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법문 / 대우거사

2019. 1. 6. 12: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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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법문 一乘法門


1.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는 불교의 근본이다


불교는 스스로의 마음(自性)을 밝혀서 참 성품(眞性)을 공부하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나왔으며 ‘오직 마음뿐’(一切唯心造)입니다. 그 마음은 여여(如如)해서 항시 고요히 비출(寂照)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다의 파도처럼 고뇌의 연속입니다. 마치 저 바다가 종일 파도가 치는 것처럼.... 그러나 바다(물)의 겉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같지만 오고 가는 일이 없고(不來不去) 본체인 바다는 늘고 주는 일이 없으므로(不增不減)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의 참된 성품바다(一眞性海)’라 부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인연 따라 수많은 번뇌의 파도를 치지만 그 본체는 전혀 변함이 없이 신령스런 빛(神光)을 발할 뿐입니다.

바다는 만파로 물결치지만 성품과 모습은 고요함과 움직임이 둘이 아닌 상태로 유지하면서 생겨나고 없어지거나(生滅) 늘거나 주는(增減) 일이 없이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常住)’.

우리의 삶 역시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 설키면서 생멸을 연출하면서 파도치고 있지만 이 세계의 실상(實相)은 바람이 일어 파도가 치거나 말거나 변하지 않고 진실되어 생멸하지 않으므로 파도(이 세상의 변천하는 모습)는 다만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일체 만 가지 존재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으며 오고가는 법이 없는(不生不滅 不來不去)진리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 순간 인간이 진실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지를 불가(佛家)에서는 부동지(不動地;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음) 혹은 동진지(童眞地; 어린이가 처음 진실상(眞實相)을 깨닫는 것 즉, 참된 지혜가 열리는 순간)라 합니다


천재 물리학자 코페르니쿠스는 300년 전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2500년 전 ‘모든 존재가 존재인 채로 존재가 아니고, 모든 움직임이 움직임인 채로 움직임이 아니다’는 진리 즉, 모든 실상은 생사가 없고 오고감이 없으며 허깨비요 물거품이며 산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날도 믿으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2. 본래 무명(無明)도 부처도 없음을 알면 이것이 곧 불과(佛果)이다.


‘일체 만유(萬有; 만 가지의 존재)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뿐이며 그 자체로는 고유의 성품이 없다’는 것이 연기설의 근본이다.  어떤 물건이 성품이 없다면 그 물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같은 것들과 어울려 한 물건이 생긴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불생불멸의 이치로 우리들은 인과(因果)가 아닌 것을 인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이 <지금 있는 그대로>가 온전한 불과와 같아서 조작하고 닦고 할 것이 없는 온전한 부처인 것을 알면 바로 그 몸에 부처의 종자를 심어 두는, 즉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邊正覺; 처음 발심할 때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3. 무명과 부처가 본래 없음을 알면 깨달은 사람이다.


죽고 사는 문제(生死問題)는 인류 역사이래 줄곧 다루어 왔다.

특히 적자생존(適者生存; 적응하는 자만이 생존하는 것)의 현실에서 생사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인데 이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다면 매우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세상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생멸이 없고 가고 옴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서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고리(因緣)가 끊어지고, 인과법의 전후관계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서,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적 차별도 소멸한 세계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차별적인 현상계속에서 아무런 갈등과 충돌도 없이 무애자재(無碍自在;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음)한 삶을 살수 있는 일승법계의 깨달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도 현재 모두 그와 같은 세계(열반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범부(凡夫)들은 생멸도 생사도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요하고 청정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중생의 업식(業識; 그동안 지어온 업장) 때문에 업의 그림자(業影)를 실다운 존재인줄 착각하고 집착하여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꿈에서 깨기만 한다면(무명이 본래 없고 중생도 부처도 모두 없다는 것) 바로 발심한 것으로 무명을 깨친 부처, 보리가 되어 편안한 잠자리(涅槃)에 들 수 있을 것이다.


 

4. 일승(一乘)의 도리는 결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로는 알 수가 없다.


중생이란 어지러운 번뇌의 세상에 휘말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고, 번뇌를 벗어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는 것을 삼승(三乘; 聲聞 緣覺 菩薩)이라 한다. 그러나 일승보살은 일체만유가 모두 허망하여 실다운 존재가 없어 가없이 광대한 이지(理智)의 바다에 노닐면서 참과 허망이 하나의 참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허망을 버리고 참을 구하고 속(俗)을 벌고 진(眞)을 취하는 양변(兩邊)을 지향하겠는가?


그러므로 일승 보살은 물결이 바로 물이듯이 속이 바로 진이므로 <짓되 지음이 없는 참된 도>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진만을 쫓거나 절학무위(絶學無爲; 배움이 없고 함이 없음)를 옳다고 여기면 닦는 자나 닦지 않는 자나 모두 진리를 등지는 것이니 어느 세월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사성제(四聖言+帝; 苦集滅道)를 닦는데 있어서도 -

1) 고(苦)를 보는데 있어서도 고가 그대로 道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항시 이것을 싫어하여 멀리할 것을 생각하며,

2) 집(集), 즉 번뇌를 끊는데 있어서도 번뇌가 본래 난 일이 없다는 것(無生)을 알지 못하고 , 항시 그것이 일어 날까봐 두려워하며,

3) 멸(滅), 즉 열반을 증득하는 데 있어서도, 오직 치우치게 함이 없음에만 머물려고 집착하면서 함이 없음이(無爲) 그대로 함이 있음(有爲)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4) 도(道)를 닦는데 있어서도, 오직 구원만을 논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그대로 불과를 얻는 유일한 길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승 보살은 자기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법계 허공계에 가득하여 항상 사물에 감응하되 왕래와 중간이 있으므로 누진통(漏盡通; 번뇌가 다한 신통)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들은 세간법(世間法; 세상법)을 행하고 삼승은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행하지만, 일승보살은 세간도 출세간도 아니니, 곧 세간을 떠나면서 모든 차별 법을 자재하게 굴리되 전혀 걸리는 일도 없고 물 드는 일도 없다.

세간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思議法)으로 소득이 있음(有所得)이므로 삼승의 법이나, 일승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不思議)이니 무소득이며 고요와 걸림이 없어 대자재(大自在)한 것이다.


오직 오래도록 무심(無心) 무념(無念)의 생각 없는 경지에 있으면서 마침내 고(苦)를 싫어하지 않게 된 자와, 고요함에 머무르지 않는 자와, 지금 이대로 이 세상이 곧 항구불변하는 해탈 열반의 청정한 불국토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이 일승의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5. 닦는 자도 닦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이 그대로 '부처'여서, '마음' 밖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체달한보살이라 해도 저 바깥에는 여전히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온갖 잡다한 것들이 마구 우쭐우쭐 하면서 여전히 '내 마음'을 붙잡고 말끔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수행자들은 이 쫓아도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경계'를 말끔히 털어 버리기 위해서 더욱더 '공(空)한 도리'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공해탈'(空解脫)을 추구하는 권교보살(權敎菩薩)이고, 또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바라는 이른바 정토보살(淨土菩薩)인 것이다.

 

 그러나 일승보살(一乘菩薩)은 결코 <마음 밖에 한 법도 없는 경지>를 증득(證得)하는 일은 없다.  마음 밖에 법이 있건 없건, 또한 그것에 홀리건 홀리지 않건 간에, 그 모두가 오직 참된 '한 마음'에 의해서 운용(運用)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꿰뚫어 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평등하고, 어느 것 하나도 '불법'(佛法) 아닌 게 없는 것이다. 즉, 어지럽기 그지없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이 바로 '정토'요, 「저의 국토는 안연(晏然; 편안함)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자가 충국사(忠國師)에게 물었다.

『 경에 이르기를, 「온갖 법이 모두 '불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살생'(殺生)도 '불법'입니까?』하니, 국사가 대답했다. 

『 온갖 하는 일은 이 모두가 '부처 지혜'의 작용이니라. 마치 사람이 불을 태울 때, 불이 향기로움과 나쁜 냄새를 가리지 않는 것과 같고, 또한 물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이 이 모두가 '부처 지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법을 취하여 분별을 내면서, 항상 '훌륭한 일', '선한 일'만을 옳은 것으로 삼고 이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세간법일지언정 결코 '마지막'(究竟)은 아닌 것이다.

 '일승법문'(一乘法門)은, 먼저는 홀렸다가(有漏) 뒤에 가서는 홀리지 않게 되는(無漏), 그런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개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첫째로, 범부는 늘 바깥 경계에 홀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둘째로, 이승(二乘)은 저 바깥의 모든 경계가 그림자처럼 허망한 것인 줄 깨달아서 철저히 이것을 쓸어내고,

셋째로, 보살(菩薩)은 '빈 것'도 또한 '빈 것'이 아니라고 하나,

부처 지혜의 경지에 이르면, 대경(對境)이 있건 없건, 또 그것에 '홀리건' '홀리지 않건' 이 모두가 오직 '마음의 광명'일 뿐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치 태양이 한낮(中天)이 되자 뭇 별이 그 모습을 감추듯 도무지 말이나 생각으로 헤아리고 더듬고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임제선사(臨濟禪師)에게 지방장관인 왕상시(王常侍)가 찾아왔다.

왔던 김에 둘이서 함께 승당(僧堂)에 들어가 구경을 하게 됐는데, 이 때 왕상시가 묻기를,

 『 이 한 방의 중들이 경(經)을 봅니까?』

 『 경을 보지 않소.』

 『 좌선(坐禪)을 하는가요?』

 『 좌선도 하지 않소.』

 『 좌선도 하지 않고, 경도 보지 않으면 저들은 무엇을 합니까?』

 『 저들로 하여금 모두 성불하고, 조사(祖師)가 되게 하려고 하오』

그러자 왕상시가 말하기를, 

 『 황금 부스러기가 비록 귀하기는 하나, 눈에 들어가면 티가 됩니다』

하니, 선사가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 내가 그대를 속인(俗人)인 줄로만 여겼었느니라』 했다.



 6. 일승보살의 단덕(斷德)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본적으로 끊어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불법에 인연을 맺고 수행을 시작했다는 사람들마저도 늘 그것을 끊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번뇌가 본래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늘 번뇌를 끊고 억누르려고 하며, 그 번뇌를 잘 조복하여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유위행(有爲行)이요, 인과법(因果法)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다.

일승보살(一乘菩薩)은 온갖 법의 성품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옳은 법이건 그른 법이건, 깨끗한 법이건 물든 법이건, 특별히 끊어야 할 만한 법도, 붙잡아 간직할 만한 법도 없는 것이다.

즉 과거․현재․미래를 통해 도무지 끊어야 할 만한 법이 없으니, 이는 온갖 법이 성품이 없고 머무름도 없이 모두가 한 성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참된 끊음'이란 예전에는 속박되어 있다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것을 끊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지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 삼시를 통해 도무지 끊을 법이 없게 되었을 때 이것이 '영원한 끊음'이요, 바로 「일승보살의 단덕(斷德)」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끊는 것도 보지 않고, 끊지 않는 것도 보지 않아, 끊고 끊지 못하는 양변을 모두 보내고, 보냈다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않을 때, 이것을 비로소 '끊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승법의 요체(要諦)이다.

 어떠한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유위행을 훌쩍 넘어서서, 지금 여기에서 당장 있는 그대로인 채로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돈증법(頓證法)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닦은 자가 있고 그 닦음으로 해서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유위법이요, 생사법(生死法)일 뿐이니 참된 증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증득해 얻되, 얻은 바도 이룬 바도 없는 것, 이것이 참된 증득인 것이다.



7. 일승보살은 초발심에 불과를 얻는다


 사람들은 보통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기를 바란다. 그것은 마치 흙탕물을 가만히 정지상태로 둠으로써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물이 드러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 고요히 가라앉은 듯 보일 뿐 다시 흐려지고 만다.

뿌연 흙탕물 상태이건, 앙금이 가라앉아 맑아진 상태이건 또, 앙금을 말끔히 제거하여 다시는 흐려지지 않는 상태이건, 그것이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멸하는 허망한 그림자 놀음’이라는 안목을 갖춘 것이 일승보살인 것이다.

 

그들은 삼계(三界; 欲界, 色界, 無色界) 자체가 모두 빈이름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각의 있고 없음을 넘어서서, 무심(無心)이랄 것도, 무념(無念)이랄 것도 없는 그런 경지에서 고요히 그 모든 것을 비출 수 있는 적조(寂照)의 경계가 나타나야 그때 비로소 본래의 청정한 성품이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일승법(一乘法)은 그 어디에도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어서, 심상한 방법을 통해 현재에서 인행(因行)을 닦고 그 과보로 훗날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그러한 사회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발심(發心)한 처음부터 불과(佛果)를 얻어 본래부터 만법 밖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새로이 벗어나기를 도모하지 않으며, 벗어남과 벗어나지 못함이 모두 고요하여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의 나툼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것이 돈증법(頓證法)인 것이다. 이 길만이 잠잠히 소리 소문 없이 부처의 땅을 밟는 길이니, 인(因)을 닦아 과(果)를 추구하면 한 순간 유위행(有爲行)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위행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유위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조촐한 마음으로 <무심 무념의 삼매>에 들어서 모든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인 채로 담담히 바라보며 거듭 삼가면서 조촐히 가야 하는 것이다.


9. 일승법은 공덕의 이익을 쫓지 않는다


 수행자가 공통적으로 갖는 바램은 지금 현재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덕을 쌓아서, 그 결과로 훗날 보다 높고 그윽한 경지, 즉 온갖 걱정도 번뇌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지금은 괴롭고 답답한 마음이었다가, 나중에 가서 벗어나서 깨끗한 마음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항상한 깨끗함'(常淨)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결코 '항상한 법'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참된 법'은 결코 그 자신을 바꾸어서 '다른 것'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범부'를 바꾸어서 '성인'의 경지를 넘본다면 전형적인 생사법(生死法)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생사법으로는 해탈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공덕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는 결코 '보리심'을 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이란 티끌 하나 바랄 것 없는 마음이며, 법의 '본래 법'은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닌 것>이므로, ― 안으로는 그 '마음'이 바랄 것이 없고, 밖으로는 온갖 법이 성품이 비어서 구할 만한 것이 없으니, ― 안팎이 가지런히 허공처럼 비어서, 설사 공덕을 얻은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마음 밖에서는 법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평상한 매일매일의 삶에서 지금 현재의 '이것'을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저것'으로 바꾸려는 모든 유위행은 당장 쉬어야 한다.

 그저 괴로우면 괴로운 채로, 즐거우면 즐거운 채로, 이 모두가 본래 스스로 '성품'이 없어서 허공과 같은 '참된 하나'에 의지하여 있는 또 다른 여러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저것'으로 바꿀 까닭이 어디 있겠으며, 또 설사 애써 바꿨다 하더라도, 본래 성품이 비어서 허깨비 같은 온갖 법들 가운데서 어찌 '이익이 있고', '이익이 없음'을 가리겠는가? 바다에 이는 어느 물결이 단 한 순간이라도 그 바다를 여읜 적이 있겠는가?


 지금 목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다만 '참 성품'(眞性)의 응현(應現)일 뿐이라는 걸 철저히 사무쳐서, 조작함도 대처함도 없이 그저 '고요히 비추는 것'(寂照)으로 족한 것이다. 공덕이 있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바라고 구해야 할 공덕이 없다는 생각도 놓고, 그저 그렇게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담담히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일승의 도'를 가장 잘 지어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10. 마음으로서 마음을 구하지 말라


 비록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무심(無心)>이란 말이 있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와 유사한 말들은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수많은 선사들이 그리도 강조해 온 <무심>에 대해서 수행자들마저도 그 말의 참뜻을 깊이 새기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번뇌로 시달리는 마음을 비워서 '무심한 마음'으로 바꾸고, 또 '시끄러운 마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고, '물든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는 등의 말은 흔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초발심일 때에 관심을 가질 법한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마땅치 않은 마음'을 '마땅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했을 때 하는 말이다.

 

<참 마음(眞心)>이야 본래 허공처럼 비어서, 물드는 일도 없고 따라서 깨끗해지는 일도 없으며, 또한 늘 스스로 고요해서 맑고 깨끗하니, 다시 무슨 조작을 기다릴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누구나 흔히 쓰기 좋아하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은 "마음을 비우려는 노력"을 통해서 <마음>을 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능히 비울 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참 마음>이 아니라, 망심(妄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자기의 본래 여여한 <참 마음>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망령된 마음'을 조작해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유일한 수행인 줄 잘못 알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이 보통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실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 비친 업의 그림자인 것이다. 즉, 늘 여여하고 청정한 <본래의 마음>이 인연을 따르면서,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비치듯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허망한 그림자에 '뜻'이 있고 '힘'이 있어서 <마음>을 능히 비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옛 선사들도 한결같이 말하기를, "다시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 천만겁을 지나도 결코 얻지 못하리라. 바로 그 자리에서 당장에 '무심'한 것만 같지 못하리니, 이것이 바로 '본래의 법'(本來法)이다" 라고 경책 했던 것이다.

 

 <마음>이 곧'부처'요, '도(道)'요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니, 지금 현재 우리들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모든 작용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나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견문각지인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바다와 물결이 둘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났다는 사실을 깊이 사무쳐 알았다면, 그 무엇에도 집착할 일이 없는 것이요, 집착할 일이 없으니 그 때야 비로소 조금은 "무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거듭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결코 '진정한 무심'은 애써 노력한 보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노력해서 안 되는 것 같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안 된다. ― 해도 안 되고, 하지 않아도 안 되는, ― 바로 그 자리에서 문득 활로를 얻어야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깊이 살펴야 한다.

 

 그 '마음'이 '무심'에 들었는지, 아직 '무심'에 들지 못했는지를 분별하지도 말고, '무심'도 '무심 아닌 것'도 보지 않고, 내내 이렇게 그 마음의 흐름을 담담히 비출 수만 있다면, 머지않아서 당신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닌, 바로 그 '무심'이 어느 날 문득 당신 앞에 나타날(現前) 것이다.


 여기 "마음공부"에 대한 달마대사의 게송 한 수를 소개한다.


<부처>를 구하려거든

다만 <마음>을 밝힐지니

단지 <마음 그대로의 마음>이 곧 부처니라.


나, 

<마음>을 구하려 하지만

마음은 <마음> 스스로가 본래 아나니

<마음>을 구하려면

마음으로 알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부처의 성품은

마음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문득 일어날 때가 죄가 생기는 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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