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 17:5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이 시대 마지막 도인이 떠났다
설악한 신흥사 조실 조오현 스님 열반
이 시대 ’마지막 무애(無碍)도인’이 떠났다.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이
26일 오후5시11분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입적했다. 승납 60년, 세납 87세다.
고인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7살에 입산해 1959년 성준 스님을 은사로 직지사에서
출가했으며, 주필과 신흥사·계림사·해운사·봉정사 주지를 거쳐 강원도 설악산권의
대표사찰인 신흥사와 백담사 조실과 조계종 조계종 원로의원을 맡고 있었다.
특히 고인은 백담사가 출가 본사인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의
애민·생명·평화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시작한
만해축전을 매년 8월 강원도 인제에서 개최해 전국의 문인, 지역민이 함께 하는
축전으로 만들고, 이 자리에서 시대정신과 양심을 상징하는 인사들에게 종교를
가리지않고 만해대상을 시상했다.
또 강원도 인제 백담사 초입에 2003년 만해마을을 조성해 문인들의 창작공간으로 내놓았다.
1999년 을 창간해 논쟁 없는 불교계가 논쟁으로 시대정신을 창출하게 했고,
만해가 창간했던 을 복간해 시와 학문과 세상이 회통하게 했다.
고인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물고뜯는 분단시대를 넘어선 국량을 보였으며,
종교와 승속, 국가의 벽을 넘어선 장쾌한 대장부였다.
그가 만든 만해축전은 만해와 설립자와 방응모와의 각별한 인연을 들어 와
공동주최해 ‘독립운동가 만해와 친일신문은 어울리지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만해대상은 김대중 전대통령, 리영희 선생, 이소선여사, 고은 시인, 김지하 시인,
조정래 소설가, 강원용 목사,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두봉주교, 백낙청 선생, 신영복
선생 등 당대 대표적인 진보인사들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시상됐다.
그가 아니면 남남갈등의 시대에 대표적 우익신문의 이름으로 ’좌익’으로 손꼽힌
이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 제3세계에서 군부와 독재자들의 폭압 아래서 목숨을 걸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는 평화·인권운동가들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그들의 운동을 간접 지원했다.
그는 걸림이 없는 언행을 보인 무애도인이자 기인이었다.
그를 대면한 이들은 오불조불한 관념의 세계에 갇히지않은 호쾌함에 매료됐다.
그는 말년에 매년 3개월씩 두차례, 즉 일년의 절반을 백담사 무문관에서 보냈다.
무문관은 밖에서 열쇠를 잠그는 ’폐관 수행실’이어서 구멍으로 들어오는 하루 한끼의
식사를 받으며 3개월간 방안에 갇혀 오직 참선정진을 하는 곳이다.
그가 무문관 수행을 끝낸 뒤 대중들 앞에서 한 설법은 절집에서는 전에 듣지 못한
것들이었다. 천년전 선사들의 말을 되풀이하는 앵무새 설법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것이었다.
그는 “부처님도 석가족이 멸망할 때 전쟁을 막기 위해 나 홀로 반전시위를 한
반전운동가였다”면서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화통하게 마음을 열 것을 촉구했다.
그는 “남북관계에서 ‘사과를 받아야겠다거나 용서를 못 하겠다는 것은 감정싸움이나
핑계에 불과하고 자기 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인식이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춤추기 때문’이라며 “미움과 분단이 지속되면 우리 국민은 숨통이 막히니
우리 국민이 살아갈 길은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이북·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의 여러
나라에 도착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한국학센터의 초청 강연 때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국에선 서부 개척시대부터 총잡이들도 총을 동시에 꺼내고
내려놓는 게 정도 아니냐”며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핵과 살상
무기를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 그 막대한 돈으로 복음 사업에 사용하라”고 권했다.
그의 법문은 늘 허울의 불교를 던져버린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절마다 교회마다 방송마다 신문마다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시끄로운 소음이
된 지 오래다”면서
“노망기 있는 이 노승의 설법을 듣기보다 동해 바다의 파도소리와 설악산의 산새소리,
계곡 물소리를 듣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장경의 글과 말 속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 여러분이 오늘 산문을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의 가슴 아픈 삶 속에서 진리를 찾아라”고 경책하며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소설가 이청준의 말대로 절집에만
’당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 하라”고 했다.
그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엔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없듯이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며
“천년 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뱉어놓은 사구(죽은 말)만 들고
살지 말고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했다.
그의 행은 말만으로 그치지않았다. 겉모습은 격식을 떠난 파격적인 언행으로 기인이자
이인으로 비춰졌지만, 그는 가장 힘든 중생들의 손을 놓지않고 힘을 실어주는 ’자비보살’이었다.
기독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계촌 피복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아무도 몰래 매달 후원금을 보냈다.
이 사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늘 “조오현스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2011년 이 여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감으로써 유족들에 의해 밝혀졌다.
고인은 백담사가 있는 인제 산골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아이들 수백명에게도
대학 재학 때까지 남몰래 장학금을 마지막까지 기부해왔다.
고인은 또 2011년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갔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돼
대학생들이 1인당 15만~5백만원의 벌금고지서를 받고 힘들나다는 기사를 보고는
에 벌금총액인 1억3천만원을 기부해 벌금을 대납하게 했다. 이 사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않을 것을 전제로 해 당시 ‘조계종 소속의 한 스님의 기부’로만 알려졌다.
불교계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가산불교연구원이 현대 대장경 불사격으로 진행중인
불교대백과사전 발간작업이 설립자인 전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열반 후 위기에 봉착하자
아무도 몰래 연구원 대표를 맡아 수십명의 연구원들을 지원해온 것도 고인이었다.
2013년엔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 1기 졸업생으로 동국대의 상징적 존재인
만해를 기린 만해마을 200억원대 전자산을 동국대에 기증해 만해의 뜻을 살려나가도록
했다. 갓 출가한 승려들을 교육하는 기본선원을 백담사에 설립해 교육을 한 것도 그였다.
신흥사보다 사찰 재정이 넉넉한 사찰들에서도 자기 절을 키우거나 과시하는 것 이외
공익적인 지출이 거의 없는데 반해 고인은 불사금을 주머니에 정체시킨바 없이 당대
가장 필요한 곳과 사람들에게 지원해왔다.
그는 자신에 대해 “7살에 절머슴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낮잠이나 잤으니 언제 공부나
해봤겠느냐“며 ‘무식한 노승임’을 자처했지만, 실은 어린시절 대장경 원문을 외워
그대로 암송해낼 수 있는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해탈의 정신세계와 파격의 언어, 세심한 내면은 시에 남았다. 그의 시에 대해
원로시인들중엔 “시인들조차 감히 넘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세계”라고 평가했다.
그의 시에선 7살 어린 나이에 원치않게 절집에 맡겨진 가엾은 동자승의
’타는 목마름’과 중생들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시조 ‘어미’에는 죽도록 일하다
힘이 떨어지자 미처 젖도 못 뗀 새끼를 두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어미소가
당산 길 앞에서 주인을 떠박고 헐레벌떡 뛰어와 새끼에게 젖을 먹여주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그의 시에선 고통의 암덩어리를 그대로 끌어안고 이를 영롱한 진주로 바꾸는
수도자의 내공이 들어있다.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 소리 들으려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그의 시는 마침내 어둠이 빛이 되고, 고통이 자비가 되어 영원한 세계로 나아간다.
에서 그는 중생계와 피안계, 우리와 그의 머나먼 거리를 하나로 이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권영빈 서울대명예교수는 2005년 ‘세계평화시인대회’ 만찬장에서
오현 스님이 예정이 없이 즉흥적으로 발표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란 시조다. 당시 이 시조를 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 시인은
“이 시 하나에 ‘평화’라는 우리의 주제가 다 압축되어 있다”면서
“대단한 인물”이라고 경탄했다고 한다.
고인의 시들은 , , 등 시집에 담겼으며, 그는 현대시조문학상(1992년),
남명문학상(1995년), 가람문학상(1996년), 한국문학상(2005년),
정지용문학상(2007년), 공초문학상(2008년)등을 수상했다.
그가 서울에 올라오면 가끔 머물던 서울 정릉 흥천사 조실채엔 ‘손 잡고 오르는 집’
이라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고인이 붙인 이름이다.
그의 정신 세계는 일찌기 중생의 관념과 애증의 골짜기를 뛰어올라 창공을
비상했지만, 그는 늘 그 골짜기로 내려와 구부러진 허리를 한채 고통중생들과
언덕을 함께 올랐다.
영결식은 오는 30일 오전 10시 원로회의장으로 설악산 신흥사에서 엄수되며,
이어 금강산 건봉사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봉행된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영혼의 울림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5년 3월 20일 버클리대학 구내 데이빗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서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의 특별 초대손님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대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고 있다.
1930년경에 태어나 절간에서 80여년을 살아오신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일찍이 시조에 관심을 두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조 창작을 해 오면서
‘선(禪) 시조’ 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큰스님의 시조집 <아득한 성자>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다.
큰스님의 시조 작품들은 권영민 교수에 의해 모두 <조오현 시전집 ? 적멸을 위하여>
(문학사상사)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이 행사에서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의 <시조한 무엇인가>라는 강연과
뉴욕 주립대학 뉴 팔츠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의 <무산 조오현의 선(禪) 시조>라는
주제 강연을 했으며, 초대손님 조오현 스님과 버클리대학 권영민 교수가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그리고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시조시인 홍성란 씨, 박영희 씨, 강병천 씨와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낭송했다.
이 행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초청되어 온 한국 전통 가곡 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유경
명창의 가곡창과 시조창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대금 연주가 고진호씨와 가야금 연주가 홍세린 씨가 함께 공연했다.
이날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는 180석의 자리에 청중이 빈틈없이 몰렸다.
청중석에서 대담을 지켜본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는
‘오늘 큰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퍼 올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큰스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지혜와 큰 가르침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교민들이 긴 세월의 이민생활에서 처음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취업난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다음에서 조오현 큰스님과 권영민 교수가 나눈 대담 전문을 소개한다.
권영민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영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무산 조오현 ? 영혼의 울림>이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가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큰스님은 80년 동안 산중 절간에서 생활해 오신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입니다.
설악무산 큰스님은 1960년대부터 시조 창작을 해왔고, 몇 권의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지요.
최근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World Literature Today>
<Buddhist Poetry> 등의 여러 잡지를 통해 큰스님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여
‘살아있는 선시(禪詩)’로 주목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담을 가지기 전에 제가 무산 큰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였으니까요. 저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저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지요. 백담사는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인데,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저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 한용운의 형상처럼 그윽했습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있던 저에게 합장하며 무얼하는 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면서 머리를 숙였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어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노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그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백담 계곡을 가리키면서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셨어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저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등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한번 잡아주시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절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지요.
저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습니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어 저는 가끔 백담사를 찾습니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지요. 거기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곳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 제가 백담사에서 처음 만나
뵈었던 바로 그 노스님,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 앉아 계십니다.
무산 큰스님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큰스님을 박수로 환영하여 주십시오.
무산 큰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산중 절간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데, 먼 여행길에 오르시어 우리
버클리대학을 찾아 주셨으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스님이라고 제가 선전을 좀 했습니다.
큰스님의 법어를 듣기 위해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오셨고,
이 지역에 사시는 교민들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로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오현 스님
권영민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중 늙은 중을 세계적인 명문 버클리대학에 초청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주신 버클리대학 교수님들, 여러 학생들 그리고
함께 참여해주신 교민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의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주신 점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권영민 교수
무산 큰스님.
저는 큰스님을 백담사에서 가끔 뵙고 덕담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여쭙기는 처음입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먼저 큰스님의 절간 생활은 어떠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절간에서 큰스님은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아마도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어디 가서 입을 열지 않으면 본전은 하는데, 입을 열면 그만 손해를 봅니다.
선승의 법어라고 하니깐 잔뜩 기대를 갖고 오는데, 한참 들어보면 아무 내용 없는
말만 하니깐 실망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절간 생활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남의 비위 맞출 일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아첨할 일 있으면 아첨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치고, 뭐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갑니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러시군요. 절간의 생활이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선원의 조실스님이시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승들이 스님의 문정(門庭)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자주 큰스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다면, 큰스님께서 참선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방금 교수님이 내 절간 생활과 하루 일과를 물었고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루 일과가 바로 나의 참선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와서 강의하실 자격이 없어요.
교수님과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 한 번 쳐다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 것이고, 교수님은 듣고 싶은 말 다 들은 것입니다. 이 외에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영민 교수
아무래도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운데요. 처음부터........
조오현 스님
나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어렵게 듣고 있습니다.
선은 말과 글이 아닙니다. 선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지요.
그 말과 글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결박입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데 토끼 뿔 거북이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다 마음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합시다.
권영민 교수
예, 알겠습니다.
방금 큰스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시니 큰스님의 시조 「마음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더라
큰스님,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맘이 무엇이길래 천하장수도 들지도 놓지도
못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이 꼬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조오현 스님
교수님, 그것을 내가 알면 미국 말도 못하는 늙은이가 왜 여기 앉아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마음의 근원은 원래 고요적적 아주 담적하다고 합니다. 빛깔도 향기도
모양도 없이 이름 지을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합니다. 실로 만법을 구비하여 갖추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거울은 맑고 비어서 능히 만상을 비춰 보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끼인다 하여 그 밝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를 벗기면 다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영민 교수
오늘 큰스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시조에 대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선(禪)의
세계와 연결시킨 것이 스님의 선시조라고 앞서 하인즈 펜클 교수가 말씀을 했습니다.
큰스님은 선과 시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과 시는 ‘시선일미(詩禪一味)’라 하여 시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시와 선은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禪而無禪便是詩)요,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詩而無詩禪儼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금나라 때의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던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을 깔아준 것(詩爲禪客添花錦)이요, 선은 시인에게 절옥도(禪詩詩家切玉刀)라
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은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이라고 할까요. 설혹 시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를 만나는
그 순간 언어의 때가 묻어 버렸기 때문에 시는 마음을 조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첨언하면 마음에 옹이가 박혀 점박이 결로 나타나는 것이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작의가 없다고 불가사의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선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비유하면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으면 맑은 호수에도 똑같은 하늘의 달그림자가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달그림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대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건져내는 그 순간 달그림자는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시는 언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무작묘용도 다만 말일 뿐입니다.
권교수님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시며 40년 넘게 비평활동을 하셨습니다.
내 논리에 공감을 하십니까?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물론 큰스님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조오현 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영민 교수
저는 하인즈 교수님 견해를 지지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언지(詩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詩)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면하다시피 하는 시조에
큰스님께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답만 하다 보니 오늘 내가 미국에 와서 청문회에 출석한 것 같아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십니다. 귀찮은 질문이라도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村夫)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願)과 한(恨)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선 왕조의 위업을 쌓은 이방원 즉 태종이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시조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라는 구절로 시작되지요.
이 시조를 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드러내기 위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고 시조를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시조를 가지고 서로 묻고 답한 것인데 두 편의 시조가
시조를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오현 스님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영민 교수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오현 스님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영민 교수
예.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신다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간 황진이가 그 앞에서 유혹하자 부처가 돌아앉아 버렸다는 겁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덩어리가 되어 뒹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린 지족선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는 황진이 곁을 떠납니다.
그때 황진이가 떠나가는 지족선사를 향해 노래부른 시조 한 수를 읊어 보겠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 시조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었군요.
조오현 스님
모두 전해오는 이야기이지요.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읊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어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전에 한국에는 이미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의 문학사상사에 특별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오현 스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허수아비>라는 시조를 들어보니 무욕청정하게 사시는 스님의 자화상이
무슨 영상처럼 선명합니다. 정말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곳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허수아비의 그 텅 빈 하늘까지도 끌어안는 지혜로운 말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교수님 말씀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님들 우수한 학생들이 죽을 일만 남은 산중 늙은이의
말을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분들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도 다 압니다.
요즘은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 시대라 잠시 검색하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소음(騷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저 바다의 파도와 물빛 해조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언정 옛 성현들의 말씀에 특히 종교인의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시끄럽다 이겁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새울음, 개울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의 원음이니까요.
내가 말을 안 하면 본전이라도 하지만 입을 열면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서에 말을 안 하기가 제일 어렵다 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영민 교수
수년 전에 큰스님께서는 ‘절간에 부처 없다’고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간에 부처가 없다면 큰스님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해 오신 절대존자인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내가 절간에 부처 없다고 한 것은 한국 불교가 아직도 기복(祈福) 불교 중심이라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복 불교를 버리자고 한 소립니다.
교수님은 지금 절대존자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습니다.
소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석가모니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한 인간으로
팔십년 살다가 한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그를 받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등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존자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권영민 교수님 자신이고 맥켄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맥켄 교수님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49년간 설명하고 갔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가르침 중에 “핵심”입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여론 조사한 것을 어느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미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요?
조오현 스님
미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우방국으로 한국을 도와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교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경제개발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것은
미국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깊이 고민해 볼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좀 냉정하게 비판하면,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미국은 미국중심주의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핵과 같은 살상무기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 합니다.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그 막대한 돈으로 기독교의 복음사업에 사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1231년 몽골족이 한국의 옛 이름인 고려에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는 적을 막을 총칼 등
무기를 만들지 않고 불경을 경판에 새겼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전쟁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입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 기독교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면 살상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미국이 인류평화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폐기처분한다면 한반도를 위협하는 북한도 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사실상 핵은 인류의 재앙의 근원입니다. 지금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백 년 못 가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핵 폐기야 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며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대역사라 할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능력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정신적 기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을 폐기하면 영원한 진리의 몸을 얻을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 강국답게 크게 한 번 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죽비竹?를 크게 세 번 치시고 합장하셨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禪房)으로 아시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竹?)를 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민들에게는 죽비 대신 마지막으로 축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원 같은 것 대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자기네 전통시가인 ‘하이쿠’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민들은 시조를 흘러간 유행가로 사대부의 음풍영월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대학 맥켄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영어시조운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이 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소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라는
시조 한 수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6. 25 전란 중에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나온다.’라고 새로운 희망을 시조로 읊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맹서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라면서 자신의 포부를 시조로 풀어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기 전에 1982년 12월 23일 청주감옥에서 나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라고 읊은 시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 어른은 그 시조대로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제가 이곳 여행을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시조를 잘 짓는 홍성란 시인과 박영희·강병천
두 분 시인을 말동무 삼아 모시고 왔습니다. 백담사 무금선원 영진 스님도 함께 와 있습니다.
모두 시조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부르는 이은상의 「가고파」
「성불사의 밤」와 같은 가곡은 모두 시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쁜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노래하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축원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권영민 교수
이제 말씀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 다니는 허깨비라 했다 합니다. 나도 허깨비가 되고 싶었으나
허깨비는 못되고 제자리걸음만 걷는 허수아비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교수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신 무산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허수아비 / 조오연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 조오현스님의 버크리대학 대담중에서
|
계림사 가는 길 / 조오현
게림사 외길 사십 리 허우단심 가노라면
초록산(草綠山) 먹뻐꾸기가 옷섶에 배이누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흰구름도 빛나고
물따라 산이 가고 산따라 흐르는 물
세월이 덧없거니 절로 이는 산수간에
말없이 풀어논 가슴 열릴 법도 하다마는
한벌 먹물 옷도 내 어깨에 무거운데
눈감은 백팔염주 죄일사 목에 걸어
이 밝은 날빛에 서도 발길이 어두운가
어느 골 깊은 산꽃 홀로 피어 웃는 걸까
대숲에 이는 바람 솔숲에 와 잠든 날을
청산에 큰 절 드리며 나 여기를 왔고나
절간이야기 25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절간이야기 29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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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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