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이 아닌 현실 속의 불교|…… 혜천스님설교

2017. 9. 17. 11:2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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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目無所見無分別

耳無所聽絶是非

世上萬事都不看

但看心佛自歸依

 

눈으로 보는바 없으니 분별할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바 없으니 시비가 끊어진다.

세상만사 간섭하려 말고

단지 마음으로 부처를 보았으니

내 스스로 귀의하노라.

 

- 浮雪居士


2

病在肉團心  모든 병은 마음에 있으니,
何勞多集字  어찌 힘들게 글자만 모을 것이냐? 

五言絶句詩  오언절구 한 수이면.
可寫平生志   평생의 마음을 담을 수 있네.

- 詠懷 / 西山大師



  * 참마음은 보아도 본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바가 없어

시비 분별이 끊어진 자리다.

세상사에 끄달려 고뇌하지 말고

그 자리를 돌이켜 自歸依 하라 

 

 

피안이 아닌 현실 속의 불교

 

불기2553년 12월 20일

 

 

우리는 흔히 명상이나 수행을 할 때 고요한 산속을 찾습니다. 그러나 좋은 명상터가 산수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본의 카이센 국사(快川國師)는 유언으로 『安禪不必須山水、滅却心頭火自涼』라는 한시를 남기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것을 해석하면 " 마음을 적멸한다면 불이라 할지라도 시원하다" 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간단치 않은 일본의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1582년 카쯔요리를 격파하고 타케다가문을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혜림사라는 절에 숨어서 보호받고 있던 타케다 가문쪽의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快川國師(카이센 국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카이센 국사가 노부나가의 명령을 거부하자 화가 난 노부나가는  이곳 삼문에 카이센국사를 비롯해서 100여명의 대중들을 몰아넣고는 불태워 죽입니다. 카이센국사는 유언으로 『安禪不必須山水、滅却心頭火自涼』라는 한시를 남기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타케다신겐(武田信玄)의 아들 다케다 카쯔요리는1852년 투쿠카와 이에야스와 오다노부나가의 연합군에 패해 멸문하게 되는데, 카츠요리는 아버지 신겐에 의해 불신을 받자 그의 능력을 보증받기 위해 5년에 걸쳐 수 많은 전투를 벌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해 멸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케다 가문의 원찰인 에린지(惠林寺 혜림사)다케다 가문의 부하인 사사키 등이 피신하였습니다. 이를 알고 오다 노부나가는 그들을 넘길 것을 카이센 국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 여기에 다케다 신겐의 구신들은 없다. 다만 전란에 심신이 피곤한 사람들일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게 격노한 노부나가가 나오면 살려 준다고 했지만, 카이센 선사는 거부하자, 그들이 절에 불을 지르고 그는 불에 타 죽습니다.  그 때 남긴 유명한 시가  『安禪不必須山水、滅却心頭火自涼』입니다. 이 싯구는 원래 만당 시인 두순학의 <하일오공상인원제>라는 시의 3,4구인데, 카에센 선사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카이센은 다케다 가문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는 원래 미노(美濃: 기후현 )사람으로, 그 지방출신이 아닙니다. 그는 천황이 존경해서대통지승(大通智勝)이란 호를 내릴 정도로 유명한 선사인데, 다케다 신겐이 그 명성을 듣고 혜림사로 초빙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케다 가문의  멸문을 원한 오다 노부나가는 그들의 제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가이센이 거부하고 위의 양구를 독송하고 대중과 함께 화정(火定)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만  오다노부나가 역시 같은해인 1582년 전선에 있는 부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기위해 가는도중 本能寺(혼노지)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부하 아케치 마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쓰히데는 그를 죽이면서 "주군이라도 불적(佛敵)은  용서할 수 없다.

 

이 얘길 왜 하는냐? 불교가 현실에 관한 것인가 미래에 관한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피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반야바라밀다'를 과거에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뜻은 말 그대로 '피안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안은 무엇이냐? 피안이란 '저 쪽 강언덕'을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이쪽 강언덕이겠지요.그래서 도피안은 이쪽 강언덕에서 저쪽 강언덕으로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배운 '뗏목의 비유'(벌유  筏喩 )'에서 처럼, 뗏목이 필요한 이유는 강을 건너기 우해서입니다. 2주전에 가보았던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아미타불은 서방 세계의 부처님입니다. 이 마타 신앙이라는 것이 중국, 한국, 일본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서양식의 유토피아, 동양식의 무릉도원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 민중들이 살아서는 이루지 못하는 것을 죽어서라도 그 곳에 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동양 3국의 미타신앙은 사실 극락세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천국이나 극락이 원래 종착점이 아닌데, 중국에서 잘 못 이해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열반을 얻기까지는 종착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열반을 얻어야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라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윤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여행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는가 하면 행복도 만나고, 낮선 사람을 만나는가 하면 친숙한 사람도 만납니다. 그러나 시간 여행은 내가 좋아서, 즉 자유의지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관계 없는 여행입니다. 거리의 노숙자 Homeless가 어쩔 수 없이 되었듯이, 시간영행은 짜여진 게획표에 따라 움직입니다. 즉 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 교토에 가면  청수사(淸水寺(기요즈미테라))라고 하는 대표적인 사원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 곳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한참을 구경하다 희한한 발견을 하였습니다. 그 곳을 관람하는 관광객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우리들 뿐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곳곳에 ->표가 있고, 사람들은 화살표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화살표를 거슬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곳의 정원 또한 잘가꾸어져 있어 볼만했습니다. 그들은 솔잎도 뽑아 정리할 만큼 정원을 정성들여 꾸밉니다. 우리는 자연미를 강조한다지만, 일본은 정원을 인공미의 극치입니다. 내가 청평사의 고려 정원을 찾아보기도 하고, 고산 윤선도의 유적도 둘러본 적이 있지만, 나보고 문외한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곳에서 유감스럽게도 美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체 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정원이라는 것이 원래 인공적인 것인데, 그 곳에서 자연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절의 경관, 즉 절의 정원에 매료되었는데, 나중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근 춘천 박물관을 가봐도 우리는 화살표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그러나 일본인 관광객들은 어딜 가봐도 병아리가 모여들듯 깃발 아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각자의 깃발이 있어서, 그런 움직임을 볼 수 없습니다.

 

시간여행이란 기요즈미테라에서 목격한 것과 같습니다. 화살표(->)는 자여가 아니라 타의입니다. 즉 짜여진 규칙입니다. 일본 사람은 여기에 충실한 것입니다. 농담입니다만, 이럴 경우 화살표를 원으로 그려 놓으면, 이들은 영원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고 돌뿐 나가는 길이 없으니깐요. 윤회는 시간여행으로, 거기에는 누가 어디로 돌라고 하지 않지만, 그저 따라 돕니다. 이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천구이나 그락에 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열반을 얻어야 끝납니다. 불교에서 천구, 극락, 열반, 도피안을 말하지만, 이것 모두는 뗏목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타신앙은 현실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현실도피의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즉 죽음 이후의 행복을 약속합니다.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마 불교는 죽음 이후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천국, 아닌 그 어딜 가더라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 불교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가이센 선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를 마시면 그저 차를 마시는 것이지만, 일본에는 다도(茶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書藝이지반 저들은 書道, 우리는 武術이지만 저들은 武道라고 합니다.  일본 다도의 창립자이며, 확립자인 센노 리큐(千利休,1522∼91)는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의 다도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센노 리큐가 풍신수길이 조선 출병을 결정하자 격렬하게 반대하여, 그의 진노를 삽니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그 전쟁이 민중을 도탄에 빠뜨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전국시대 300년은 전란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풍신수길에 이르러 전란이 끝나고 평온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싸워서 이겼지만, 그들에게 나눠 줄 선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무장들을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다도인 것입니다. 즉 다도는 무장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도다(차)완(井戶茶碗)'은 영주의 찻사발로 일본의 국보입니다. 이것의 값어치는 영주들이 이것을 사들이는데 10만석의 들일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도다완을 요새 재현하려 애쓰는데, 이것은 우리의 '막사발'입니다. 이게 일본이니 이런 대접을 받지, 우리는 말그대로 대접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봅시다.  아이를 달래려면 처음에는 사탕 하나면 됩니다. 그라나 그 다음에는 두개가 필요한 법입니다. 즉 무장들이 차를 마셔도 그 때는 좋을지 몰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쌀이 떨어지고, 장작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풍신수길이 중국을 쳐서 나눠 갖자는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덤이었지요. 그러나 센노 리큐가 반대한 것은 중국을 이길 수 없고, 결국 민중이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의 충고처럼 임진왜란은 결국 명나랑와 화의를 하게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철수합니다. 그러나 곧 화의가 깨지고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정유재란입니다. 이 때도 센노리큐는 역시 반대합니다.  이 때는 이미 히데요시가 많은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한 때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일찍이 하급무사 시절에 결혼한 정처에게 자식을 얻지 못하고 늙어가자, 첩을 받아들이며 자식 생산에 주력하다가 결국 실패한다. 그래서 조카들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조정의 관직을 주는 등 후계구도를 맞이하다가 늦게 맞이한 첩, 요도 부인에게 아들을 얻게되자, 첫째 양자는 반역죄를 붙여 일가를 몰살시켜 버리고, 둘째 양자는 조선으로 보내 거제도에서 전사게 되고, 셋째 양자는 의문사한다. 와중에 늦게 얻은 친아들이 죽고, 요도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만 다 커기도 전에 어린 아들을 걱정하며 도쿠카와에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끝낸다. 결국 정권은 도쿠카와로 넘어가게 되고, 그의 남겨진 아들은 반역죄로 죽게되어 멸문에 처하게 된다. 조선의 재침은 군사전략상 실수입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전쟁을 반대하는 센노 리큐에게 할복할 것을 명합니다. 그는 할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 내가 이 칼을 잡고 있는 순간 부처도, 조사도 없다"

 

가이센이나 센노리큐는 결코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사실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했지만, 만개한 것은 일본입니다. 위에 예를 든 일본 스님들은 결코 현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부처가 저쪽 강이라고 말한 것은 갠지즈강을 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한 말입니다. 이 쪽을 떠나 저 쪽을 가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교의 메시지는 차안 없는 피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불됴는 카이센이나 센노리큐 같은 정신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이라는 것이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전통은 오직 피안만을 말합니다. 그 전통에는 차안이란 없습니다. 예들 들면 이슬람교나 기독교의 경우, 순교에는 엄청난 보상이 따릅니다. 죽음 이후의 보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종교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보상을 얻기 위해 심지어 자살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들 종교 고위 성직자들 누구도 순교하지 않습니다. 아! 이건 제 주장이 아닙니다. 영국의 어느 주교의 말입니다. 우리가 현실로부터 힘들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피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강 얘기는 비유법입니다. 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저번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나는 신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 죽어간 수없는 병사와 그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부석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성격의 절입니다. 국가가 권력의 소모품으로 병사들을 쓰고 그것을 보상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위 성직자 중에 순교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면, 불교의 진면목을 알 수 없습니다. 불교의 진면목은 바로 이 순간 현실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중국 북송 임제종의 중흥조 오조 법연선사에 관한 일화입니다. 우리의 조계종 또한 임제종의 법풍을 이었으므로 임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오조 법연 五祖法演선사 아레에는 뛰어난 제자 3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오 극근圓悟克勤, 불안 청원 淸遠佛眼, 불감 혜원惠勤 佛鑒  어느 날 밤, 법연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네들 지금 그대들의 경계에 대해 한 마디씩 말하라"  이에 대해 불안 청원은 "봉황이 춤을 춥니다", 불감 혜원은 "쇠로 된 뱀이 누워 있습니다", 원오 극근은 "다리 밑이야 잘 살피시죠"라고 답했다. 원오 극근의 말은 다리밑을 보라는 것은 발아래를 살피라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순간 해야 할일은 다리 밑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오조 법연이 답하기를 " 내 법통을 이을 자는 극근이다"라고 했다. “발아래를 보라(照顧脚下 조고각하)”는 카이센이 말한 安禪不必須山水、滅却心頭火自涼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불교는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건너야 할 강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싸울 때 이런 말을 한다. 싸우다 불리하면 "다음에 보자"라고, 그러면 상대가 답한다. " 다음에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결판 내지 못하는 사람이 다음에 무슨 수로 결판을 낼 수 있겠습니까? 무협지를 보면 이런 장면 꼭 나옵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 절벽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생명을 구합니다. 게다가 그 나묵의 뿌리를 살펴보니 꼭 동굴이 ㅇ나옵니다. 거기에는 노인도 등장하고, 무극비수가  주인공에게 전수됩니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더욱 강해져서 절벽을 뛰어 올라 원수를 갚습니다. 요즘 유행어로 하면 무협지에서 주인공은 루저loser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무협지에서난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메트릭스의 화려한 변신들 또한 가상공간의 얘깁니다. 이처럼 강이라고 하는 것도 가상공간입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겠다고 집착하는 것 역시 가상 공간입니다.

 

항상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 네가 피한다고 피할 곳은 없다. 네가 피할려고 하는 그 곳에 깊숙히 들어갈 때 그로부터 자유로와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피하려고 하면 절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현실 속에 깊숙히 들어가야 합니다. 항상 照顧脚下 조고각하, 즉 발 밑을 살피십시요.

 

운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항상 가정에 정과 사랑이 넘치고, 복된 삶을 누리십시요.

내려가 차나 한 잔 하시지요.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커피 한잔과 혼자 듣는 클래식 12곡 모음

01.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1번 04:27

02.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4번 02:39

03.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작품2 6번 05:10

04.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2악장 06:24

05.비발디 / 바이올린협주곡 '라 스트라바간차' Op.4 No.10 1악장 03:06

06.쇼팽 / 야상곡(Noctum in E Flat. Op.9 No.2) 05:20

07.차이코프스키 / 야상곡 Op.19 No.4 01:17

08.모차르트 / 피아노협주곡 제21번 2악장, 안단테 06:43


09.Rossini /"별빛비치는 그대 창가"의 G선상의 변주곡 - Martin Merker(Cello) 07:09

10.하이든/교향곡 제6번 D장조 H 1 No.6 '아침'(Le Matin) 3악장(Menuetto & Trio) 04:32

11.토셀리 / 세레나데<바이올린> 연주 03:40

12.멘델스존 / '노래의 날개위에'(Auf Fluegeln des Gesanges,Op.34-2) 관현악연주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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