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번뇌가 무서운 원수' / 법정스님

2018. 5. 19. 21: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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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번뇌가 무서운 원수' 
                                      / 법정 스님

우다야나 왕의 아들 바라나는 집을 나와 수도승이 되었다. 
온갖 고행을 닦으면서 숲 속 나무 아래서
생각을 모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악생왕(惡生王)은 많은 시녀들을 데리고
숲으로 놀이를 나왔는데,  지쳐서 잠이 들었다.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떼 지어 다니다가
한 나무 아래서 조용히 좌선하는 스님을 보고
그곳으로 가서 절을 했다. 
바라나는 그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왕은 잠에서 깨어나 시녀들을 찾아다니다가, 
그녀들이 둘러 앉아 한 스님에게서
설법을 듣고 있는 광경을 보고 몹시 화가 났다.
왕은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아라한이 되었는가?"
"아직 되지 못했습니다."

"부정관(不淨觀)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습니다."

왕은 잔뜩 골이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얻은것이 없구나. 
한낱 범부로서 어떻게 여러 미녀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느냐."
그러고는 바라나를 온몸에 상처가 나도록 차고 때렸다.
시녀들은 입을 모아 이분은 조금도 허물이 없다고 했지만, 
왕은 더욱 화를 내면서 그를 계속 때렸다.

바라나 비구는 가만히 생각했다.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욕됨을 참았기 때문에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귀와 코 또는 손발을 잘리면서도 그 욕을 참았다. 
지금 내가 당하는 것은 그 백 분의 일도 안 되는데, 
어찌 참아 내지 못하랴.'

사지가 늘어지도록 맞고 나서 그는 다시 생각했다.
'만일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왕위를 이어받아 세력이 저 왕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집을 나와 혼자이기 때문에 이런 곤혹을 당했다.'
그는 괴로워한 끝에 수도 생활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냈다. 
그의 스승 카차야나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스승은 우선 몸이 불편할 테니
먼저 쉬었다가 다음 날 떠나라고 했다.

바라나는 자면서 꿈을 꾸었다. 
부왕이 죽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악생왕의 나라에 쳐들어 갔다. 
악전고투 끝에 그만 패해
군사들은 흩어져 달아나고 그는 사로잡혔다. 
악생왕은 날이 시퍼런 칼을 뽑더니 그를 치려고 했다. 
이때 바라나는 무서워 떨면서 
'우리 스승님을 한 번 뵈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고 생각했다.

이때 스승이 걸식할 때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말했다.
"바라나여, 나는 너에게 항상 말했다. 
싸워서 승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그런데 너는 내 교훈을 잊고 있구나."
그는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만일 지금 이 제자의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다시는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때 카차야나가 왕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러나 왕은 험상궂은 얼굴로 칼을 번쩍 들어
바라나를 내려 쳤다. 
그 순간,  바라나는 너무나 무서워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자 한숨을 크게 쉬고는, 
곧 스승에게 가서 꿈에서 본 대로 말씀드렸다.

스승 카차야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고 죽는 싸움에서는 어느 편에도 승리란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싸움이란 남을 죽이는 것으로
승리를 삼는 잔인하고도 무도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생각으로는 현재에 이겨 마음이 즐겁겠지만, 
이다음에는 그 갚음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져 끝내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만일 싸움에 져서 침해를 당하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뿐 아니라, 
그 재난은 남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다시 죽고 죽이면 그 갚음의 고통은 끝날 기약이 없다. 
이런 줄 안다면 네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아파하는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바라나여,  네가 지금 생사의 두려움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거든 부디
그 몸을 잘 살피고 원한을 쉬어야 한다. 
이 육신이란 온갖 고통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즉 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생로병사와 독한 짐승의 침해 등
여러 원수가 많지만,  너는 그것을 갚을 수 없다. 
그러면서 굳이 악생왕의 원수만은 갚으려고 하는가?

바라나여,  원수를 없애려거든 먼저
네 마음속 번뇌부터 없애거라. 
번뇌의 원수야말로 끝없이 몸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원수는 아무리 악독할지라도 한 몸만을 해치지만, 
번뇌의 원수는 청정한 법신까지 해친다. 
이 세상의 원수는 아무리 혹독한 자라 할지라도
이 덧없는 몸만을 해칠 뿐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원수가 생기는 근본 원인은 바로 네 ?膨嚮? 있다. 
너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너를 침해하고 있는 번뇌의 도적은 물리치려 하지 않고, 
왜 악생왕만을 치려고 하느냐."

이와 같은 간곡한 스승의 설법을 듣고
바라나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렸다. 
그래서 힘써 정진한 끝에 아라한이 되었다.

-잡보장경(雜寶藏經) 제 2권-                                                                                        

 


외부에서 들어오는 적보다 내부의 적을
먼저 물리치라고 경계하는 이야기이다. 
이 말뜻을 뒤집어 본다면,  진리를 먼 데서 찾지 말고
가까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라는 뜻이다. 
진리를 마음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겉돌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보편적인 교훈이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 하고, 
"마음 밖에 부처는 없다[心外無佛]" 고도 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주체성을 선언한 말이다.

모든 일이 한 마음(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한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된다. 
말은 쉽지만 그게 어디 쉬운 노릇인가.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내 마음 내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자기 자신이 마음의 임자이고,  마음이 곧 자기 자신인데.
알 수 없구나.  그 마음이여,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틈이없으니…….

내 마음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이의 마음도 알 수 있다.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여러 개의 마음같지만, 
그 뿌리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눈뜬 사람들의 가르침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 자신에게 머물거나 그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를 인식하되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에게서 시작해 세상[이웃]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
이 조그만 책 안에 들어 있는
비유와 인연 설화의 주제도 바로 이 점에 있다. 
따라서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당하는 그 속에서 최선의 길을 발견한다.

"어지러운 세상이야말로 좋은 시절 아닌가?"
이렇게 말한 조주 선사의 주장은 결코 억설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뿐 아니라 늘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현실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을 자기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좋은 시절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날마다 좋은 날 (日日是好日)

-『비유와 인연설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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