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의 본질|…… 혜천스님설교

2018. 9. 8. 12: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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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수행의 본질

혜천스님 설법 불기2555년 1월 30일


 

 

요사이 날이 많이 춥습니다. 이럴때일수록 수행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는 '불교 수행의 본질'로 잡았습니다.

많은 불자님들이나 뜻을 두신 분들께서 수행을 많이 하시고 계심. 그런데 수행은 많이들 하시는데 근본적으로 이해를 잘 못하고 계시는 것 같음. 그동안 강론하면서 여러번 이야기 했지만, 어쩌면 주변적으로 말씀드리고 했는데, 오늘은 이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함.

 

붓다께서 말씀하시길, "자애로서 심해탈(心解脫)을 발전시키고 연마하며, 자애를 수레로 삼고, 자애를 토대로 삼아  자애심을 견고히 하여 자애속에서 자신을 단련한다. 그렇게 하면 자애로움을 온전히 성취하리라"  이것이 불교수행의 본질이요, 불교의 본질입니다. 이것들 단련, 연마, 발전시키기 위한 수행 자체가 궁극의 단계가 아닙니다.  자애로서 심해탈을 발전하고, 연마하고, 자애로서 수레를 삼고 토대를 삼으며 - 여기서 토대는 인드라마로, 대지의 표피를 걷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의식을 올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자애를 온전히 성취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불교수행의 본질임.

 

이 세상에는 두가지가 존재함. 하나는 나이고, 또 하나는 대상임. 나와 대상, 이 자애심을 나에게, 내 세포 한하나에 충만시키고, 대상 하나 하나에 이 자애심을 전이시켜 충만시키는 것을 '아파마나' 라고 함. 중국에서는 무량심(無量心), 우리나라에서는 헤아릴수 없는 마음이라 했는데, 나는 그것을 가없는 마음으로 부름. 아파마나는 이 가없는 마음임.  이 자애심을 빈틈없이 마음에다 채워야 함. 컵에다 물을 따를때 적당히 작게 따르면, 서운함. 잔은 차야 맛임. 그런데 잔이 찬다고 해서 넘치게 붓지는 않음. 그렇지만 잔에다 물을 수북히 따를 수는 있음. 표면한계보다 높게 많이 따르는 것, 이것이 아파마나임. 아파마나는 그 한계까지 가득 채우는 것임. 이것이 불교수행의 본질임. 자애심을 세포 하나하나에 가득 채움, 차야 넘치는 것임. 이것을 위해 사띠수행하는 것임.

 

사띠(깨어 있음)는 내 마음이 깨어 있는 것임. 청정심의 상태가 돼야 자애심이 생김. 붓다는 수행을 포기하려는 주리반타카에게 '라조하라낭' 을 읊으라고 했음. 주리반타카에게는 형이 하나 있는데, 이 형이 동생을 붓다에게 인도 했는데 매우 명석했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형제임. 그런데 둔재였던 주리반타카가 자꾸 형과 비교돼 놀림감이 되고 하니 형이 화가 나서 '너는 수행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 같으니 수행을 그만두라. 여태까지 붓다 말씀을 한귀절도 외우지 못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리반타카는 비록 머리는 모자랐지만,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음. 그래서 한쪽에서 울고 있으니, 붓다가 이를 듣고 흰 천을 주면서 '이것으로 더러운 것을 딱아라, 딱으면서 라조하라낭(더러운 것을 제거함)이라고 염불을 하라" 했음.  그때부터 주리반타카는 수행처의 곳곳을 딱으며 걸레가 더러워지면 다시 빨고, 다시 빨면서 딱다가 어느날 한순간 깨달음을 얻게 됨.

   

주리반타카는 '그렇구나,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구나. 본래는 티없이 깨끗한 청정심인데 객진(다섯가지 감각기관)에 의해 염오심, 더럽혀지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본래 어머니 몸에서 나올때는 흰천처럼 깨끗했는데 점점 더럽혀지는게 사람 마음입니다. 청정심이 다섯가지 감각에 의해 더럽혀짐. 그 청정심을 되돌리기 위함이 수행이며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 사띠를 사용하는 것임.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염오심을 하나하나 덜어내는 것이 수행임. 컵의 임계점까지 찬 것을 줄일수록 공간이 생기고 완전히 비워짐. 빈잔이 본래 마으밈. 잔은 본래 무엇인가를 담는 것임. 가득 담겨져 있는 잔은 기능은 하고 있지만, 효용가치는 없는 것임. 무언가 담겨져 있는 잔은 다시 담을 수 없음. 따라서 가득 채워진 잔은 깨진 잔과 같음. 죽은 잔임.

 

사람들은 누구나 주리반타카의 전단계까지는 생각함. 버린다는 것은 청정심이 채워진다는 것임. 대념처경에도 '꼬살라를 일으켰다' 라는 대목이 나옴. 여기서 꼬살라는 효능이 있는 것이란 뜻으로 자애심을 가리킴. 자애심을 일으켜 내 몸 가득 채움. 채워서 철철 넘쳐야 함. 그래서 유정은 물론 무정까지 다하여 자애심으로 채우는 것이 아파마나임. 나와 대상의 자애심을 아파마나 하는 것, 이것이 수행임. 그렇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와 대상의 경계가 무너짐. 이것을 중도라고 함. 지금 세간에서 얘기하는 수행은 다분히 기능적, 기술적 부분만을 언급함. 자꾸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여, 봤니 안봤니, 느꼈니 안느꼈니.. 하는 식의 논란을 가져 옴.

 

미얀마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중이 있음. 사람은 묘한 존재임. 정을 느끼는 방법도 다 다름. 어떤 경우는 첫사랑과 이름, 생일이 같다고 결혼한 사람도 있을 정도임. 이렇게 볼때 정이라는 것은 별거 아님. 붓다시절, 빠사나비왕은 붓다와 나이가 같다고 기뻐하였음. 그런데 이 중도 나하고 자기하고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접근해 옴. 그런데 이 사람은 사야도와 맨날 싸움을 일으킴. 그만큼 자기가 하던 방식을 고집했던 것임. 내가 누구에게 무었을 배우러 갔다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100%를 빼 먹고 나서, 그후 가질 것은 가지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 인간은 기억의 동물임.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데 모든 인간이 이와 같음 그래서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생각의 방법과 생활의 습관 달랐던 것임. 조금 고급하게 표현하자면, 사유와 문화의 양식이 달랐던 것임. 사유는 생산을 의미하고, 문화는 소비를 뜻한다고 할때 이 둘은 아주 환상의 커플임.

 

사유와 문화의 방식에 의해 그 사람이 느끼고 보는 것이 달라짐. 그래서 차이가 생김. 당연히 한국적인 것을 갖고 있는 스님과 사야도는 다름. 미안하지만, 이것은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님. 사유와 문화 양식의 다름임. 밀가루가 있다면 우리 어머니는 국수, 부치기, 만두, 찐빵을 떠올리겠지만, (통도사, 몸살, 공양주 보살 먹고싶은 것, 만두 - 속, 반죽, 빚어 끓이는 에피소드)이태리는 피자를 떠올리고, 프랑스는 바게뜨 빵을 떠올리게 될 것임. 나는 요즘 같으면 부치기도 귀찮고 그냥 풀을 쒀서 문풍지를 바르거나 옷에 풀먹일 생각을 갖고 있음. 이처럼 그때마다, 문화마다 달라짐. 남미의 어떤 민족은 성인식을 치를때 환각약물을 먹고 마을과 정글의 경계에서 잠을 잠. 그러면 꿈속에 거대한 아나콘다가 나타나고, 이를 봤음을 증언하며 성인식을 마치게 됨. 꿈에서 거대한 뱀을 보는 것을 '몽사'라 하는데, 그 부족의 모든 남자가 그것을 봄. 만약에 그것을 못봤다고 한다면, 조상님이 버린 인간이라 하여 축출돼 버림. 이러니 보지 않아도 봤다고 함. 몽사가 있다면 몽사의 사유체계가 있는 것임.

 

이처럼 스님의 사유체계와 사야도의 사유체계가 다름. 어느 누군가가 긍정하지 않는 한 그 둘은 만날길이 없음. 내가 지금까지 모신 스승님 중 떼자냐 사야도가 계신데, 제일 존경하지만 긍정하지는 않음. 그 분에게 공부하는 법의 기본적인 것을 배웠지만 내가 그에게 100% 복제될 것은 없는 것임. 양쪽의 사유체게 다르다 할지라도, 그가 갖고 있는 장점을 취해야 함. 중국 선사들의 말은 대부분 구어이자 속어임. 무식하고 몰상식한 언어임. 고급언어를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면 이 세상에 인간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말은 속어임.

 

수행, 사띠 수행임. 사띠 수행으로 내 몸 하나하나의 세포에 자애심을 각인시키려면 내 몸이, 내 마음이 깨어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임. 안분수의경(安般守意經), 이것은 중국의 한문으로만 기록된 경전임. 거기에 보면 수행의 단계로 수식~상식~지~관~환~정이 있는데 마지막 정의 단계에 이르면 자애심이 가득하여 넘쳐 흐르는 상태를 말함. 여기서 안반은 안나반나(安那般那)의 줄임말로 안은 날숨, 반은 들숨을 나타내고 수의는 사띠를 뜻하는 말임. 붓다가 보리수아 나무 아래서 위빠사나를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남방불교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요?  붓다는 오랜 고행을 하다가 '지난 날 잠부나무 아래에서 나는 도리어 평화롭지 않았던가?하며 네란자르강에 목욕하고, 보리수아 나무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어렸을때 잠부나무  아래에서 느꼈던 자애로움을 떠오렸음. 농부는 밭을 갈고, 거기서 나오는 굼벵이며, 지렁이를 먹기위해 새들이 달려드는 풍광이 떠 올랐음. 반면 지금의 땅은 죽어있음.

 

붓다가 어렸을때 잠부나무 아래에서 새에게 먹힐 벌레들에게 자애심을 느끼고, 그 작은 생명체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이것이 아파마나 수행임. 자기 몸뚱이를 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그렇지만, 들숨, 날숨 하는 것은 중도로 가기위해 중요함. 이것은 붓다의 말씀임. 자애심을 내 몸에 각인시키고 그것을  대상에 투영하여 자애심이 가득하도록 하는 것이 중도, 아파마나임.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해 오고 있는 것은 다 기능적인 얘기임. 붓다는 수행초기에 베이살리에서 유명했던 두명의 요기스승과 결별하고 자신의 길을 간 이유를 잘 알아야 함. 들숨날숨은 2쳔년을 이어온 수행방식임. 여기에 붓다는 아파마나라는 고유의 방법을 제시했음.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 것임.

 

집 사람이 어떤 루즈를 바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음. 외출을 해서 누구와 만나길래 루즈를 그것으로 했는냐... 집사람은 하나의 인격체로 외출을 한다. 이것이 사태의 본질임. 외출하면 내 집사람이 아닌 것, 이것이 본질이 되는 것임. 어떤 루즈, 색 등등 나머지는 모두 지엽적인 것임. 그런데 우리는 지엽을 갖고 본질을 싸려다 보니까 인간의 감정이 사라져버린 무정물의 그것이 됨. 인간은 감정이 있는 존재임. 수행의 본질도 바로 인간성 회복이고, 감성이 회복임. 나와 대상에 자애심 가득한 것, 나와 대상이 공감하는 것, 들숨 날숨을 통해 보면서 내 몸과 대상이 공감을 이루는 것임. 이런면에서 자애심은 다른말로 감성이라 할 수 있음. 인간이 다른 것, 그것은 감성을 공유하는 것, 공감할 수 있다는 것, 돌이 아님. 돌은 존재하되 비어있는 것임. 세계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정원이 일본에 있는데, 이 정원의 돌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임. 

 

 



  

수행은 기술이나 기능적인 것이 아님. 내 몸과 마음과 대상이 자애심이 충만하여 모든 생명체와 공감하는 것임. 나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대상과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느냐, 못보느냐 하는 것은 기술적, 지엽적인 문제임. 붓다는 '자애로서 심해탈을 발전시키고 연마하며, 자애를 수레로 삼고, 자애를 토대로 삼아  자애심을 견고히 하여 자애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자애로서 온전히 성취하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수행은 자애심 속에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임. 그외는 기술적, 기능적인 것임. 인간은 기억속에 입력된 정보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임. 따라서 이러한 자애심의 단련으로 염오심을 줄여나가 다르마를 보는 것임. 그래야 마음이 보리수 아래서 아파마나를 하는 것임.

 

오늘은 불교 수행에 대해 이야기 하였음. 수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금 얘기되는 수행의 문제가 왜 지엽적, 기능적인 것인지를 조금 살펴 보았음. 경인년의 마지막 일요법회임. 다가올 신묘년 새해 항상 건강하시고, 복된 삶 되시기를 기원드림. 나는 통이 좁아서인지 붓다처럼 마음이 넓지 못해서 모든 분들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음.                          

 

 

  * 안반수의경,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수행 여섯단계

 

        수식 : 마음과 숨이 서로 따르도록 숨을 고릅니다.

        상수 : 마음과 숨이 서로 따르고 거친 마음들이 누구러 집니다.

         지   : 마음이 고요히 멈춥니다 심일경 삼매입니다.

         관   : 오음의 인연을 관합니다. 위빳사나를 행합니다.

         환   : 오음에 대한 집착을 버립니다. 악이 되돌아갑니다.

         정   : 탐진치가 소멸하고 해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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