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4. 21:0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증도가
영원한 자유를 위한 깨달음의 노래,
선(禪)으로 읽는 증도가! / 김태완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의 《禪으로 읽는 증도가》(상권)가 도서출판 침묵의 향기에서 출간되었다.
《禪으로 읽는 마하무드라의 노래》에 이은 ‘김태완 선원장 설법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이다.
중국 당나라 때 선승인 영가현각 선사는 여덟 살에 출가하여 경전을 두루 공부했고,
천태지관 법문에 정통하였으며, 유마경을 보다가 마음의 근본을 깨달았다.
육조혜능의 제자 현책의 권유로 혜능 대사를 찾아가 문답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날 혜능 대사의 권고로 하룻밤 묵었는데, 이 때문에 일숙각(一宿覺)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증도가(證道歌)’를 지었으며, 267구로 이루어진 증도가는 깨달음의 진수를
잘 밝혀 놓았으므로 예로부터 선종의 고전으로서 널리 애송되었다.
《禪으로 읽는 증도가》는 당장 눈앞의 법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주는 법문들뿐 아니라,
한 번 해탈의 체험을 한 사람이 그 뒤에 공부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도 많이 담겨 있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듣기 어려운 깊이 있는 가르침들도 접할 수 있어,
초심자뿐 아니라 공부가 어느 정도 진전된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설법 책이다.
깨달음의 노래,
언제든지 이것 하나뿐이다
흔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불만족스러움과 번뇌의 감옥에서 온전히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모든 부처와 조사,
선사들이 발견한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증도가〉의 앞머리에서 영가현각 스님은 말한다.
“법신을 깨달으면 한 물건도 없고
본래 타고난 자기의 본성이 바로 진실한 부처이다.”
구도인들이 찾고자 하는 그 무엇, 이름하여 ‘부처’라 하고 ‘도(道)’라고 하는 진리는
사실 우리의 ‘본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바로 본래 부처이며,
늘 변함없는 진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며 자기 본성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며,
얻거나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다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구도인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자기는 아직 부처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남악회양 선사가 좌선하고 있던 마조 스님 옆에
앉아 벽돌을 갈면서 바로잡아 주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관점과 유위적인 접근법이었다.)
선(禪)의 요체가 ‘직지인심 견성성불’인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의 본성 즉 ‘마음’이 본래 부처이므로 그것을 곧장 가리켜 깨닫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세간에서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 의식이다.) 그러므로 선사(禪師)들이 하는 일이란
늘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마음을 계속 가리켜 주는 것이었다.
임제 스님의 할도, 덕산 스님의 방도, 수많은 선문답과 설법들도 실은 모두가
‘이것’ 하나를 가리켜서 깨닫게 하려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조사선을 되살려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의 설법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손가락을 세우며) 이건 뭐냐? 아무 말할 게 없어요. 이건 아무런 정해진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손가락을 세우며) 여기서 말하고, 모든 것이
(손가락을 세우며) 여기서 나오고, 모든 것이 (손가락을 세우며) 여기서 나타나지만,
이것 자체는 ‘뭐다’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온 천지가 이것이어서 어디를 보든지
이것 하나가 확인되지만, 이것 자체는 노란색도 아니고 빨간색도 아니에요.
차가운 것도 아니고 따뜻한 것도 아니고, 향기로운 냄새도 아니고 악취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그런 게 없어요.
그러니까 (손을 흔들어 올리며) 이것 하나가 분명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없어요.”
선(禪)에서는 수행을 말하지 않으며, 기록에 따르면 2조 혜가부터 공통적으로
설법을 듣다가 말끝에 깨달았다. 그것이 원래 선의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모든 유위적인 수행을 멀리하고, 선지식의 말을 잘 듣다가 문득 알아차리는 것이다.
설령 한번 해탈의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믿고 생각에 끌려 다니던 습성이 워낙 뿌리 깊기 때문에 꾸준히 설법을 들으며
안목을 확고히 해야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공부에서 가장 첫 번째 관문은 이것을 한 번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 관문은 생각을 조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있다 해도 자꾸
딴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겁니다.
결국 생각조차도 여법하게 돌아가도록 해서 법을 보는 안목이 확실하게 자리 잡혀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여법하게 할 수 있고
무슨 말을 듣더라도 그걸 날카롭게 볼 수 있게 여법해져야 합니다.”
P.42 : 그래서 이것을 턱 체험하면 바로 이게 자기 본성이고 자기 본래면목이고
자기 스스로이고,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이죠. 이것을 체험하고 보면
“아! 내가 잃어버렸던 나를 찾았구나” 하고, 이 이상 더 찾을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저절로 그렇게 확신이 돼 버려요.
“아, 이거구나. 더 이상 찾을 게 없구나. 여기서 더 뭔가를 찾게 되면 망상이 되는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어요.
P.115 : 그러니까 색이 그대로 ?坪訣? 따로 공은 없다 이겁니다.
사물사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그대로 없는 것이지, 따로 없어요. 하나의 일이라.
하나의 일이에요. 우리는 자꾸 아무 일 없는 자리, 텅 비고 깨끗한 자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체험한 사람들조차도 그런 경우들이 대다수입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했을 때,
그때의 느낌은 깨끗하고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딱 머물려고 해요. 자꾸 머물려고 하고, 자꾸 그것을 붙들려고 하고,
자꾸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하려고 하는 거라. 그런데 그게 허깨비입니다.
희한하지만 그게 허깨비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뭔가가 있다’라는 것에 집착했는데,
반대로 넘어오면서 ‘없다’라는 것에 다시 집착하고 있는 현상인데, 허깨비입니다.
P.200-201 : ‘이것이 법이로구나’ 하고 항상 붙잡고 있어서, 놓치지 않고 의식하고
있어서 여법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깨어 있을 때 항상 법을 의식하고 있고,
법을 놓치지 않고 있고, 꿈속에서도 항상 법을 의식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의식이라는 경계를 붙잡고서 법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의식을 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게 경계가 아니라 그냥 이 한 개 일이라. 그래서 불이법이라 하는 겁니다.
이게 법계의 실상인 것이고,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경계가 바로 이 법이에요.
어떤 경계가 일어나더라도 그냥 이 법이에요. 이 일 하나일 뿐이라. 이 일 하나뿐.
그래서 따로 ‘이게 법이다’ 하고 의식하고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요.
삶이 지치고 힘들때 힘이 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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