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무자성과 진화|******@불교의우주론@

2018. 11. 25. 10:16일반/생물·과학과생각

728x90


<47>무자성과 진화

‘콩심은데 콩나고’영원불멸 믿는 창조론
‘모든것 변한다’제행무상 진화론적 사고

인간은 대개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내 앞에 놓여있는 책상을 보면서 이것은 누가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것이 인조물에 대한 질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질문이 생명에 관한 것이 되면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왔겠지만, 생명의 근원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을 얻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우선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인조물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가설이 될 것이다. 이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도 역시 우리와 같은 형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화는 많은 경우 이러한 창조를 가능케 한 우주의 원리라든가 아니면 궁극의 인격체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상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이른바 진화론이라는 것이 대두되면서 그동안 창조론에 묶여 있던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인류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 그것은 우선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라는 말이 있다. 만약 이 명제가 절대적으로 참이어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무한히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궁극적인 조상도 틀림없이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창조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선다. 진화론은 우리의 먼 조상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이는 위의 우리 속담도 근사적으로만 참일 뿐 절대적으로 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몇 천년 혹은 몇 만년이라는 시간의 영역에서 보면 위의 속담이 참일 수도 있지만, 보다 장구한 시간에서의 변화를 본다면 결코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우리 주변에서 관찰되는 (콩 심은 데 콩이 난다는) 상황을 어디까지 참인 것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기준으로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의 유한한 관찰 경험을 근거로 하여 얻은 명제를 (때로는 심지어 우주의 시작인 시점까지) 무한 확장하여 주장한 것이 창조론이라면, 이렇게 얻은 귀납적 명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진화론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비시켜 보자. 내 앞에 수평하게 놓여 있는 책상 위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은 정지하여 있게 된다. 이 때 그 책상은 반드시 반듯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명제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유한한 관찰 경험에서 얻은 명제는 무한한 공간에서 참일 수 없다. 지구가 둥글므로, 물방울이 움직이지 않는 아주 큰 책상은 지구의 표면 모습과 같이 둥근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한한 관찰 경험에서 얻은 명제는 모두 이와 유사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물도 불변하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셨다. 이것이 제법무아요 제행무상이다. 이 원리는 하나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도 물론 성립하는 것이지만 전우주를 통시적으로 고찰해 볼 때 더욱 분명해지며, 그 한 예로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흐름 즉 유전의 경우에서도 역시 성립한다. 콩 심은 데 콩난다는 관찰에 의하면 콩의 속성은 하나의 개체가 죽더라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시야를 확대하여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진화론은 보여 준다. 생명을 시간의 영역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관찰한다면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 나고 유기물에서 원시적인 생명이 생겨나며 이 원시 생명에서 무수히 다양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에 어떤 자성이 있어서 하나의 개체가 죽더라도 그 속성은 영원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창조론은 사물에 자성이 있는 줄 알고 그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그릇된 견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