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嵇瀳)스님의 법구경 강의(1: 1-5)

2018. 1. 1. 10: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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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법구경 강의(1: 1-5) 

불기2554년 6월 2일

 

 

법구경은 부처님 말씀 중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

간단한 싯구로 이루어짐. 부처님이 설한 말씀 중 싯구만 뽑아 편집.

중국의 法求스님이 번역 편집한 것에서 유래해서 법구경이라 불림.

법구경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에 그 명칭 그대로 사용 

우리가 교재로 삼는 것은 법정 스님의 번역본< 진리의 말씀>은 일본의 <남전대장경> 본을 재번역 한 것으로 보인다.

 

1.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 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많이 알려진 구절. 많이 인용되는 구절.

'마음이 근본이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중요시. 북방불교 특히 중국의 선종은 마음을 강조.

"마음이 주인이다" "마음 밖에 모든 존재가 없다."

그렇다면, 마음 밖의 존재는 근본이 아니란 말인가?

이  구절의 한문 번역본에 따르면, -'마음이 주인이다'로 번역

그러면 마음을 本末의 本, 主從의 主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중국 불교의 주장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나와 대상 2가지만 존재한다. '나'라는 것으로 돌아오면, '나'는 마음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이 근본이면, 몸이 지말인가? 마음이 主라면, 몸은 從이라는 말인가?

기존에는 마음과 몸을 주종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마음이 근본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

번역과 이해는 각자의 문제. 예전에는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그러나 옹역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의 원전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최초의 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 '젊은 여자'를 번역과정에서 그리스어 '처녀'로 번역한다. 고의 인지 착오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오역이 오늘날 기독교를 만들었다. 때에 따라 오역은 본래 의도와 다른 뜻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마음이 근본'이라는 번역이 오역인지 오독인지는 각자의 문제이다. 명백한 것은 '몸과 마음'을 본말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근본이라면, 몸은 부수적인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것. 몸을 얘기하면 몸이 근본이고, 마음을 얘기하면 마음이 근본. 몸과 마음은 본말, 주종의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근본'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음이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든 걸 마음에 담아 버린다. '마음이 곧 부처' 라는 식으로 말하면 모든게 끝. 불교에서는 평전심(사미디)를 말하는데, 사마디 상태에서도 몰아(沒我)나 망아(忘我)는 안됨. 즉 사마디 상태에서도 내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몰아나 망아로 불교의 궁극을 추구해서는 어떤 실천력도 담보하지 못한다. 이것은 이불 속에서만 큰 소리치는 것으로, 명백한 오독이다.  

마음이 근본이라는 것의 의미는 마음이 중심이 된다는 것. 사람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자기의 생각, 즉 자기의 마음이다. 마음의 작용이 생각이다. 인간은 마음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이다. 마음도 몸이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다. 마음이 내용물이라면, 몸은 용기(用器)이다. 마음과 몸을 기존의 견해에서는 본말(本末)이나 주종(主從)의 개념으로 이해했는데, 주종이나 본말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임제선사의 말을 빌리면,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곳에 따라 주인이 된다. 몸과 마음이 대상이라면, 각각 몸과 마음이 주인인 것이다. (*임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라는 뜻은... "어느곳 어디에서든 주인이 되면 그곳에서 참된 진리를 깨달을수 있다" 라는 뜻이다. )

나와 대상은 항상 함께 있는 것으로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다. 하나를 자르면 죽는다. 마음에 대해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이유는 마음과 몸의 의미를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마음 속에 담아서는 안된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대념처경>에 이르기를 '마음에서 마음을 보고, 몸에서 몸을 본다'고 되어 있다. 즉 대상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마음이라고 절대적 인자(=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와 중국 불교는 마음을 절대화, 즉 마음을 형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일심이니 일념이니 하는 말들이 다 이런 데서 나온 것이다.  마음은 찰라라서 마치 물이 흐르듯 흐르는 것이다.  마음은 형체가 없다, 만질수도 없다.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고정되어 있거나 어떤 형체라면 마음은 살아 움직일 수 없다. 기계와 유기체의 차이는 기계는 고정되어 있고, 유기체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즉 유기체는 끊임없이 활동한다.

공자가 나이 50을 知天命 이라 했는데, 지천명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天은 자연의 순리이다.즉 즉 해가 뜨면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달이 지는 것,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열매가 밎고, 겨울이면 잎이 떨어져 휴식을 취하는 것. 그래서 天命은 자연의 이치를 거슬르지 않는 것. 즉 물이 흐르는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공자는 60을 이순(耳順), 70을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했는데, 그 뜻은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따르더라도 규범에 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마음이 작용한 바에 따라 움직여도 규범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범이 무엇인가? 공자의 사상은 인(仁)을 말하고, 맹자는 의(義)를 말한다.

<논어> 안현 편에 보면 안현이 묻는다. "선생님 인이란 무엇입니까? " "인은 극기복례(克己復禮)" 여기서 극기복례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예(禮)라 무엇입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즉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이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예가 아니면, 보나나, 듣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에는 흔히 말하는 종법의 논리이다.( 즉 장유유서, 부부유별과 같이).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마음에 따라 욕망하는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에서 보여지듯, 공자도 '마음'을 중요시 했다.

 

결국 마음을 떠나서는 마음은 없다. 마음이 만법을 전개한다는 것도 무리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만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을 형체화하고, 절대화시키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마음에 대한 이런 모든 얘기는 내(혜천옹) 관점에 따른 해석이지,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라.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인간은 생각이라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이다. 그러므로 그 생각이라는 도로를 벗어날 수 없다. 도로의 상황은 때에 따라 다르다.인간의 미래는 자기가 만든다. 즉 미안한 얘기지만 인간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 없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이다. 오직 내가,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결정짓는다.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즉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을 옮긴다. 내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을 옮기지 않는다. 그러니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행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담장을 넘어 과일나무의 가지가 넘어와도  그 과일을 딸 수도, 안 딸 수도 있다. 참외 밭에서 신발이나 갓을 고쳐쓰지 못하는 것은 이미 눈이 거기 갔기 때문이다. 비례물동, 즉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은 자유지만 그러나 행동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에는 제재가 따르지 않지만, 행동에는 제재가 따른다. 사과를 따고 싶다고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니다. 생각에는 제재가 뒤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과를 따면, 제재가 따른다. 즉 행동은 제재가 뒤따른다. 말과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다. 그저 다 시끄럽고 청소년에게 이거만 가르치면 된다.

 

수레 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몸과 대상도 우리 마음의 작용에 따라 움직인다. 뇌가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여기서 법구경을 읽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다.

 

 

2.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수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마음의 작용을 어떻게 갖느냐? 불쌍한 마음을 갖느냐 아니면 선한 마음을 갖느냐? 과정, 결과도 내가 만든다.예불문에 보면 업도 내가 만들어 내가 맞는다고 되어 있다.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보다 비싸고 귀한 것은 없다. 내가 중심이고 근본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우주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라는 존재 때문에 우주가 가치를 갖는다. 그런 '나'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봄날 화사환 매화밭길이 될 수도 있고, 쇠똥밭이 될 수도 있다.

형체 없는 그림자는 없다. 60년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기사가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서울에서 강릉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지금처럼 대관령에 고속도로가 뚫린 때가 아니다. 서울에서 횡성까지는 포장되었지만, 횡성에서 강릉까지는 비포장도로였다. 횡성-안흥-대화를 지나 오는 사이 밤이 이슥했다. 그런데 비까지 부슬부슬 오는데, 갑자기 소복입은 여자가 차를 세우는게 아닌가? 그래서 귀신인가 싶어 무시하고 냅다 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차를 세운다. 이번에도 무시하고 달린다. 이윽고 세번째 그녀가 차를 세우자 겁이 난 기사가 차를 세워 그녀를 태운다. 백미러로 슬쩍 쳐다보니, 여전히 그녀가 있다. 그제서야 기사는 그녀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자초지종을 묻는다. 알고 보았더니 그녀는 남편의 무덤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그만 때를 놓쳐 날이 어두어져서 차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차보다 빨리 달려 차를 기다렸냐고?  그 고개가 유명하 칙사리 고개였다. 워낙 가파른 고개인지라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또아리처럼 구불구불 나 있었다. 그러니 가파른 도로를 한참 돌아오는 차를 사람은 그저 댓 발자국만 뛰어내려와도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뻥을 보태면, 담배 한대를 피우고도 남을 거리와 시간으로 차보다 빠른 것이다.

 

살아있는 형체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다.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거울에도 보이게 마련이다.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벗어날 수 없다. 즉 자취가 남는다. 인간은 우리의 사고가 걸어온 길이다. 내가 걸어 온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그 길을 걷는다.

수행이란 내가 걸어온 그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다. 되짚어 가서 그 최초의 한 발자국으로 돌아가서 그 자취를 없애는 것이다.

길을 걸으면 자취가 남는다. 그 자취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걸어왔는가가 내 미래가 편안할지 안 편안할지를 결정한다. 결국은 그림자가 주인을 따르듯이 내 그림자가 내 길을 따른다. 우리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자기가 놀란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란다. 내가 그 그림자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이다. 화장이 예뻐야 그림자도 예뻐 안 놀란다. 그림자를 보고 놀라 빨리 달리면 그림자 역시 빨리 달린다. 그림자를 보고 천천히 달리면 그림자 역시 천천히 달린다. 그림자를 없애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것이 바로 진심이다. 진심이란 꾸미지 않는 것이다. 송나라 홍룡소모(?)는 "예사 사람은 마음을 다스렸고, 요즘 사람들은 몸을 다스린다"고 했다. 내가 빨리 뛸 수록 그림자가 빨리 움직이고, 내가 늦게 뛸 수록 그림자도 늦게 뛴다, 내가 멈추면 그림자도 멈춘다. 우리가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이유는 그림자가 움직여서이다. 멈추면 놀라지 않는다.   

 

 

3.

'그는 나를 욕하고 상처 입혔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4

'그는 나를 욕하고 상처 입혔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으리라.

 

3과 4의 두 구절은 동전의 양면이다. 부처님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생각을 품으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관용과 용서를 달라이 라마가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은 1차적으로는 지금 시점에 발간하는 것, 2차적으로 그걸 발간하는 주체가 적합하냐는 것이 문제이다. 지나 온 누군가의 발자취를 누가 어떻게 언제까지 평가할 것인가? 우리는 일본에 대해 일제 강점 36년을 사과하라고 요구하지만, 식민모국이 식민지에 사과한 역사, 사례가 없다.

용서와 관용을 왜 달라이 라마가 얘기하느냐?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는 약자이다. 희한한 것은 화해, 용서, 관용을 얘기하는 자는 항상 약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다. 그 옛날의 피해자가 오늘은 가해자가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오늘 팔레스타인이라는 약자에 고통과 피해를 주는 가해자이다.  넬슨 만델라가 화해, 관용, 용서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이를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제스처이다. 즉 티벳 망명정부가 생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해야지만, 미국의 정치지도자가 만나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내 옆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이것 역시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의도는 모른다. 알면 내가 여기 앉아있지 않는다. 용서와 관용은 각자의 몫이다. 과거청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중요한 점은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자식, 손자, 증손자가 그의 일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베풀되 잊지는 말자"라는 말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그저 좋은 말이다 그러나 타고 놀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즉 수사이자 미사여구이다.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는 말이다. 힘 있는 자가 그걸 가르쳐 준다. 개를 발로 차면, 깨갱하고 도망을 가지만, 사자를 발로 차면 문다. 사자는 사자가 그런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5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다.  

 

원한으로 원한을 갚을 수 없다.

백유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배나무에 있던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 그런데 이 배에 독사가 맞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독사가 도글 뿜어 까마귀를 죽였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독사 역시 독에 죽고 말았다. 까마귀가 다음과 같이 혼자 되뇌이면 죽어갔다. "나는 단지 날아올랐을 뿐인데 나를 죽이다니"  결국 이 둘은 수 없는 생을 바꿔 끊임없이 복수혈전을 펼친다. 결국 원한으로 원수를 갚으면 그것은 반복된다.

친일파를 척결하는 틀림없이 좋은 일이나 그 자손에게까지 그 굴레를 씌우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이것이 국가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국가주의란 무엇인가?  토요일 신문에 정운찬 총리의 이름으로 현충일에 대한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개인보다는 우리, 개인보다는 국가가 우선시되어야 ..."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은 웃기는 짬뽕 100그릇이다. 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다.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 않는 국가나 집단은 나쁜 국가이자 집단이다. 현충일에 추모받는 대상자들인 분들이, 즉 과거의 그 분들이 죽고 싶어 죽었을까? 나의 아버지 역시 6.25로 징집되어 5년이나 군생활을 하고 부상을 입고 돌아가셨다.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는 자들과 이 국가주의자들이 다를 바 없다. 

같은 걸 두고 한 사람은 왼쪽에서, 다른 사람은 오른 쪽에서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앞에서, 한 사람은 뒤에서 말하는 것이다. 중간은 같은 것이다. 가운데 산을 두고 오른 쪽에서 보면 왼쪽 산이고,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 산이다. 무엇을 함에 있어 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를 두고 가장 좋은 후보를 뽑는다고 하는데, 좋은 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을 얻으려는 것이지 봉사하려는게 아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날 찾아와 자기가 시장을 뽑아 줬는데, 시장에 당선되고 나서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동생뻘인 그 사람이 시장이 되기전에는 형님, 형님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는 이제 시장이다. 왜 그가 먼저 다가가 시장님이라고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이 실천하면 된다.

부처님은 원한으로 원한을 씻을 수 없다고 했다.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 1주기라고 기념으로 나온 머플러에 "따뜻한 사람은 분노하는 사람이다"고 새겨진 걸 보았다. 노무현이라는 싸인이 친필인지, 신영복씨의 글씨인지 잘모르겠으니 노무현 대통령이 진짜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따뜻한 사람은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다. 노무현처럼 분노로 세상을 바꾸면, 그 분노로 세상을 바꾸는 그들 속에 우는 사람이 생긴다. 부처님은 비둘기를 사랑한다고 매의 날개를 꺽지 말라고 했다. 매의 날개를 꺽는 순간 비둘기도 같이 죽는다. 노무현은 매의 날개도 꺽지 못했다. 그를 지지하는 것과 그의 생각을 비판하는 것은 별개이다. 그걸 혼동하면 영원히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각 도별로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함경도는 니전투구, 이성계가 이 출신인데, 그 스스로도 함경도 사람 쓰는 걸 피했다. 평안도는 맹호출리, 황해도는 석전경우, 김구, 이승만, 김구가 여기 출신이다.  강원도는 암하노불.이게 뭡니까? 원한으로 원한을 갚으면 니전투구. 진흙 밭에서 소가 싸우면, 둘 다 더러워 진다. 부처님이 원한으로 원한을 갚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한으로 원한을 갚으면, 그 순간 같이 죽는다. 매의 날개를 꺽지 말라는 것이다. 비둘기를 위해서.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