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밝음의 종교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다./우화스님

2018. 3. 4. 11: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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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밝음의 종교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다.우화스님

병석에 누워있다 법문 청하자
“젊은 스님들께 알고 있는 대로 전법하다 죽으면 영광”이라며 
흔연히 일어나 ‘살아있는 설법’ 무생에 사랑이 어디 있으리?

“화두 하는 자에겐 삼라만상 일체세간사 화두 아님이 없고 
술 취한 자에게는 일체 닿는 경계마다 술독만 만나는 게야” 

 

 

 

우화스님은 다보사에서 30년 넘게 ‘천진도인’으로 대중을 제접했다.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대중들을 미소와 하심(下心)으로 맞이했던 

우화스님은 참선화두에 대한 치열한 구도심을 한시도 놓은 적 없었다.


우화스님은…

1903년 4월7일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에서 부친 이규준(李奎俊) 선생과 

모친 하남(下南) 정(程)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절감한 것이 

출가 동기가 됐다. 덕유산으로 입산해 영각사에서 영명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출가사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해인사 불학강원에서 교학 연찬 후 참선수행의 길을 걸었다.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해 

오대산, 묘향산 등 명산대찰에서 만공, 혜월, 한암, 용성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만공스님 회상에서는 성철스님과 같이 공부했으며, 만공스님이 

많은 수좌 가운데 “성철수좌가 1등이고, 우화수좌가 2등”이라고 했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행각참상(行脚參商)하며 공부의 깊이를 더 하는 과정에서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1935년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정진할 때 운봉(雲峰)스님의 법제자가 되면서 

우화(雨華)라는 법호를 받았다. 우하(雨下)라고도 한다. 

해방 후에는 나주 다보사에 주석하면서 납자 제접, 중생제도로 일생을 보냈다. 

단순담백하고 천진무구한 모습과 음성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스님은 1976년 10월1일 “금성산(錦城山)에도 해가 저무는 구나”라면서 

“각자 노력하라”고 당부한 후 원적에 들었다. 법랍 60세, 세수 7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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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때 이 어른 밑에서 행자생활을 한적이 있다.

지금 조게총림 하기전의 일이다.  그때 문수전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경주에서 온 

늦게 출가한 처사와 같이  후원 부억 소임을 맞고있었다.

그는 채공 소임이고 나는 공양주 소임이다.

그 처사 행자가 어찌나 간섭을 하던지  그이 간섭에 못이겨 나주 다보사로 이른

새벽 도망을 갔다.

다보사는 일이 없는 절이었다.  보살과 처사가 후원 일을 다하고 있었다.

오직 어른 밑에서 좌선 뿐이다. 그러나 공부길을 모르는 행자가 어찌 앉아 있는 것이

쉬웠겠는가 이다.  그냥 큰스님을 따라 앉아 있는 것이 공부 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저녘 좌선 삼매 비슷한 경험을 한다.  두 시간이 잠깐 사이에

그냥 지나 간 것같았다. 

 그때 우화 스님이 나를 보고 기뻐 하신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하다. 

 공부인은 후배가 공부하려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뻐한다. 저 또한 지금 보니 그렇다.

우화스님 또한  나를 보고 그랬던 것 같다.  뒤 늦게 그이 모습이 선하다. 

그는 무심한 분이셨다.  항상 공부를 놓지 않고 지낸 분이었다.

그가 만공 스님 아래서 지낸 ㅡ이야기도 해주었다. 

만공스님이  물음이 온다. 

그가 대답을 했던 이야기를 해 준다. 만공은 묻는다.

부처님을 어디에서 보는가 ?

성철스님은 미륵 부처님에게 물어 보시요라고 대답을 해 일등하고

우화스님은 방바닥을 쳐 보임으로   이등했다고 천진스럽게 자랑도 하셨다. 

난 이 어른과 아침 저녘으로 같이 좌선하고 지냈다.

하루는 행자가   두어 시간을 꿈적않고  좌복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냥 알았는지

무척  좋아 하셨다. 대접이 다르게 대하여 온 것이다.

행자 주제에 그런 일이  일어 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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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끊는 이야기


묻지 않는 질문?

이후 12년 만에 책으로 만나는 서울 육조사 현웅 스님의 사자후!

그동안 스님이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을 이끈 공부길과, 출가 후 50여년 동안 수행하며

깨달은 견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은 마치

옛 선어록을 지금 보는 것같다.

 수행의 목적이 무엇이고 수행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깨달음이 무엇이고 왜 간화선을

닦아야 하는지 등을 명료하게 밝혀 놓고 있다.     


1. 스님은 유럽과 미국에서 20여 년 동안 서양인들에게 선을 가르치다 귀국하여, 2005년도에

서울에 들어와 성북구  돈암동에 육조사  도량을 열고 간화禪을 지도하고  있다.  

그가 거하는 육조사는  흔히 말하는 재를 지내거나  기복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

현웅 스님은 사람은 스스로 귀한 존재이다 라고 표얼르 간판ㅇ[ 새겨두고  선방문을 열고 있다. 

사람 속에 있는 부처가  사라아나 그 부처가 밖으로 나와야 세상도 밝아진다고 말한다. 

그는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부처가 이미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믿는 사람은 더 가깝고 믿음이없는 사람은 부처와 조금 멀 뿐이다. 그는 말한다.

 그럼으로 그는 먼저 사람을 믿는 것부터 시작해야 간화선이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사람 떠나 부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불교를 너무 알면  되러 그것이 불교를 어둡게 하여 바로 믿는데 장애를 한다고 말한다. 


 여기 저기서 보고 읽고 배워 얻은 지식은 마침내 믿음을 장애가 되어 그것이

사람 속에 부처를 되러 더 가려 버린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스님은 번뇌를 끊는다. 니 말이나 되는가 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번뇌를 끊는다.고 말하고 나와야한다고 시작한다.

사람 본성엔 번뇌가 없지만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날마다 번뇌를 보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방황하던 시절을 말하고  그리고 마침내 스승을 

만나고 그의 방황은 그친 이야기도 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ㅡ들어보면  한 사람만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이 삶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방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번뇌를 끊는 이야기는  너도 나도 공감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방황을 그치지 못하고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듯 들린다.

그는 말한다. 모든 종교 속에 있는 진리는 하나로 뚫러져  있다.

다만 사람이 가려 놓고 여럿으로 보인고 말한다.

사람 속에 진리는 이 책은 경전이나 선사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공자나 예수의

가르침까지도 하나의 간화에서 만나도록 하고 있다.

그레서 읽는 자가 버뇌가 적어지고 가린 것이 벗겨져 나간다. 

종교 공해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이느 들에게 혼란을 덜어내 줄 것이다.

그 예로 그는  황벽선사의 말을 가져와 보여준다.

황벽은 불교를 공부하지 말라.”

너가 이미 부철르 보듬고 있는데 배우면 그 배운 것이 되러 부처를 가리기 때뭄이다.

책속 곳곳에서  내 눈을 뜨게한다.내가  다시 살아난다.


그는 이조시댜 서산도 말한다. 

 공부하려고 하면 그르친다.” 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부처를 보듬고 살고 있는 존재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를 믿는 길을을 배우는 것이 불교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부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안에 있고 나안에도있다  다만 우린

ㅅ허로 가려 놓고 있는 줄 모른다.   믿음하나가 귀하다.

여기서부터 공부는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떠난 믿음이 곧 미신이고 기복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등지게한다.

아는 것, 익힌 것이 마음을 덮어버리고 장애하여, 마음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발현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

그럼으로 바른 믿음이 귀하다 바른 믿음이 무 엇일까 ! 이게 중요하다. 

사람 마다 지닌 마음이다.

이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렇지만 있다.

그래서 묘하다. 우리는 누구나 묘한 존재이다.  이 책은 곳곳마다  두고 두고 말하고 있다.

 이 존재를 모르니 궁구한다.  그것이 참선이다. 라고 말하고 나온다.

. 결코 어렵지 않다.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누구나 있다.  그것이 눈에 안 뵌다.

 이 것을 참작하니 참선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은  곳곳마다 이것을 보여준 경전이다.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여래를 봐 선이 시작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참마음, 자성, 부처, 불성, 中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 중은 이미 내 안에 존재해 있다. 이미 갖추고 있다. 

이걸 놔두고 억지로 찾아 헤매는 순간 우리는 어두워진다. 어리석어진다.

어려워진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세존은 마지막 그의 유교경에  네 마음을 스승 삼아라.”고 하셨다.

 이렇듯 사람 마음을 알면 일체 성인의 마음이 눈앞에 온다  성인을 다시 만나다. 

 이 책은 그 시작과 끝을 이것만 말하고 나온다.

그래야 사람에게 있는 능력이 살아 나기때문이다.  능력이 살아나야 내가 살기가 좋다.  

 이 첵 속에서 이런 글을 곳곳마다 만난다.     

그래서 불교는 밝음의 종교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다.

불교는 부처님을 위하는 종교가 아니다. 사람을 위해 있는 종교다.

 우리 스스로 가려놓고 보지 못하는 참마음을 보려고 하는 그런 우를 다시 범하지

말아야한다. 이 책은 그 답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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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웅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