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7. 11:5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조셉 아르파이아 · 롭상 랍가이 著, 서보경 譯
2. 血脈論(혈맥론 :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보리달마의 혈맥론(血脈論)
삼계(三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문자의 정의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마음을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을 통해서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마음이란 인과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는 마음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부처나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들어올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 마음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마음에서 나온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오직 이 마음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부처가 마음이다.
마음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마음도 없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는 없는데 왜 그대는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대 자신을 계속 속이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마음 밖의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에게 비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들은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계율도 지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계율을 깨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것을 따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부처들은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은 채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깨달음 또는 불성을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가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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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대가 그저 앉아서 고요히 자신 안에 머무른다면 그래서 순수한 깨어있음으로 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 그대는 부처다.
그때 그대는 깨달음 그 자체이다.
깨달음이란 그대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존재가 바로 깨달음 자체이다.
그대의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런 본성이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어둠 속에 살면서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장님에게 빛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한 깨달은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 경험을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은 장님에게 안경을 파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많은 스승들이 침묵 속에서 살다 갔다.
입을 열어 말을 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말들이 그들의 깨달음, 그 아름다움과 그 기쁨과 그 향기를 전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경험을 말로 번역하는 순간 그것의 본질은 죽어 버린다.
그 시체만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심 때문에 몇몇 깨달은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대에게 삶이란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수세기에 걸쳐 무한한 노력을 기울였다.
삶은 오히려 무한 그 이상이다.
그러나 어떤 깨달은 사람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말은 약간의 체온이나마 갖고 있지만 글은 완전히 식어버린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말은 스승의 현존을 간직하고 있지만, 글로 씌어진 문자 속에는 스승의 현존이 담겨 있지 않다.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어떤 것을 가득 담고 있다.
스승의 현존이, 스승의 축복이, 스승의 은총이 거기에 들어 있다.
그대를 유혹하는 스승의 눈동자와 그대를 부르는 그의 가슴이 그대 자신 속으로 떠나는 여행에의 권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문자 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사람은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깨달은 사람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든 문헌이 사실은 제자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 제자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받아적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 제자는 스승을 사랑한다. 스승에게 깊이 빠져 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스승의 마술에 걸려 있지만 그 비밀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한 스승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승의 말이 그냥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제자는 생각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제자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 말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바로 순금 같은 것이다. 적어도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제자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며 그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기록한다.
첫째로, 스승이 말을 할 때 이미 많은 것이 사라진다.
그 다음, 제자가 그 말을 들을 때 더 많은 것이 사라진다.
제자가 그것을 글로 기록할 때 또 다시 많은 것이 사라진다.
그리고 제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기록을 남기며 그 기록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원래 목소리의 아득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달마는 중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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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도 출신이었다. 그는 후에 중국어를 배웠다.
삶의 핵심에 대한 경험은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대 가슴의 침묵은, 그대 존재의 축복은 모국어로도 전달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제 막 익힌 외국어로 그것을 표현하기란!
더구나 중국어는 그리 간단한 언어가 아니다. 중국어에 능통하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린다. 그 언어에는 알파벳도 없다.
그것의 글자는 상형문자이다. 아주 원시적인 문자 형태인 것이다.
알파벳이 있는 언어는 배우기가 쉽다.
그러나 중국어처럼 알파벳이 없는 문자는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대단히 배우기 어렵다.
수만 개의 글자 모양을 일일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자들은 상형문자들이다.
각각의 문자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수만 개에 달하는 상징문자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 언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향해 가는 3년 동안의 여행길에서 최대한으로 빨리 중국어를 익혔다. 30년이 걸리는 일을
3년 만에 끝낸 것이다.
자연히 그가 말하는 것과 그의 실제 체험에는 많은 거리가 생겨났다.
문제는 이 선어록이 중국어에서 또다시 영어로 번역되면서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 이 선어록의 핵심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마음(mind)'만 해도 그렇다.
이 선어록을 읽으면 누구나 달마의 본래 뜻을 정반대로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가 ‘mind'라는 단어에 있다.
영어에서 생각의 흐름을 나타내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마음이란 뜻의 ‘mind'이다.
그리고 영어에는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것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
고타마 붓다나 보리달마의 가르침 전체가 이 마음의 초월에 관해 말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는 그것들에 대한 단어가 있다.
‘마누스(manus)'는 생각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로 영어의 'mind'의 어원이 이 단어에 있다.
또한 여기 ‘치타(chitta)'가 있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초월한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대가 만일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만일 학자처럼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명상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 선어록에서 ‘마음’이란 단어를 발견하면 그대는 그것을 ‘무심’으로 읽을 것이다.
영어에는 사실 ‘무심(no-mind)'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말이다.
이 선어록 어느 곳에서나 '마음’이란 말이 나오면 그것을 ‘무심’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완전히 잘못된 길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선어록으로 들어가자.
삼계(三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무심(無心)으로 돌아온다.
번역자는 원래 이것을 ‘마음으로 돌아온다’라고 번역했다. 마음은 초월해야 할 그 무엇이다. 마음은 하나의 병이다.
명상은 그 마음을 초월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나는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기 위해 이후에도 ‘마음(mind)' 대신에 ’무심(no-mind)'으로 읽을 것이다.
이 번역가는 명상을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문자만을 이해한 사람이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삼계란 무엇인가? 그 삼계란 몸과 마음과 가슴이다.
이것들은 결국 네번째의 세계로 돌아오는데, 그것이 '투리야(turiya)'이다. 무심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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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는 어떤 사념의 파도도 없는 침묵의 세계이다.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마저 사라진 세계,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대상 없는 의식, 오직 그 자신만을 의식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홀로 빛나는 깨어있음의 세계이다.
삼라만상이 이 홀로 빛나는 깨어있음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래서 명상을 이해하는 번역가들은 '치타'라는 말을 항상 '무심'으로 번역해 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문자의 정의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한다.
이 말은 사실 터무니없는 말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잘 적어 놓는다.
이 말을 올바르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고쳐야 한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은 무심에서 무심으로, 침묵에서 침묵으로, 현존에서 현존으로 진리를 전한다.
침묵에서 침묵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해지는 진리에는 당연히 어떤 문자적인 정의가 필요 없다."
문자의 정의는 마음의 차원이다. 그대가 마음을 초월하는 순간 모든 문자 정의를 초월한다.
그때 제자의 마음은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마음을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다.
달마의 어록을 기록하고 있는 제자 자신이 혼란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는 묻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마음을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서 그 제자는 자신을 혼란에서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 제자로서는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틀린 대답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말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듣는 이를 침묵의 순간 속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진정한 전달은 말과 말 사이의 틈 속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 순간에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건너뛰는 소립자의 도약이 있다.
그것이 곧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적이고 아름다움이며 마술이다.
그 제자는 마치 달마가 한 말인양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영겁의 세월을 통해서 그대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제자는 정말 혼란에 빠졌다.
물론 명상이 하나의 초월이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한 누구라도 이처럼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공간을 초월한 자리이기에 마음의 작용으로는 그 자리에 이를 수 없다.
그 자리가 그대의 진짜 모습이다. 그것이 그대의 깨달음이며 불성이다.
그 침묵 속에서 나온 행동은 모두가 깨달음의 행동이다.
그 침묵속에서 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낙원의 연꽃이다.
그 침묵으로부터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없다. 사실 그 침묵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의 분별이, 선과 악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 침묵에서 나온 행동은 무엇이든지 실존적이고 하나의 당위이다.
그것은 그대의 노력이 아니다. 미리 계획된 행동이나 생각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고쳐 읽는다.
이 무심이 바로 부처이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무심이란 인과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대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대의 무심이 바로 열반이다.
내가 '무심'으로 읽는 이것이 어록에는 '마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그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달마 역시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도 마찬가지이고, 명상의 세계를 일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무심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 부처나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들어올리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무심에서 나온다.
사실 무심과 부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 선어록을 기록하고 있는 가엾은 제자는 그것을 모두 마음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왜 이 무심을 벗어나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오직 이 무심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 무심이 부처이다. 그리고 부처가 무심이다.
무심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는 무심도 없다.
만일 그대가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같은 실수가 이 선어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어록은 달마의 가장 오래된 어록이며, 거의 14세기 동안 달마의 가르침으로 당연시되어 왔다.
그 이유는 아무도 체험을 통해 이 선어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경전을 읽고 지식을 쌓았을 뿐이다. 그들의 내면은 여전히 무지의 구름으로 덮여 있다.
그들은 빛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장님일 뿐이다.
그래서 이 기록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직 마음을 벗어난 곳에만 부처가 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제자는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는 지금 마음과 부처가 동의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다면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다. 이미 부처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이상의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모든 생각의 속박으로부터, 감정과 분위기와 감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그런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초월한 곳에 하나의 지켜봄이 있다.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이다.
나는 이 제자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는 인류를 위해 큰 봉사를 했다. 그는 달마의 어록이 소멸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보존했다.
그에게는 달마의 말을 정확하게 기록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달마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면 그의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제자는 비록 어리석긴 했지만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이따금 그는 달마의 말을 육성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무심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무엇이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가?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감옥이다.
세상에는 종류가 다른 감옥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감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힌두교는 힌두교식의 감옥을 갖고 있다. 힌두교식의 건축 양식을 한 감옥이다.
이슬람교 역시 이슬람교식 건축 양식의 감옥을 갖고 있다.
기독교 역시 그들 식대로의 감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감옥의 형태는 다르지만 죄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똑같은 감옥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혹시 자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서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옮겨 다닌다.
기독교인은 힌두교로 개종하고, 힌두교는 불교도로 개종한다. 불교도는 다시 이슬람교로 옮겨 간다.
그들은 감옥의 건물만 바꿀 뿐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저 프로그램으로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입력된 프로그램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과학 용어에서 말하는 입력 프로그램 삭제가 곧 명상이다.
마음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깨끗이 지워지면 그대는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순수한 석판이 된다. 모든 지식이 지워져 나간
깨끗한 백지가 된다.
이 순수함이 무심의 시작이다. 이 순수함으로부터 그대 안에 부처가 탄생한다.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대 자신을 계속 속이는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이상 무심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른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큰 망상은 바로 그대 자신 밖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 밖에서 존재의 의미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찾는 것이다.
마음은 항상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과학 안에서, 사업 안에서, 경제구조 안에서, 그대 바깥의 모든 것 속에서 그토록 잘 꾸려 나가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런 것들 속에서 마음은 완벽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대 내면은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대가 내면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마음을 떠나 될 수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가 마음의 관찰자가 될 때, 마음을 그대 외부의 어떤 사물처럼 지켜보게 될 때, 그때가 바로 그대가 고향 집에
돌아온 순간이다.
달마 선어록을 기록한 제자와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아마도 명상을 체험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무심이라고 해야 가능한 것들 계속해서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여기 이 말은 달마의 말이 틀림없다고 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더없이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이다.
너무도 기상천외한 말이라서 이 가엾은 제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제자는 단지 그것을 받아적기만 했다.
그는 틀림없이 달마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달마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즉, 누구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나는 구세주다."라고 말했다.
그대가 예수와 달마를 비교한다면 그대는 무척 놀랄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는 양이고 나는 목자다. 너희가 길을 잃으면 나는 너희를 찾을 것이다."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대단히 자비 사상으로 들릴 것이다.
예수는 대단한 자비심과 사랑과 동정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인류가 구원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불쌍한 친구는 공연히 죽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항상 의아했다.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나는 한 설교사와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존스였는데 기도교 선교사로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고 매우 철학적인 심성을 갖고 있었다.
그가 우리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하루는 좀 정도가 지나쳤다. 그는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줄은 안다.
나는 사실 기독교인도 아니고, 이 교회 일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여기 모인 신도의 일원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의미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당신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인류가 구원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예수는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었다."
인도 밖에서 생겨난 종교들은 모두 구세주에 대한 사상을 갖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유대교 이 세 종교가 인도 밖에서 생겨난 종교들인데 모두 구세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인도 안에서는 네 가지 종교가 생겨났다. 그것은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이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유일한 두 종교다.
누구를 구원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심판이고 모욕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신의 독생자이며, 신의 예언자이며, 신이 보낸 사자이다. 그러나 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달마는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대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대 역시 부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한 부처가 다른 부처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부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깨울 때, 그대는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잠들어 있는 가엾은 한 친구를 깨움으로써 인류를 위해 대단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매우 깊은 뜻을 담은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차이라야 아주 약간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부처이다.
다만 몇 사람은 아직 잠들어 있어서 그 사실을 모를 뿐이고 몇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일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거기에는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 잠들어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다. 그대는 강제를 그를 깨울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자유를
간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알라하바드에서 갠지스 강둑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알라하바드의 한 기독교 대학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대학은 갠지스 강둑의 무척 아름다운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근처에는 철교가 있었다.
그날 나 홀로 그 강둑에 앉아 있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한 사람이 걸어와 강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가 멱을 감으려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물에 뛰어들자마자 그는 사람 살리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가까웠다.
한순간 나는 생각했다.'왜 저러지? 만일도움을 청할 양이었다면 왜 뛰어들었을까?'
어쨌든 먼저 그를 물에서 끌어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만일 내가 그냥 앉아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가는 시간이 지나서 그는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강에 뛰어들었다.
그는 매우 무거웠다. 아무튼 가까스로 그를 끌어내는데, 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말로는 계속 "살려 주세요, 나 물에 빠져 죽어요."라고 외치면서도 내가 그를 구하려고 하자 오히려 나에게 저항을 했다.
그는 내 도움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당신 미친 사람 아니야?
도대체 도움을 받고 싶은 거야, 말고 싶은 거야?"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그래서 나는 그를 물에서 끄집어냈다.
그런데 물 밖으로 다 나오자 그는 나한테 몹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상황을 보면 모르겠어요?
난 지금 자살을 하려는 중이란 말이오."
내가 말했다.
"진작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살려 달라는 소리는 왜 했지?"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죠.
난 자살하려고 했지만 내 무의식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려 달라고 소리친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를 물 속으로 떠밀면서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냥 내버려 두겠어."
그러자 그는 또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날 죽일 작정인가요?"
내가 말했다.
"난 그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난 단지 그대를 구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뿐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겠다."
그때 다른 사람이 달려와서 그를 물 속에서 구해 내었다.
이번에는 그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물 위로 올라왔다.
그는 물 밖으로 나와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어디로 갈텐가?"
그가 말했다.
"이것은 자살을 강요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아니다. 난 그대에게 자살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자살하려 했던 사람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것을 잊었는가?"
그가 말했다.
"당신은 매우 이상한 사람이군요.
누군가 자살을 하려고 하면 말리기 마련인데 당신은 오히려 자살을 도와 주니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물 밖으로 나오길 원한다면 나는 그대를 물 밖으로 건져 낼 것이다.
만일 그대가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대가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그대가 어떤 식으로 살든지 간섭하고 싶지 않다."
그가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것 또한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가 말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린 일이다.
난 다만 자살의 충동이 또다시 그대를 찾아올 수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이 자살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보통 이 강둑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오늘처럼 사람이 없기는 드문 일이다.
더구나 나처럼 어떤 식으로도 그대를 도울 준비가 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닌가."
그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것도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내가 없다면 아마 여기서 자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는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부처는 그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도록 도울 뿐이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부처이다. 아무 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것이 불교와 자이나교가 한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하지만 이 제자는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 문장만큼은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또다시 실수를 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사용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부처를 볼 수 없다.
그대가 무심 밖의 다른 곳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무심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기록자는 마음이라고 적었지만 나는 무심이라고 읽는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나는 다시금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이 말이 달마 자신에게서 나온 말임을 입증할 수 있다.
"부처를 섬기는 데 부처를 이용하지 말라."
부처가 다른 부처를 구원할 수 없듯이 부처가 다른 부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불교는 숭배하는 것에 반대한다.
고타마 붓다가 임종시에 한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의 불상을 만들지 말라. 나의 사원도 짓지 말라.
나는 전생애를 통틀어 그대가 바로 부처이며, 다른 부처를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특히 살아 있는 부처가 돌로 만든 부처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처에게 비는 데 마음을 사용하지 말라.
부처들은 경전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계율도 지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계율을 깨지도 않는다.
부처들은 어떤 것을 따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부처들은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행하지 않는다.
이 말 역시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 틀림없다. 어록을 기록하고 있는 제자는 이런 위대한 말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달마는 모든 부처들이 자신의 깨어 있음 외에 어떤 다른 계율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빛 외에는 어떤 경전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것을 따르지도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선을 행하지도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선과 악을 초월한 자연적인 본성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부처들은 청교도나 도덕론자가 아니다.
그들은 순수 의식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은 어떤 사상이나 계율이나 경전을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전도 외우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한 경전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 자신의 깨어 있음만으로도 충분히 길을 밝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은 채 부처에게 빌고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말들은 틀림없이 깨어 있는 사람의 소리와 울림을 갖고 있다. 이 말들은 틀림없이 달마로부터 나온 말이다.
그러나 제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뭔가 불편함을 느꼈다.
경전을 외우며 예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는 일들이 전부 쓸모가 없다니...
제자는 뭔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한 것은 비종교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종교는 이런 생각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제자는 즉시 자신의 생각을 집어 넣었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이것은 그가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아무 소용없다'는 말에 불편함을 느꼈다.
달마가 한 말이니 그대로 기록하긴 했지만 이제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희석시키는 것도 그의 자유였다.
사실 그는 갑자기 전체적인 억양을 바꾸어 말하고 있다.
물론 부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업을 쌓는 것이며 경전을 외우는 것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주며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장래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처는 없다.
그 제자는 달마의 말을 정확히 기록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대단히 긴장되고 힘든 일이었다.
달마가 하는 말들은 명상을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평범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든 평범한 종교와, 평범한 예언자들과, 소위 신들의 사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성스러운 경전의 생각에
모두 위배되는 것들이었다.
그 제자는 불편함을 느꼈고,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뒤에다 덧붙였다.
이제 명상의 참맛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이 선어록을 읽게 되면 그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덧붙인 이것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달마로부터 나온 수정같이 맑은 물에 그 제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집어넣고 흐려 놓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수정같이 맑은 접근법, 그런 세련된 접근법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의 계열에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달마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선불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선불교의 창시자는 마하가섭이다.
그러나 달마 앞에서는 마하가섭마저 빛을 잃을 정도이다.
달마는 선불교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의 과격함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미 때문에 고타마 붓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누군가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진리만을 말한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든 치료를 해주든 그것은 그대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그대를 위로하는 말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는다. 모든 위로의 말은 그대를 잠들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위로의 말은 아편의 일종인 것이다.
달마는 더없이 엄격한 사람이다. 그의 초상화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는 왕자 출신이다.
나는 수세기 동안 그려져 내려온 그의 초상화가 실제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표현이다. 그는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서웠던 것은 그가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진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대가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상처받을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대에게는 더이상 위로가 필요없다.
위로의 말은 그대로 하여금 더 깊은 잠 속에 빠져들게 할 뿐이다.
달마는 독특한 사람이다.
왜 그의 제자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난 충분히 이해한다.
그의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후계자를 뽑을 때까지도 그는 그 엄격함을 철저히 지켰다.
그는 오직 네 명의 제자만을 두었으며, 그 네 명 중에서 다시 한 명의 후계자를 선택하고자 했다.
그는 진실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세상에서 알려진 스승 중에서 가장 엄격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는 가장 자비로운 스승이었다. 그의 엄격함은 바로 그의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오쇼 라즈니쉬 달마어록 강의, 달마(Bodhidharma : The Greatest Zen Master)-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以心傳心>
"망념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는데
무엇으로써 망념을 없애야 합니까?"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네 다만 범.성의 두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니,
다시 그것을 어떻게 떨쳐버리겠느냐?
떨끝만큼도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이른바 '내가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고 한 것이 되느니라."
"이미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다면
어떻게 역대 조사들께서는 서로 이어 받았습니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면 어찌 마음 또한 없다고 하십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전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깨친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느니라."
"마음도 법도 없다면 어찌하여 전한다고 하십니까?"
"너는 마음에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얻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조사께서는,
'마음의 성품[心性]을 깨달았을 때에야 불가사의하리라.
요연히 사무쳐 얻을 바가 없나니,
얻었을 때라도 알았다 하지 못하노라'고 하셨느니라.
만약 이것을 너더러 알도록 한다 하여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 전심법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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