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본질과 의미 / 고우스님

2018. 9. 15. 15: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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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선의 본질과 의미  (고우스님)


“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이렇게 물으면 저는 “양반이 왜 상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선은 우리가 논의해서 말로 하거나 들을 때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달은 분이 선의 본질을 드러내 대중에게 설법함에,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옥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습니다.

즉, 법을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닫는 사람도 마찬가지 라는 게 선입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라 하고 삶이자 사실이고 본래 모습인데, 여기에는 닦는다느니 증득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군더더기이며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 꼭 해야 하는가? 여

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내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부처요 불성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열반경>과 <아함경> 등 많은 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를 믿지 않으면

허송세월 하기 십상입니다.


불성이 내 몸의 일부에, 잡초 속의 금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여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우리는 다 부처님입니다.

뒤에 계시는 불단 위의 부처님도, 이 마이크도 컵도, 이 법당도 다 부처님입니다.

물론 이해없이 믿는 것은 맹신의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왜 부처인지 알면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이자

공이기에 무아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본래 성불’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다른 종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지만, 선종은 진리와 사실 그자체인

달만 인정하기에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간화선 수행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지만, 그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집중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간화선은 서기 1000년 전후 대혜 스님이 주창했습니다.

그 이전 250여년전 마조 스님 시대에만 하더라도 ‘의심하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스님 당시엔 어떻게 의심했을까요?


어느 날 늑담법회 스님이 마조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법회 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上堂)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 스님은 여기서 바로 깨닫고 말했습니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습니다.


마조 스님은 법회 스님에게 여럿이 있을 때도, 단 둘이 있을 때도 ‘무엇이 선인가

(祖師西來意)’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연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분별심을 떠난 존재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 스님은 밤새도록 큰 의심을 낸 후 다음 날 질문했을 겁니다.

요즘 선사라면 “모르면 의심해라. 그리고 해답을 가져오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은 자연스럽게 의심을 돈발시킨 것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고,

답을 몰라서 저절로 의심이 드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서장>의 저자인 대혜 스님도 무턱대고 의심하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 들라 한 게 아닙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분별을 초월한 것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법회 스님이 마조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초음파, 즉 ‘뭐’ 하는 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주객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이게 공부이고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식의 그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입이다. 그러니 선종은 철저히 상대 개념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기브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떤 고정관념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거지요.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됩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지혜광명입니다. 그래서 이 공(空)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평등하고 편안하게 끄달림도 없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성불’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 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에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알고 공부하면 내생에는 그 힘으로 재수하지 않고 합격할 수

있으니 효봉 스님과 같은 대 발심을 내어 정진합시다.


고우 스님의 수행법


고우 스님의 수행법은 ‘닦을 것이 없음을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단박깨침(頓悟)을

강조하는 정통 조사선, 즉 최상승선의 입장이기에 따로이 수행법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구지 설명하자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공부로 요약된다.


“<선요>에서는 물을 져다가 우물에 붓듯이, 물에 비친 달 건지듯이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우물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더 차지 않고,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건지려 해도 얻어지지

않듯이 깨달을 것이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그놈이 하는 일이니, 집착만 세탁해 버리면 됩니다.”


고우 스님은 여러 수행법을 닦더라도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꼭 믿고 해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참선뿐만 아니라 봉사, 주력, 염불도 좋다. ‘본래 성불’임을 믿고 근기에 맞게 공부하되

주의할 점은 자기를 비우고 쉬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고우 스님은 선(禪)은 부처님의 오리지널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육조 스님의 제자인 영가 스님은 사마타를 ‘적적성성(寂寂惺惺)’, 위빠사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표현했습니다.

6바라밀 수행과 염불, 주력, 참선 등의 모든 수행법이 ‘적적’과 ‘성성’을 강조합니다.

‘성성’은 혼침(昏沈, 조는 것)하지 않는 것이며, 적적은 ‘도거(掉擧, 망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외도는 적적(寂寂)만을 강조해서 삼매에 들면 모든 행위가 정지되지만, 불교 삼매(三昧)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고우 스님이 <육조단경> ‘정혜불이품’ 에 “정혜(定慧)가 하나가 되더라도 도가 아니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안목이 열린 것도

정(사마타)과 혜(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묻고 답하기’ 현장


고우 스님의 법문이 끝난 후 바로 즉문즉답(卽問卽答) 시간이 이어졌다.
한 50대 거사가 일어나 질문했다. “아뢰야식(제8식)은 자성(自性)과 같습니까. 다른 것입니까?”
고우 스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아뢰야식과 자성은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 효능면에서는 다릅니다.

아뢰야식, 이 정도만 알아도 담담해서 악한 생각과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뢰야식을 보고 착각해서

공부를 멈추고 맙니다.”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30대 거사의 두번 째 질문은 더욱 난해했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여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입니까?”


고우 스님은 두 번째 질문에도 주저없이 답변했다.
“세계의 학자들이 한평생 연구하는 분야가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라는

‘윤회와 무아’에 대한 주제입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평생 몰두하지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윤회의 주체는 아시다시피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역시 연기된 현상이기에 이 윤회하는 식 역시, 무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된 것이기에 무아(제법무아)’라고 하셨듯이 전혀

이론적으로 상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이 공이자 연기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컵을 들며) 여러분은 이것이 꽉 찬 걸로 보이겠지만, 이 컵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세 번 째 역시 50대 거사의 질문. “스님께서는 의심을 내기 위한 의심은 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참 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래성불인 그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의심이 필요하겠지요.

<선요>에서도 대분심, 대의심, 대신심을 공부의 필수요건으로 말했지만, 이를 다

갖추더라도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져 있는 꼴입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도록 용맹정진해도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대는 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큰 의심이 든 것이고, 이걸 깨치면 성불입니다. 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대는가를 알면 얻은 게 없이 이미 다 갖춰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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