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원담스님

2017. 1. 21. 18: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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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이런 질문에 불성, 진아, 神我(신아), 스스로 존재한 자(I am who I am),

혹은 한 물건(一物, 一著子), 본성, 진여, ‘무엇 무엇’whatsoever이라고 답한다.

심오한 질문에 오묘한 답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든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종류의 질문은 전혀 심오하지도

않을뿐더러 너무나 평범한 질문이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 물건을 무엇인가 라는

일상의 질문과 똑 같은 질문이다.

그냥 저기 있는 것something out there,

존재being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불과할 뿐이다.

그같은 질문엔 어떤 다른 말을 갖다 붙이더라도 답이 된다.

그리고 그 답 역시 저기 어디엔가 있는 것something out somewhere이다.

저기 어디엔가 있는 그것 역시 존재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존재를 물으니 존재로 답한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는 나란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거기에 대해 나는 무엇 무엇이라고 답을 하니 답인 그 무엇 무엇 그것 역시

존재이다. 존재를 물었는데 또 다른 존재로 답한 것이다.

A를 물었는데 다른 A(A`로 표시하자)로 답한 것이다.

A나 A`는 존재라는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개념이다.

이런 논법을 同語反覆(동어반복), 토톨로지tautology라고 한다.

이 논법은 논리적 오류이다.

흔히들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아버지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 어머니를 낳았다.

이렇게 소급해 올라가면 최초의 아버지 어머니는 누가 낳았는가?

창조주가 만들어냈다. 그런데 창조주는 누가 창조했는가?

혹은 神(창조주)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면

혹자는 답하기를 神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니 神이란 존재는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경지이기에

神에 대해 묻기를 멈추라고 한다.

이런 類의 신학적 문답이 바로 동어반복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神이란 존재에 대해서 물으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경지, 상태, 초월적 의식)이라고 답한다.

존재를 물으니 존재로 답한 것이다. 땅이 무어냐고 물으니 흙이라 답하고,

흙이 무어냐고 물으니 모래와 고운 먼지와 자갈이 합쳐진 것이라고 답하고,

또 그게 뭐냐고 물으니 그것보다 더 잘게 쪼개진 무엇이라고 답하고,

또 그게 뭐냐고 물으니 그것보다 더 잘게 쪼개진 무엇이라 답한다.

이런 문답은 순환오류로서 동어반복이다.

한마디로 말만 바꾸어서 답한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말장난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혹자는 주먹을 들기도 하고, ‘악’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눈을 껌벅껌벅 거리기도 하고, 막대기로 바닥을 치기도 하고,

아니면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답하는 것을 禪問答(선문답)이라 한다.

얼핏 보면 동어반복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답인 것 같다.

그런무슨 동작을 하거나 아니면 침묵하는 것은 답을 하려는

사람의 마음에 한 가지 '의도'가 일어난 것이다.

존재를 물었는데 의도(혹은 동기, 의식, 마음)로 답한 것이다.

의도는 ‘정신적 존재’이다. 결국 존재를 물었는데 존재로 답한 것이 된다.

선문답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라

동어반복이며 순환오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존재를 무엇으로 파악하는가?

한마디로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有(bhava)이다.

有는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진 생명이 존재에 집착하여 존재를 계속

이어가려는(혹은 존재를 멸절하려는) 본능적 충동을 말한다.

존재는 고정된 것, 정형화된 것, 영속하는 것이 아닌 조건에 따라

매 순간 변해가는 과정이다.

존재란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흐름으로 ‘내 것’으로 잡아둘 수 없다.

그것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로 움켜쥐면 불안과 상실, 환멸과 공포가 따른다.

모든 존재는 변화하고 불완전하고 불안하며 무지하다.

이것이 존재자들의 보편적 고통이다.

불교는 존재를 미화하거나 실체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가 계속되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존재자들은 존재의 소멸(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존재자들은 존재의 변화에 항상 불안해하고, 존재의 사멸을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에 저항하는 존재자는 자기 존재의 확실한 근거와 영속성을 추구한다.

존재자는 존재의 이유를 찾으며 존재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神, 하느님, 창조주(브라흐만, 여호와, 알라, 무극, 태극,

본성, 일심, 일물, 본성, 진여, 超越智초월지, 한 물건, 일원상, 무엇이라 하든지 간에)

라는 이름, 개념이다.

서양철학의 근본 동기는 존재론적 확실성(ontological certainty)의 추구이다.

동양철학의 근본 동기는 존재보다는 존재의 해체(deconstruction of being)와

과정(process)으로 동화이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일견 포스트모던(post-modern)적인 듯이 보인다.

동서양철학을 막론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얼마나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역사적 경험에서 확인된 확실성을 가지고 말이다.

존재자가 자기 존재를 해체하고 과정으로 합류한 다음

어떻게 해야 새로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보편적, 항구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상에서 보듯이 총 결론은 존재의 확실한 근거를

묻고 답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돌이켜 내려놓고, 나에 대한 我執에서 벗어나라.

모든 존재에게 항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이익이 되는 존재 과정이 되어라.

존재자에 갇힌 좁은 경계에서 빠져나와 대승(大乘, Mahayana)의 흐름에 들라.

- 원담 스님







그릇에 따라 고이는 비의 양은 다르다


그릇에 따라 고이는 비의 양은 다르니
《삼국유사》 첫머리에 환웅이 인간세계로 하강할 때
풍백(風伯) 운사(雲師)와 함께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왔다고 한다.

비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그 때 따라온 우사(雨師)가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홍수의 피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신라 진평왕 11년(589)에는
“나라서쪽에 큰 물이 나서 떠내려가고 파묻힌 인가가
3만369호이며 죽은 사람이 200여명이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1375년 삼각산 국망봉이 큰 비로 무너졌다.”는 등
많은 풍수해의 사실을 열거해 놓았다.

요즈음도 우사(雨師)가 직무를 태만히 했는지
낙동강변에 물이넘쳐 온 영남땅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기상학자들은 대기의 오염으로 인한
갈색구름층의 형성으로 인한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자연순환론자들은
휴가랍시고 온 산천을 쓰레기로 더럽혀 놓으니
자연이 자기몸을 씻어내기 위하여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모든 댐이 쓰레기로 뒤덮히고
그 쓰레기 물이 수돗물로 되어 내 입으로 돌아오니
인과응보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천재지변과 함께
꼭 뒤따라 나오는 것이 인재론(人災論)이다.
제방 둑을 쌓은지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무너져내려 피해가 컸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동네가 물에 오래 잠긴 이유 중의 하나가
배수펌프장의 평소 점검부족으로 정작 사용해야 할 때에
제대로 작동을 하지못했다는 것도 홍수가 날 때마다
약방감초격으로 등장한다.

절개지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준공검사가 난 집에 산사태가 났다고
신문지상의 한 자락을 늘 장식해 오고 있다.
비야 똑 같이 내리지만 땅 위에서는
그것에 대한 준비가 얼마나 철저한가에 의해
피해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결국 피해의 많고 적음은 땅위 사람의 몫인 셈이다.
같은 양의 비라고 할지라도 놓여진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담기는 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해방지를 위한 노력과 시설투자가 얼마나 따라주느냐에 의해
인재(人災)는 줄어들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땅위에서
우사(雨師)의 역할을
해야하는 정치행정책임자들은 필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붕을 잘 덮지 않아 비가 새면
대들보와 기둥이 썪는 것 처럼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의 이엉을 잘 덮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마음 역시 새는 빗물에 썪기 마련이다.
하늘에 사는 우사(雨師)야 어떻게 할 수도 없지만
땅 위에 사는 우사(雨師)가
우사(雨師)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런 광고 패러디를 들어도 싸다.

“무책임한 당신,,, 떠나라!!”


- 원철 스님법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