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이란 것이 백년인생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無始) 이래로 영원히 흘러가는 생명체(生命體)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병(病)이 나고 잘살고 못사는 것은 전부 이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진 병이 들어 아무리 좋은 약을 먹는다고 해도 환자의 마음에 그 약을 먹고 낫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疑心)이 가득하면 약효(藥效)가 잘 안 납니다.
그런가 하면 약(藥)으로도 치료가 어렵다는 병에도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한 생각으로 낫는 이치도 있습니다. 지옥 중생(地獄衆生)은 ‘하루 동안 만萬 번을 삶과 죽음을 거듭한다’고 합니다. [一日一夜 萬死萬生]
그러면 만 번 죽고 만 번 사는데 무슨 약(藥)이 필요하겠는가 말입니다. 다 제가 지은 업력(業力)으로 일일일야(一日一夜) 만사만생(萬死萬生)인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나는 것도 전생前生의 업력으로 일어나고, 내 몸에 병이 생기는 것도 업(業)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업력에 끄달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서 이 병을 일으킨 업력만 고쳐 버리면 병이 낫는 것이 당연하지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 해서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神秘)하고 오묘한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기계처럼 보아 몸 어딘가에 조금만 이상이 있다고 느껴도 병원에 쫓아가면서도 자신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돌아 볼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란 사실 모든 것에 작용(作用)되고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성을 낸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내는 얼굴을 보면 대번 압니다. 그럼 무엇이 화(火)를 낸 것입니까?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바로 이 마음에서 성이 난 것이지요. 그런데 성을 내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고 입술이 벌벌 떨리게 되는 것은 다 생각이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움직여서 이 몸에 그만한 파도를 일으켰다는 것이 증명이 되지요.
가령 놀랬다고 합시다. 놀라면 눈이 동그래지고 눈썹이 뻣뻣해 지지요. 그럼 놀라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얼마나 신기(神奇)합니까? 또 우리가 기쁜 생각을 하고 있어도 금방 표시(表示)가 나서 상대방이 먼저 알아챕니다. “저 사람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봐,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또 무슨 걱정이 있어 우수(憂愁)가 서려 있으면, “자네, 요새 근심이 있는 모양이지?” 하면서 곧 알아챕니다.
이것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몸에 도장(塗裝)치고 삽니다. 그렇게 과거 다생(多生)에 걸쳐 착한 마음을 쓴 사람이라면 그 얼굴에 유덕(有德)함이 보입니다. 그래서 초면(初面)에도 인상이 좋음을 대번 느낄 수 있지요.
반면에 악덕을 지은 사람은 독해 보이고 마주 대(對)하기조차 싫어집니다. 전생에 닦은 것이 몸에 도장을 쳐서 그 모습이 현재에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위대한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큰가가 증명(證明)이 되지 않습니까?
중병(重病)에 걸려서 기도하는 도중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나타나 아픈 곳을 만지니 병이 다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의 관세음보살이 싹을 트고 나와 내 병을 고친 것이지, 어디 다른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속에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함축(含蓄)되어 있어요. 우리는 흔히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가서 기도를 해야 도(道)를 깨친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아주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태양빛이 어디나 고루 비치듯 불심(佛心)이 충분한 곳은 다 수행도량(修行道場)이 됩니다.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훨훨 털고 같이 가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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