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9. 20:3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부처는 CCTV' 저자 원덕스님이 전하는 참선법
※ 아래 사진 '참선. 화두. 간화선의 길잡이 - 부처는 CCTV' 를 누르시면 NAVER 책 정보 화면으로 자동 연결이 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간혹 "돈이 전부인가?" "살아가는 의미가 뭐지?""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는 뭐지?" "진리의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자유인의 의미는?" "나 아닌 참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 의문이 드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사람살이가 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참선. 명상. 위빠사나 등등 각종 수련들을 하면서 마음의 위로와 안정, 정화를 얻고 있지만 그 수행 시기가 지나면 마음은 시시각각 요동을 치기 때문에 또다시 고요함을 쫓아가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수행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을 위해 원덕스님께서 직접 몸소 체험하고 느낀 것을 혼자 간직하기 보다는 많은 분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던 중 인연이 닿아 이번에 '부처는CCTV' 를 출판하게 되었고 이번 포스팅에서는 책 내용 중 일부인 수행의 과정을 자세하게 밝힌 참선법을 소개합니다
<아래부터는 '부처는CCTV' 책 내용을 옮겨서 소개합니다>
참선하면 보통 좌선을 생각하는데 참선을 크게 나누면 좌선坐禪 와선臥禪 행선行禪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참선이란 행 주 좌 와 어 묵 동 정 (行 住 坐 臥 語 默 動 靜) 일체처一切處에 화두가 성성惺惺해야된다.
처음에는 좌선으로 시작해서 누워서 하는 와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거나 돌아다니면서 하는 행선이 있다.
본인이 앉고 싶다고 해서 좌선하고 피곤하다고 와선하고 돌아다니고 싶다 고 해서 행선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무한대로 펼쳐져 있고 무수한 행성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기도 하고 또는 한 곳에 모여 있기도 하지만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듯이 참선 역시 이치에 부합符合되는 정확한 순서가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면서 도道에 순서가 어디 있고 경계가 어디가 있냐고 말하지만 부처님같이 우주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서 무상정등각을 이룬 성인이라면 몰라도 처음 시작하는 참선 공부인에게는 반드시 올바른 길이 있으니 바른길을 조금만 이탈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이다.
그래서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기를
毫釐有差(호리유차)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天地懸隔(천지현격)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특히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된다.
선박船泊에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판이 있는데 나침판의 눈금을 한 눈금만 비켜나가 잘못 설정해도 그 배는 엉뚱한 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앞으로 계속 전진 항해하면서 각도는 점점 크게 벌어지는 것과 같이 참선도 뚜렷한 방법 없이 대충 적당히 한다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처음 좌선할 때는 우선 처소를 잘 선택해야 된다.
외부와의 단절된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정진하면 좋다.
진발심眞發心이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하여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신념으로 정신이 무장됐다면 깊은 산중의 토굴이 좋다.
정진을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인이 스스로 체험하게 되는데 최소한도 하루에 12시간 이상 몇 개월 동안을 좌복에 앉아서 간절하게 화두 의심을 하게 되면 신체와 정신에 변화가 오게 된다.
참선하려면 천 번 만 번 변화하는 경계를 겪게 되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이니 대수롭게 생각지 말고 오로지 화두의심에만 심혈을 기울여야 된다.
특히 두뇌에 어떠한 강력한 힘이 들러붙기도 하고 머리에 벌레가 기어다는 듯 간지럽기도 하고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다.
어떤 때는 머리가 불같이 뜨겁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차디찬 알코올을 부은 것처럼 차갑기도 하다.
더욱이 귀에서 소리 나는 이명耳鳴등 수많은 변화가 있지만 개의치 말고 꾸준히 정진하여 온몸과 정신이 하나의 화두의심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화두의 생명은 의심이고 망상과 잡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젖 먹던 힘까지 온 힘을 다 쏟아서 처절하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야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득 화두가 밀려나가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화두에 발동發動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두에 발동이 걸리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높은 산 정상에서 둥근 바위를 굴리게 되면 처음에는 서서히 구르다가 점점 가속도가 붙으면 엄청난 속도로 산 밑을 향해서 무섭게 날으듯 굴러가는 것처럼 화두가 밀려 나간다.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정진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일도一到된 정신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때는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해도 바로 앞에 물이 놓여있지만 그 순간이 아깝고 화두가 깨질 것 같아서 물을 못 먹을 정도가 되니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득력得力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가 밀려나가는 것이 마치 겨울철 호숫가에 얼음이 얼었는데 매끄러운 얼음 위에다가 납작한 조그마한 돌을 힘차게 수평으로 던지게 되면 쏜살같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지듯이 나가는데 화두가 밀려나가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화두가 발동이 걸리려면 좌선을 하되 산문밖에 나가지 말고 도량 내에서도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말고 꾸준히 그리고 성성하게 도거와 혼침을 극복하면서 계속 정진해야 된다.
<원덕스님이 전하는 도거와 혼침 극복 방법>
▶ 도거悼擧 와 혼침昏沈 다스리는 법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참선을 하던 염불을 하던 가장 힘든 부분이 도거悼擧 와 혼침昏沈입니다.
도거라는 것은 정신이 바깥 경계에 끄달리거나,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번뇌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동가숙東家宿 서가식西家食하는 것을 말하며,
혼침이라는것은 정신이 밑으로 가라앉아 어둡고 탁하며 혼미해져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거가 많을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되(참선할 경우는 화두를 듦)적당히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서
적적寂寂한 상태로 이완弛緩 시키면서,
그러나 서서히,
맑고 생생히 깨어있는 상태 즉 성성惺惺한 정신으로 유도誘導해야되는것입니다.
혼침이 왔을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어 느슨하고 혼미한 정신을 맑게 하되,
그러나 서서히,
의식은 깨어있으나 생각이 멸滅한 상태 즉 적적寂寂한 정신으로 유도誘導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아무 생각과 감각이 없다하여 삼매에 들었다고 착각하는 무기無記를 조심해야 되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이 정신을 잘 조율調律하여,
긴緊(성성惺惺)과 완緩(적적寂寂)을 적당히 혼용混用하여 망상 잡념도 없으면서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득중得中을 취取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과학이 발달해서 자동차를 시동 걸려면 운전석에서 키를 돌리거나 스마트키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시동이 걸리는 시대가 됐다.
산승이 어렸을 적에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는 자동차가 귀했는데 자동차가 구식舊式이어서 그때 당시에는 시동을 걸려면 자동차 밖으로 나갔다.
트럭 앞 범퍼에 구멍이 있는데 구멍에다가 기다란 “ㄹ"字로된 쇠 막기를 넣고 한참 힘차게 돌리면 시동이 걸렸다.
어떤 때는 힘이 달려서 중간에 쇠막기를 돌리는 것을 중단하게 되면 시동이 걸리려다가도 ”푸시시“하고 시동이 걸리지 않고 꺼져버렸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계속 힘차게 돌리면 ”부르릉“하고 시동이 걸렸다.
추운 겨울날 어쩌다 자동차 공업사 앞을 지나다 보면 트럭 밑에다가 장작불이나 타이어 고무를 태우며 밤새 얼어붙은 엔진을 녹이고 있는 젊은 장정들을 가끔씩 보아왔다.
얼어붙은 엔진이 좀 녹으면 트럭 앞의 구멍에다가 쇠막대기를 넣고 시동을 걸기 위해서 추운 겨울 아침에 애쓰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좌선도 이와 똑같다.
득력하려면 화두에 발동이 걸려야 되는데 좌선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거나 또는 계속 정진을 하더라도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적당히 하면 화두에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참선을 오래 했다 하여도 지속적으로 안 했거나, 한철 정진하고 한철 돌아다니면 득력할 수 없다
요즘 선방의 풍토가 그렇다.
결제 한철 정진하고 해제 가 임박해오면, 미리 승복을 풀해서 다려놓고 해제 날이 되면 다들 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
십진구퇴十進九退이다.
열 걸음 나갔다가 아홉 걸음 퇴보하는 것이다.
한철 동안 정진 잘해놓고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다 까먹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참선 좀 했다는 사람도 득력 얘기를 하면 잘 알아듣지도 못한다.
처음 공부할 때부터 제대로 안 했고 본인이 경험을 안 해봤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오히려 나를 탓한다.
“손가락 다섯 개 가진 사람이, 손가락 여섯 개 가진 사람들의 마을에 가면 오히려 병신 소리 듣는” 격이다.
화두가 발동이 걸린 상태에서 좌선을 하다 보면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스스로 지어나가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정진을 계속해야 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하다 보면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 없어진다.
이때에는 구태여 의심을 내지 말고 잡념과 망상, 더 나아가서는 잠재의식까지 못 들어오도록 빈 정신 즉 잡념 없는 정신을 계속 쳐다봐야 된다. (관觀해야 된다)
물론 공부가 되지 않은 사람이 도중에 화두 의심을 하지 않으면 공부 망한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 화두가 밀려나가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더라도 화두 의심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도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이 나지 않는다.
의심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의정疑情이 생겼기 때문이니 본인은 아무리 애를 쓰고 의심을 해도 생각으로만 의심을 할 뿐 그것은 껍데기만 의심이지 간절한 의심이 나지 않는다.
이 공부 경계에서는 화두 의심이 나지 않는 게 정상이고 한 단계 진취된 공부이다.
못 믿겠으면 자신이 직접 해보면 안다.
정진하다 잠시 공양을 한다든가, 해우소에 간다던가. 수각에 가서 씻는다던가. 좀 움직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정진하면서 의심을 하면 금방(잠깐)은 화두 의심이 난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화두의 심은 사라지게 되나니, 이러한 경계를 두고 어떤 사람은 화두 의심이 없어졌다고 하여 견성했느니, 화두가 타파됐느니 하는데,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제부터 공부 시작이란 점을 알아야 된다.
또 중요한 것은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참선하는 사람이 이 경계에서 염불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자칭 염불선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다운 조사선이 될 수가 없다.
원효대사가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한 것은 그 시대의 생활 여건상 좌선을 할 수 없는 수많은 민중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한 것임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렇게 잡념 망상 잠재의식이 없는 상태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화두는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들려지게 된다.
그런 중에도 어느 틈엔가 잡념이 들어오나니 이때에는 얼른 정신을 차리어 빈(잡념 없는)정신을 쳐다봐야 된다.
잡념이 못 들어오도록 잡념이 들어올 때마다, 계속 쐐기를 쳐야 되는데 <수시로 정신 차리는 것> 이것이 이 공부 경계의 화두인 것이다.
어쩌다 화두가 잘 들리지 않거나 혼침에 빠지게 되면 얼른 정신을 차리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어째서?!” 하면서 설舌(혀) 신경을 자극하면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나게 되어 잡념이 없어지게 된다.
이 경계에서는 척추를 세우고 똑바로 앉아서 정진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무겁고 도도하여 그동안 잘 나가던 화두의 힘이 멈칫거리면서 브레이크 걸리듯이 머리에 들러붙으며 작용하게 된다.
이때에는 당황하지 말고 척추의 힘을 빼고 머리의 화두의 힘이 순일 하게 밀려가도록 공을 들여야 된다.
이러한 힘을 진리의 기틀이라고 해서 이기理機라고 하는데 고봉선사는 두뇌의 기틀을 보고 이마위에 새가 앉아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화두를 들고 좌선을 하게 되면 흐트러진 정신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정신이 일도一到가 되는데 정신이 일도가 되면 몸도 역시 상응相應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좌선은 머리로 의심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머리에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물론 좌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머리에 힘이 붙을 수 가 없다.
머리에 힘이 붙거나 이상한 기운이 생기는 것은 몸과 마음이 서로 둘이 아닌 고로 당연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며 이것을 상기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상기병이 아니다.
이 힘을 잘 다스리면 약이 되고 잘못 다스리면 독이 되어 고생할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에 올라온 이 힘을 없애기 위해서 정진하다말고 화두를 놓아버리고 돌아다니거나 기운을 밑으로 내리기 위해서 단전에 의지해서 좌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위에 있던 기운이 없어지거나 밑으로 내려오는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되면 공든 탑이 무너진 것이며 다 된밥에 재 뿌리는 격 이 된다.
공부가 중도에서 끝나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아무리 맑은 정신으로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지 않는다.
두뇌가 도도하고 불쾌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정진에 진척이 없음을 좌선을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알수가 있을 것이다.
(긴 내용이라 이후 생략했습니다)
※불교신문에 2017년 6월 26일 소개된 "도솔암 15년 정진...내 인생의 황금기"
기사 내용은 아래 책 사진을 누르시면 자동으로 연결이 됩니다
<'부처는 CCTV' 비움과 소통 출판사 서평 중에서>
‘화두의 기운’을 배제하며 정진하게 되면 참선공부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되고 공부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종국에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선을 지속적 했을 때는 반드시 ‘화두의 기운’을 생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상기병이라고 속단速斷하고 좌선을 중단하거나 정진을 하다 말다 하는 폐단이 속출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화두의 기운’에 대한 마땅한 방법을 제시한 지침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참선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했을 때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지만 참선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행인들에게는 ‘화두의 기운’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정진하면서 ‘화두의 기운’에 의해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려고 애를 썼다. 더욱이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참선인들에게는 거의 생소하기 때문에 책의 각 항목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하였다.
이 책의 제2부 ‘하산집’에 수록된 참선에 관한 내용들은 저자가 태백산 도솔암에서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진한 경우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진하는 사람 따라,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구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구도역정 메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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