 남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현존現存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생각뿐이 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로서의

자신 또한 의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임에 따라, 그 생각의 저변이나 뒤안에 있는 더 깊은 곳의

당신 자신을, 그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당신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은 힘을 잃고 재빨리 자리를 피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거기에 힘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틈새가 처음에는 몇 초에 지나지

않겠지만 점차 길어질 겁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존재와의 자연스러운 합일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고요와 평화의 느낌이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사실, 그 깊이에는 끝이 없습니다. 당신은 또한 깊은 내면에서부터 불가사의한 존재의

기쁨이 번져나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무아지경의 상태가 아닙니다.

결코 의식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평화를 얻는 대신 의식이 흐려지고,

고요함을 얻는 대신 활력과 예민함이 줄어든다면 무엇 때문에 그걸 얻으려고

애쓰겠습니까? 내면의 연결 상태 속에서 당신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했을 때보다 훨씬

더 또렷이 깨어있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에너지 장場의 진동 주파수가 높아져서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무심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소위 순수의식

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현존하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생각과 감정, 육체뿐만 아니라 외부 세상 전체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해집니다.

순수 의식의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기自己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그제야 ‘나 자신’에 대한 예전의 생각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현존이야말로 당신자신의 진정한 본질이며, 동시에 당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입니다. 내가 말하는 바가 역설적이거나 모순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는 대신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을 확고 하게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거두어들여서 주의를 집중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무심의 틈새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입니다.


이는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일상적인 활동에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집이나 직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계단 하나하나에, 걸음을 옮겨놓는

 동작 하나하나에,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십시오.

손을 씻을 때에도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물이 흐르는 소리와 물이 닿는 느낌, 손의 움직임, 비누의 향기 등을 놓치지 마십시오.

자동차를 탈 때에도 문을 닫은 후 잠시 모든 동작을 멈추고 호흡의 흐름을 지켜보십시오.

 

고요하지만 강렬한 현존의 감각을 느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러한 수행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느끼는 내면의 평화가 어느 정도인지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同一時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 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의식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미소짓듯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發見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마음에 의존하지 않게 됨으로써 마음이 지어내는 내용물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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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요?


마음은 도구이며 연장입니다.

마음이란 특별한 과업에 사용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내려놓아도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에서 80~90퍼센트는 반복적이고 부질없는

잡념 불과합니다. 더구나 부정적인 성질을 품고 있을 때도 적지 않아서,

대부분의 생각들이 해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신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겁니다.

부질없고 해로운 생각들로 인해 소중한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행렬이란 사실, 중독이나 다름없습니다. 중독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중독이란 나보다 더 강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짓된 즐거움을, 고통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생각에 중독될 수밖에 없나요?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내용물과 활동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자신의 존재 또한 끝장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된 자아를 ‘에고[ego]’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에고[ego]라는 용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그 말을 사용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창조된 거짓된 자아를 뜻합니다.

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는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에고로 존재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고[ego]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말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난 행복할 텐데. 저런 일이 생기면 난 평화로워질 텐데.”


에고[ego]가 현재에 관여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고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닙니다. 에고는 과거의 눈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서 현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축소하기 일쑤이지요.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분석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좀더 집중적으로 좀더 분명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마음을 잃어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죠.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을 겁니다.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는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괴물로 자라나 우리 자신을 파괴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생각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을 딛고 솟아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동물이나 식물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생각하는 마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롭게,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부릴 수 있게 되고, 무언가 창조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시계추처럼 생각과

생각 없음 사이를, 유심과 무심 사이를 몇 분 간격으로 오갈 수 있을 겁니다.

무심[無心]이란 생각의 헤아림이 없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생각은 자기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파괴적이 됩니다.


마음이란 본질적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도구입니다.

다른 마음들과 대적할 때 공격과 방어를 하고, 정보를 얻고, 저장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하지만 창조적이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창조력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무심의 장소로부터, 고요한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은 창조적인 충동이나 통찰에 형상을 부여할 뿐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생각이

멈춘 순간의 고요한 상태에서 창조적인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해 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연구 방법을 질의한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창조적인 활동에 있어서 생각은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생각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과 육체라는 기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마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성이 작동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름이 0.2밀리미터도 안 되는 인간 세포의 DNA가 어떻게 600쪽 분량의 책 100권 정도를

채울 수 있는 지령을 담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작용하는 지성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마음이 그러한 지성과 다시 연결된다면 경이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은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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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란 무얼까요? 나는 마음보다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더 짙은 것 같아요.


마음이란 단지 생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생각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무의식적인 반응까지 포함합니다.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 몸 안에는 분노 에너지가 강화됩니다.

몸이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것이죠.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몸의 반응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강렬한 감정은 신체 내부에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화학적 변화가 감정이 가진 육체적·물질적인 면입니다.

 

대개가 자신의 사고 유형을 모두 다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의 감정을 지켜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그러한 생각들을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면 할수록, 다시 말하자면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현존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감정적인 에너지 소비가 더 많아집니다.

감정을 느낄 수 없고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감정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 육체의 문제나 증상으로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책이 쓰여진 바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강한 무의식적 감정이 우연처럼 보이는 외부적인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을

표출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분노를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신체적인 공격이나 언어적인 폭력을 당하곤 합니다.

 

나는 이런 것을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분노를 발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몸 안의 에너지 장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몸이 말하는 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감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당신은 감정이란 몸 안에 반영되는 마음이라고 말했지만,

 때로는 감정과 마음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 않나요?

마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감정은 그렇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나요? 그러면 몸을 들여다보십시오.

몸은 항상 마음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보여줄 겁니다. 몸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바라보거나

느껴 보십시오. 마음과 감정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마음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실입니다. 당신의 감정 상태가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마음상태에 대한 상대적인 진실眞實일 것입니다.


표면적인 생각과 무의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무의식적인 마음 활동이 아직 생각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무의식은 항상 우리 몸 안에 감정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생각을 지켜보거나 귀 기울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생각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감정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주로 몸 안에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로써 감정感情에 지배당하지 않고,

감정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감정 자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정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연습하면, 당신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모든 것이 의식의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관찰하는 것이 생각을 관찰하는 것만큼 중요한가요?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십시오.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줄 것입니다.

하지만 분석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 보십시오.

만일 아무 감정이 없다면 문 안의 에너지 장을 향해 좀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존재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감정에는 보통 왕성하고 활발한 생각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에너지가 지나치게 압도적인 나머지 처음에는 그냥 지켜보고 있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은 우리를 점령하려 하고, 대개는 그렇게 되고 맙니다.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 감정은 일시적이나마 ‘나’가 되어 버립니다.

 

생각과 감정感情은 서로를 돌고 도는 못된 습성이 있어서 서로를 부채질합니다.

일련의 생각들은 감정의 형태를 스스로를 확대하고, 감정의 진동 주파수는 애초의 생각들에

계속해서 먹이를 제공합니다. 감정의 원인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나 사건, 또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런 생각들이 감정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그렇게 에너지를 얻은 감정은

다시 생각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식으로 서로를 키워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습니다.

모든 감정은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상실함으로써 느끼게 된 애초의 원시적인 감정이

변형된 것입니다. 애초의 그 감정은 성격이 불분명해서 딱히 무어라고 이름 짓기 곤란합니다.

그나마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거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속적인 위협을 느끼는 것만이 ‘두려움’은 아닙니다.

자포자기와 자신의 불완전함을 깊이 느끼는 것 또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런 감정은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만큼 그냥

‘고통’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하는 주요한 과업 중 하나는

이런 감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그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토록 분주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두는 정도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사실, 마음이 고통을 없애려고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마음은 결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해결책을 찾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죠. 경찰서장이 불을 질러 놓고는

화범火犯을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이런 고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고[ego]의 옷을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에고라는 거짓된 자아[假我]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사랑이나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설 자리가 없나요?


사랑과 기쁨은 진정한 자신과 연결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우리 본연의 상태가 곧 사랑과 기쁨의 상태로서 그 감정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의 흐름 속에 틈새가 생길 때면 언제라도 사랑과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잠시나마

심오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틈새를 경험하는

일이 지극히 드물고, 어쩌다 우연히 경험할 뿐입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육체가 극도로 피곤해졌을 때, 혹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음이 ‘할 말을 잃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내적인 고요함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요함 속에는 미묘하면서도

강렬한 기쁨이 있고, 사랑과 평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대개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곧 ‘생각’이라는 시끄러운 활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생각의 지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전까지는 꽃피울 수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 너머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감정感情을 완전히 의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만 그 너머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이란 문자 그대로 ‘교란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emotion은 ‘교란하다’라는 라틴어

movere에서 유래된 말).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존재의 심오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와 내적으로 연결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립이 없습니다. 반면, 마음의 일부인 감정은 이원성의 법칙에 따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악이 없으면 선도 없습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쾌락에 지나지 않아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극단을 오갈 수 있을 뿐입니다. 쾌락은 항상 외부外部에서 오지만 기쁨은 내면內面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즐거움을 주는 바로 그것이 내일은 고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쾌락이 떠난 자리에는 고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동안은 즐겁고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위태롭고 중독적인 집착이기 쉬워서, 스위치를

한번 누르기만 하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고 맙니다. 수많은 ‘사랑의 관계’들을 보십시오.

처음의 도취 상태가 지나가면, 사랑과 증오가 밀고 당기기를 되풀이할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한 사랑은 갑작스럽게 증오로 변하지 않고, 진정한 기쁨 또한 쉽사리 고통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사랑을, 내면의 깊은 평화를, 고요하면서도 진정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잠시 잠깐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지만, 대개는 마음에 의해 흐려져 있기 일쑤입니다.


중독된 사랑의 관계 속에서도 오염되고 부패되지 않은 어떤 순간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잠시뿐이고, 마음의 방해로 곧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매우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그것은 단지 부질없는 환상이었을 뿐이라는 마음의 속삭임에 설득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잃으려야 잃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 처해 있던 상태의 일부이기 때문에 마음에 의해 가려질 수는 있지만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이 잔뜩 흐려 있을 때에도 태양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고통이나 번뇌가 욕망이나 집착에서 생겨나며,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탐욕은 순수한 존재의 기쁨 대신 외부 세상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나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한 그러한 탐욕, 욕구, 바람, 애착,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런 것들과 분리되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게 됩니다.

단지 어떤 가능성, 어떤 충족되지 못한 잠재력, 아직 뿌려지지 않은 씨앗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나 깨달음에 대한 바람조차도 미래의 만족이나 완성을 위한 또 다른

집착에 불과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을 ‘성취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존재存在하십시오.

마음을 지켜보는 자로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붓다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붓다[Buddha]

되십시오. ‘붓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대로, ‘깨어난 ’가 되십시오.


은총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들은 시간과 마음의 영역에 묶여 충만한 존재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영겁의 세월 동안 고통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근원根原과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에게 이어지지 못한 채, 우주를 떠도는 무의미한 조각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Ego] 자신自身이라고 여기는 한

영적靈的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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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중 [양문 刊]




성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어느 날 저녁 프란체스코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체스코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체스코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평화의 기도"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죄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회의가 가득한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두운 곳에 당신의 빛을 설움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신 주님이시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여 주시고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uni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error, tru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를 훑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난다. 
하나는 ‘성 베네딕도(480~547)’이고,
또 하나는 ‘성 프란체스코(1182~1226)’다.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에 주춧돌을 놓았고,
프란체스코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에 영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특히 성 프란체스코는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프란체스코’란 이름 하나만으로 세계적인 순례지이자, 여행지가 됐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정교(政敎)유착의 특권을 향유하며
총체적으로 탈복음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을 때, 
1207년 청년 프란치스코는 허물어져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밑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는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맨손으로
흙과 돌을 들어 나르며 성당을 보수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중세 교회를 위한 ‘세기적’ 명령이었다. 
이를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여
위대한 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가 표방한 것은 복음으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사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세 가지 병폐인 부, 권력, 사치에 대한 명처방이었다. 
그 파급력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무력 혁명도 아니요,
센세이셔널한 사상으로 새 시대를 연 이데올로기 혁명도 아닌, 
그저 소박한 실천운동이었지만 세기를 거듭할수록
파장은 기하급수적으로 거세어져 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개혁’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쇄신의 단초를 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 형제들을 동지로 얻었고,
숱한 추종자들을 협력자로 얻었다.
 ‘제2의 예수’라 불렸을 만큼 존경 받는
성 프란치스코가 일으킨 운동의 여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증폭되면서
중세 가톨릭을 제자리로 돌려 놓게 되었다.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는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가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아시시의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모든것을 버린고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는 프란체스코에겐 친구이자,
누이이자, 함께 영성의 길을 가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성당 안의 조그만 정원에는 장미가 있다.
그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아무리 봐도 가시는 보이지 않았다. 
안내인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여성에 대한 욕정이 일어났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 근처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서 자신의 몸을 굴렸다. 
가시가 몸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웠을 거다.
그걸 통해 그는 욕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 장미 가시 위에서 뒹굴자
하늘이 장미의 가시를 없앴다고 한다.”
 이 일화는 대단히 인간적이다.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도 
욕망 앞에서 고민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시 싸우고 하는 과정을 거듭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란체스코가 걸었던 길은
리에게 ‘나도 당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길은 당신도 걸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짐승과 새들과도 말을 나눌 수 있었다는
청빈의 상징 성 프란치스코,
무소유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프란체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으로 찔렀던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