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불이사상

2019. 5. 12. 12: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원효의 불이사상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462006․제4  투고일: 2006810/심 사 일 :

2006930일 게재결정일 : 20061012

  

원효의 불이(不二) 사상*

- 둘 아닌 존재 지평과 실천 -

 

1)박태원(울산대)

 

 

[한글 요약]

원효가 추구하는 불교적 진실은, 세속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되는 인식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반성하여

해체한 후, 새로운 인식과 가치(지혜와 자비)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은 비판과

해체의 대상으로서 일단 부정되게 된다. 세속적 인식과 가치에 동의하지 못하여

 그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는 사람에게, 세속은 싫어하고(厭離) 벗어나야 할()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아직 불교적 진실에 부합하는 단계가 아니다.

세속에 대한 비판과 해체의 의지로써 출발하여 마침내 세계를 진실대로 파악하게 된 자,

진실대로 보는 지혜(如實智)에 의해 진리다운 인식과 가치를 새롭게 구성한 자에게,

세속은 이제 부정의 대상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 채 포섭된다.

모색과 추구의 단계가 아닌, 성취와 체득의 경지에서 본 세속과 진실의 새로운 관계를,

원효는 ‘둘 아님(不二)’으로 포착해 낸다.

 

세속을 비판과 해체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부정의 단계에 머물 때는, 중생 구제의 염원이 자연스럽게

솟아나지 않는다. 부정해야 할 세속()과 실현해야 할 진실()이 분리되는 단계에서는,

세속에 몸담은 중생을 ‘내 몸처럼 여겨 위할 수 있는 마음(同體大悲)’이 필연적일 수 없다.

반면, 세속 비판과 그 해체 작업에 성공함으로써 그로 인해 체득된 진실에 입각하여 새로운 존재 지평을

열게 된 자에게는, 부정의 대상이었던 세속과 성취된 진실이 ‘둘 아닌’ 관계로 통합된다.

 

허망한 세속()과 진리의 세계()를 이처럼 ‘둘 아닌(不二)’ 관계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한 몸으로 여겨 펼치는 위대한 동정심(同體大悲)’에 입각한 중생 구제의 염원을 일종의 존재론적 필연으로 갖추게 된 원효는, 자신이 지니게 된 그 새로운 세계 인식을 불이(不二)의 논리로 펼친다.

 그에게 있어 ‘둘 아님’의 도리는 존재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중생 구제의 보살행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불이(不二)의 존재 지평은 중생 구제의 염원()과 실천()을 수반하는 것이다.

주제분야 : 불교철학, 원효, 불이

주 제 어 : 둘 아닌 존재 지평, 둘 아닌 실천, 진속불이, 일심, 화쟁

* 이 논문은 2005년도 울산대학교의 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불이(不二)의 불교적 연원과 원효 사상

불이(不二, non-dual 의 어원인 팔리어 advaya에서 dvaya는 ‘두 가지 의’(Sutta-nipata 886, Dhammapada 384 )와 ‘거짓의’(Vinaya .21)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1) advaya는 그 부정형으로서 Digha-Nikaya(, 268)에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것이 아닌 것,

 

두 가지의 평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2) 주로후기 대승불교에서 애용되었던 불이(不二)라는 용어는

‘둘로 보지 않아야 진실된 것’이라는 의미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은 dvaya

두 가지 의미를 결합시켜 전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불이의 불교사상적 연원은 실체적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無我)사상임이 분명하다.

존재를 고정 불변의 자립적 개체로 이해하려는 실체적 존재론은, 불변의 본질을 지니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위해 그 어떤 타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독자성도 지니고 있는 존재를 상정하기에,

존재 상호간의 본질적 분리를 그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삼는다.

각기 고유의 변치 않는 본질을 지닌 실체들의 존재론적 격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체적 존재론은 ‘나’와 ‘남’․‘주체’와 ‘객체’․‘정신’과 ‘물질’ 등의 이원적 분열을 존재 파악의

기본 구조로 설정한다.

자립적 실체들의 이항(二項) 대립에 의거하여 존재와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통찰은 이러한 실체를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구성이라고 비판한다.

불변의 본질(自性)을 지닌 독자적 실체는 실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나 심리적 요청에 의해

설정된 가공일 뿐이다. 초기불교의 오온(五蘊) 무아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체가 아닌 관계의 구

성물이라는 점을 밝혀, 인간 내면에 거의 본능처럼 뿌리내린 실체 관념을 해체시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다섯 부류 현상 다발들의 상호연관물인

동시에, 그 연관된 현상 다발들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이 어느 때부턴가 거의 본능적 느낌처럼 축적시켜 온 실체적 자아 관념의 토대 자체를 와해시킨다.

 

무지의 가공물인 실체 관념이 해체될 때 드러나는 세계의 진실(實相), 불교는 무아(無我)나 공()

그리고 연기(緣起)의 언어와 논리로 포착해 낸다. 그럴 때 실체 관념에 의해 배타적으로 분열되었던 세계는, 불가분의 상호 의존적 관계로 한 몸처럼 만나 소통하게 된다.

1) Rhys Davids, William Stede, Pali-English Dictionary(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79),

332. Sutta-nipata, Dhammapada, Vinaya는 모두 PTS 간행본에 의한 것임.

2) 中村 元, 佛敎語大辭典(東京書籍, 1982), 1171.

실체적 자아 관념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작위적 분별의 경계를 지어가지만, 실체 관념에서 해방되어 존재를 진실대로 보는(如實知) 무아(無我)나 공()의 통찰은 실체 관념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축되었던 분별 가공을 해소시키고, 세계를 분열되지 않는 관계의 한 몸으로 만나게 한다.

이처럼 존재와 세계가 실체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무실체의 관계물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호가

바로 불이(不二)이다. 불이는 무아․공․연기의 도리에 의해 드러나는 무실체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된 언어라 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무실체적 이해를 표현하는 불이(不二)라는 언어는 후기 대승불교에서 특히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세간과 출세간을 이원적으로 분별하려는 출가자 우월주의가 비()불교적 발상이라는 점을 역설하며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한 수레에 태우려는’ 대승적 문제 의식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불이(不二)라는 용어에 끌렸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재가 수행자인 유마힐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 대승적 문제 의식과 통찰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는 유마경, ‘둘아닌 진리에 들어가는 품(入不二法門品)’을 설정하고 있을 정도로 불이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둘 아닌 진리에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를 말해 보라는 유마힐거사의 요구에, 생과 멸을 둘로 보지 않는 것(법자재보살)․아()와 아소(我所)를 둘로 나누지 않는 것(덕수보살)․더러움과 깨끗함을 둘로 분별하지 않는 것(덕정보살) 등 여러 보살들의 대답이 이어지고 난 후, 문수사리보살은 “모든 언어적 문답을 여의는 것이 ‘둘 아닌 진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유마힐거사의 견해는 어떠한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유마힐은 묵묵히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으로 응답하였고, 이러한 유마힐의 ‘말없는 대답’이야말로

진정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문수사리보살의 찬탄이 이어진다.3) 생과 멸, 주관과 객관, 오염과 청정을 실체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배타적으로 이원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불이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라고 응답하는 여러 보살들의 견해에 대해, 문수사리보살과 유마힐거사는 이 실체적 이원화의 토대가 바로 언어라는 관점을 부가하고 있다. 특히 유마힐거사의 침묵의 응답은 중생들의 언어 관념에 내재한 실체적 분별의 업력에서 해방된 경지를 드러내는 법문이자, 언어 분별의 덫을 통상적 언어 방식이 아닌 침묵의 언어 방식을 통해 생생하게 일깨워주는 탁월한 법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불이 사상과 논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원효(元曉617-686)이다.

3) 유마경 「입불이법문품」, 신수대장경 14pp. 550-551.

원효의 저술에는 자신의 불교적 안목과 성취를 ‘둘 아님’이라는 말에 담아내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불이가 원효 사상을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원효는 즐겨 ‘둘 아님’이라는 말에 자신의 불교 이해와 성취의 핵심을 담아내고 있다. 불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펼쳐지는 원효 사상의 면모를, ‘둘 아닌 존재 지평(不二의 존재론)’과 ‘둘 아님의 깨달음’‘ 및 ’둘 아닌 실천(不二의 보살행)’으로 대별하여 음미해 본다.

 

2. 둘 아닌 존재 지평

- 불이(不二)의 존재론 -

 

인간 존재의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완성, 그 차원 높은 존재 해방의 경지를 원효는 즐겨 일심(一心)이라는 말로 드러낸다. 또한 원효는 모든 불교 이론들을 포섭적으로 소통시키고 인간 세상의 불필요한 다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길을 힘써 모색하고 있는데, 그 화쟁의 원천에는 모든 쟁론의 인식적 토대에서 해방된

마음인 일심이라는 존재 지평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과 사라짐()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가 없으며(無生無滅) 일체의 인위적 구별이 원천적으로 해체된 상태(本來寂靜)이니, 오직 一心이라 할 경지이다.() 되거나 脫俗한 모든 것들의 참 모습은 ()이니 脫俗()이니 하는 분별이 없는 것이고, 참된 眞如의 체계(眞如門)니 그릇된 분별의 왜곡 체계(生滅門)니 하는 것도 근본에 입각해 보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라는 말을 붙인다. 동시에 이 이원적 분별과 분리가 해체된 진실의 경지는 허공과는 달라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인가?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무슨 말을 붙여야 될지 알 수 없는데, 억지로나마 <한 마음(一心)>이라 불러 본다.4)

“저 일심의 근원은 를 떠나서 홀로 맑으며, 三空의 바다는 을 융합하여 깊고 고요하다. 깊고 고요하게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며, 홀로 맑아서 양변을 떠나 있으나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 양변을 떠났으므로 가 아닌 법이 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하며, 가 아닌 에 나아가 머물지 아니한다.

4) 대승기신론소, 한국불교전서(이하 한불)1-704-705.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므로 이 아닌 가 애초에 이 된 적이 없으며, 이 아닌 理가 애초에 이 된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의 자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양변을 떠났으면서도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의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바가 없고, 옳고 그름의 뜻이 두루 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와 같이 깨뜨림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요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경의 大意이다.5)

 

원효는 이 일심의 존재 지평에서 이설(異說)과 쟁론들을 회통, 화쟁하는 국면을 일미(一味)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쟁론들을 일미(一味)로 화쟁․회통하는 일심의 존재 지평은 다름 아닌 ‘둘 아님(無二)’의 통찰에 의해 확보된다.

(열반경) 여러 경전들의 부분을 통괄하여 온갖 물의 흐름을 (바다의) 일미로 돌아가게 하여 부처님의 뜻이 지극히 공정함을 열어 보이어 백가(百家)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해하였다. 그리하여 시끄럽고 시끄러운 사생(四生)들로 하여금 모두 무이(無二)의 참된 성품(實性)으로 돌아가게 하고, 어둡고 어두운 긴 잠에서 다 함께 대각(大覺)의 궁극적 경지(極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궁극적 경지의 위대한 깨달음(極果大覺)’이라 함은 참된 성품을 체득하였으면서도 체득했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이고, ‘참된 성품이 둘이 아님(無二)’이라 함은 참됨과 허망함을 혼융(混融)하여 하나인 것이다. 이미 ‘둘이 아님(無二)’이라 하였으니 무엇을 ‘하나’라 하겠으며, ‘참됨과 허망함을 혼융’하였으니 무엇을 ‘참된 성품’이라 하겠는가? 이것은 곧 이()와 지()가 모두 없어지고 명()과 의()가 모두 끊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열반의 현묘한 뜻이라 한다.

다만 모든 부처님은 이 ‘열반의 현묘한 뜻’을 증득하시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어 응하지 않은 데가 없으시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한다. 현묘한 뜻이라 할 것도 없으나 일찍이 고요하지도 아니하였고, 지극한 가르침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설하신 것이 없으니, 이것을

()와 교()의 일미(一味)라고 한다.6)

 

“관행이라는 것은, 은 횡으로 논하는 것으로서 에 통하고, 은 종으로 바라본 것으로서 에 걸쳐 있다. 五法이 원만함을 말하는 것이고, 은 六이 잘 갖추어짐을 말하며, 는 곧 本覺始覺의 두 깨달음이고, 은 곧 이 없어진 것이다. 함께 없어졌지만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두 가지로 깨달았지만 생긴 것이 없으니 …… 이와 같은 를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는 둘이 아니라 오직 一味이니, 이러한 一味觀行을 이 경의 종지로 삼는다.7)

5) 금강삼매경론, 한불1-605.

6) 열반종요, 한불1-524-.

 

원효에 의하면 금강삼매경大意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감’은 ‘둘 아님’의 체득에 다름이 아니며, 이 경의 宗要인 ‘一味觀行’에서도 ‘一味’는 ‘둘 아님’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둘 아닌 도리’를 모르는 그릇된 견해들을 원효는 금강삼매경 「여래장품」의 내용에 의거하여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분석하고

있다.

“그릇된 견해가 비록 많지만 크게 그릇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 첫째는 부처님이 움직임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곧 이것은 하나이니 ‘하나인 진실(一實)․한 마음(一心)’이라 말하고, 이로 말미암아 二諦의 도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이 의 두 가지 문을 설하는 것을 듣고 두 가지 법이 있고 ‘하나인 진실(一實)’은 없다고 헤아려, 이로 말미암아 ‘둘이 없는 중도(不二中道)’를 비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그릇된 견해는 약을 복용하다가 병을 이룬 것이니, 치료하기가 매우 어렵다. …… ‘법은 두 가지 견해가 아님을 알았다’는 것은, 中道의 법은 의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 ‘또한 가운데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은, 비록 의 두 극단(二邊)을 벗어났으나

中道로서의 하나인 진실(中道一實)’을 두어 거기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처음 가운데 ‘여래가 설하신 법은 모두 머무름이 없는데서 나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따르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 이 가운데‘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二諦에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것인데, 비록 중간에 있지 않으나 의 두 극단(二邊)을 떠났으니, 이와 같은 것을 ‘머무름이 없는 곳’이라 한다.8)

원효에 의하면, ‘둘 아닌 도리’에 대한 미혹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번뇌에 물든 세속의 움직임()’과 ‘번뇌가 그친 진실의 고요함()이 둘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오직 ‘하나인 진실(一實)․한 마음(一心)’만이 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진리 그대로의 가르침(眞諦)’과 ‘세속의 관행에

 

따르는 가르침(俗諦)’을 모두 허용하는 二諦의 도리를 비방하게 된다. ‘둘이 아님’을 ‘오직 하나’로 받아들이는 미혹이다.

또 하나의 미혹은 ‘있음()’과 ‘없음()’을 모두 말하는 것을 듣고는 ‘모든존재는 의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지, 이 두 가지 관점을 초월한 하나의 진실이란 없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이 아닌 중도의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세계를 진실대로 파악하는 ‘둘 아닌 도리’는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그 내용으로 한다.

7)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p. 604-605.

8)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 663, 664, 664.

 의 움직임과 의 고요함․진실 그대로의 가르침(眞諦)과 세속의 관행에 응하여 펼치는 가르침(俗諦)․실체로서 있음()과 아무 것도 없음()의 그 어느 한 에도 머무르지 않는 동시에, 두 항의 중간에 머무르지도 않고, ‘둘’에 대립되는 ‘하나’에도 머무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둘이 아닌 머무름 없는 중도’요 ‘하나인 진실(一實)․한 마음(一心)’이라 부르는 도리이다.

범부 중생의 일상 인식은 분리의 틀로 존재와 세상을 ‘둘로 나눈다.’ ‘나’와 ‘남’이 실체적으로 분리되고,

성스러움과 속됨,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참됨과 허망함이 상호 부정적으로 갈라선다. 삶의 오염과 훼손, 모든 배타적 쟁론들은 이 상호 부정적 분리 의식에서 비롯된다. ‘나의 견해’와 ‘남의 견해’가 배타적으로 맞서고, ‘나의 옳음․좋음․참됨․성스러움’은 ‘남의 그름․나쁨․허망함․속됨’을 부정하면서 자기 진영의 독점적 승리만을 추구한다. 이 상호 배타적분열 의식은 존재 오염과 속박의 원천이며, 소모적․해악적 쟁론의 인식적 토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타적 분열 인식은 존재와 세상의 참모습으로부터의 일탈이며 진실의 왜곡이다. 원효가 공감하고 있는, 존재와 세상의 참모습에 대한 불교적 통찰은, 다름 아닌 ‘둘 아님’의 경지이다. 그 어떤 실체적 자가성(自家性, 本質)도 해체되어, 실체적 자폐성으로 인한 분리와 배제의 인식이 설자리를 확보할 수 없는 곳이 진실의 고향이다. 이 곳에서는 옳음․그름, 좋음․나쁨, 성스러움․속됨, 있음․없음을 배제적으로 규정하는 이치()와 지식(), 언어()와 그 언어적 의미()가 힘을 잃는다. 사물이 진실대로 드러나는 이 존재 지평은 있음()과 없음(), 옳음()과 그름(), 진실()과 허망(), 청정()과 오염()의 분별적 인식 범주의 틀 자체가 해체되어 버리는 곳이다.

 

이 마음 자리(一心之源)에 서면, 있음․없음, 옳음․그름, 진실․허망, 청정․오염의 이항(二項)들을 배제적 긴장 관계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 상생 관계로 포섭시킨다. 모든 실체적 자가(自家)의 울타리를 해체시키고 일체의 배제적 개념의 성벽도 허물어 버린 탁 트인 그 자리에 서면, 동시에 그 모든 분별의 언어들을 분별없이 포용한다. 이 진실의 고향에서는 편파적 선호와 부정, 선택과 배제의 격리의 벽이 없기에, 모든 언어의 주소지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머물러야 할 그 어느 주소지도 없기에(無住), 그 어떤 주소지로도 다 응해갈 수 있다. 이 초탈적 포용을 드러내려는 언표가 ‘둘 아님(不二)’이요 ‘한 맛(一味)’이다.

원효는 이 존재 고향의 소식, 진실 구현의 참다운 존재 지평을 일심(一心)의 경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상호 부정적 쟁론들의 인식적 토대를 방치한 채 시도되는 화쟁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각 주장들의 일리를 변별하여 포섭할 수 있는 근원적 능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배타적 쟁론의 인식적 토대 자체를 해체한 후 새롭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원효가 설하는 일심의 경지는 그렇게 이룩된 온전한 존재 인식의

지평이며, 이로부터 일체 주장들이 ‘둘 아닌(不二)’ ‘한 맛(一味)’의 관계로 포섭되는,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非然非不然)’ 화쟁의 세계가 펼쳐진다.

원효가 불이(不二)라는 기호를 통해 알리려는 것은, 모든 존재와 언어들이 ‘둘아닌’ 관계로 만나고 ‘한 맛’으로 소통되는, 탁 트여 진실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일심의 존재 지평이다.

 

 

3. 둘 아님의 깨달음

원효가 펼치는 ‘둘 아닌’ 존재 지평은 ‘둘 아닌’ 도리에 눈뜬 자가 누리는 진실의 세상이다. 다시 말해 원효가 전개하는 ‘둘 아닌’ 존재론은 ‘둘 아닌’ 존재지평에 대한 개안, 즉 불이(不二)의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이 설하는 본각(本覺)․시각(始覺)․불각(不覺) 사상을 통해, 인간과 깨달음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종합적이고 정리된 견해를 수립하고 있는데, 특히 원효 사상의 완숙한 경지를 드러내는 금강삼매경론에서는 대승기신론에서 마련한 각() 사상에 의거하여 금강삼매경이 설하는 본각의 도리를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다.

현실의 인간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생명에 내재하는 원초적 무지(無明)와 그 산물의 구조 및 내용을 대승기신론은 불각(不覺)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그 원초적 결핍이 해체된 본원적 완전성도 동시에 간직한 존재이며, 그 본원적 완전성을 대승기신론은 본각(本覺)이라 부른다. 불각과 본각이라는 상반된 면모가 동시에 동거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아울러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면모가 선택적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다. 불각이라는 존재 결핍으로부터 본각이라는 본원적 완전성으로 귀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 귀환의 잠재력은 다름 아닌 본각 자체에서 비롯된다. 중생이 지닌 ‘본원적 완전성(본각)’의 면모는 ‘깨닫지 못한 상태(불각)’를 반성하고 혐오하

며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운다. 이 본원적 완전성(본각)에서 솟구치는 불가사의한 계발적 자극과 계기를 원효는 ‘본각의 불가사의한 훈습(熏習)’이라 일컫는다.9) 본각에서 주어지는 이 본각 귀환의 계기적 각성에 공명하여 본각 자리로 회향해 가는 여정이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다. 시각이라 부르는 이 본각 귀환의 여정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지닌 삶의 희망이요 당위이며 궁극 목적이 된다.

존재 오염의 현실(불각)과 본원적 청정성(본각)을 동시에 안고 있는 인간의 실존은, ‘깨달아 감(시각)’에 의해 비로소 존재의 희망을 구현한다. 불각과 본각의 상반된 면모가 동거하는 동시에, 시각이라는 선택적 가능성이 상존하는 현장이 인간의 실존적 삶이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 상황을 대승기신론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 부른다. 심생멸문적 삶은 본원적 완전성을 대면하는 희망()과 그것을 등지고 일탈해 가는 절망의 위험(不覺)을 동시에 간직한다. 이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 놓인 인간으로 하여금 희망 구현의 여정으로 인도해 가는 선택적 가능성이 시각이다. 대승기신론이나 원효 사상은 수미일관 이 ‘깨달아감(始覺)’의 여정을 이끌어 가는 이정표인 셈이다. 본원적 완전성(本覺)을 구현해 가는 이 희망의 여정에 대해 원효는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시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 때문에 차츰 각의 작용이 있어 究竟에 이르러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니, 이를 시각이라 말하는 것이다.10)

존재의 본원적 완전성이 투사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훈습력은 중생 일상에 대한 근원적 반성과 성숙의 자각을 일깨워 잠재된 희망의 가능성을 현실화시켜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불가사의한 훈습력의 원천인 본원적 완전성과 하나가 되는 귀환의 과정 전체를 시각이라 칭한다는 것이다.

 

시각(始覺)은 존재 오염의 현실을 본원적 완전성으로 전환시켜 존재의 희망을 구현하는 마디요 통로이다. 생명의 본원적 완전성으로 돌아가려는 이 본각 귀환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완성시킬 때 “시각이 곧 본각”11)이라는 경지가 펼쳐진다. ‘비로소 깨달아감’과 ‘본래적 완전성’이 ‘둘이 아니게’ 되는 국면이 구현되는 것이다. 이 점을 원효는 일심의 경지와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生相이 있어 심체를 미혹하여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제 본각을 떠나서는 불각이 없으며 動念이 바로 靜心임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 것이다.

9) 대승기신론소, 같은 책, p. 709.

10) 별기, 1-683

11) 대승기신론, 신수대장경32(이하에서는 생략)

 

 이것은 마치 방향에 미혹할 때에는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다가 제대로 알았을 때 서쪽이 곧 동쪽임을 아는 것과 같으니, 이 가운데의 의 뜻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 앞의 세 가지 자리(三位) 중에서는 비록 여읜 바가 있기는 하나 그 動念이 아직 일어나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住相 등이 없다’고 말하였고, 이제 究竟位에서는 動念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一心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初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佛地에 있는 것이니, 앞의 세 자리에서는 아직 心源에 이르지 못하여 生相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 마음이 오히려 無常하였으나, 이제 이 究竟位의 자리에 와서는 무명이 영구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다시는 動念을 일으킴이 없으므로 ‘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한다’고 말하니, 다시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을 究竟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心源에 이르지 못하여 夢念이 다 없어지지 않아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없애려고 피안에 이르기를 바랬으나, 이제는 이미 심성을 보아서 몽상이 다 없어지고 自心이 본래 유전함이 없는 줄 깨달아 아니, 이제 고요히 쉬는 것도 없어지고 항상 스스로 一心이어서 一如의 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始覺本覺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이런 도리에 인하여 究竟覺이라 이름하니, 이것은 分齊를 바로 밝힌 것이다.12)

 

원효는 또한, 시각의 궁극은 ‘불각과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게 되는 경지’이고 그것은 곧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이 여래가 마음을 깨달았을 때에 처음의 動相이 바로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곧 無念을 일컫는다’고 한 것이다. … 비록 비로소 무념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나 실은 四相이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니, 무슨 不覺을 기다려 始覺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로 始覺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13)

四相이 동시에 있으나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일심을 떠나 따로 자체가 없기 때문에 ‘동시에 있으되 모두 자립함이 없다’고 하였다. 모두 다 자립함이 없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여 본각과 동일한 것이다.14)

“마치 바닷물의 움직임을 파도라고 말하지만 파도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파도의 움직임은 없는 것이고,

바닷물은 자체가 있으므로 바닷물의 움직임은 있는 것과 같이, 마음과 四相도 그 뜻이 또한 이와 같다. () 四相이 오직 일심이며 불각이 바로 본각과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본래 평등하여 각과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15)

12) , 1-710-

13) , 1-710

14) , 1-710-711

15) 별기, 1-687-

“본래 무명을 따라서 모든 식이 일어나다가 이제 시각을 따라서 마음의 근원에 다시 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돌아갈 때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으며, 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시각이 원만하여짐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16)

원효에 의하면, 불각과 시각과 본각이 ‘둘 아닌’ 것으로 만나는 국면이 바로 일심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불각과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게 되는 경지로 이끌어 가는 깨달음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원효는 ‘깨달음이 없다는 도리를 깨달아 아는 것’17)

‘생사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

‘열반은 본래 적정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

‘세속의 유()와 진여의 공()을 보지 않는 것’18)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 어떤 개념도 실체적 자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야말로 ‘깨달아감(시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이나 열반조차도 실체적 자성으로 보지 않는 깨달음(시각)을 심화시켜 가다보면, 마침내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이 설하고 있는 일각(一覺)을 바로 이 경지의 깨달음이라 이해한다.

 

(금강삼매경) 무주 보살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는 곧 일체 중생의 본각의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중생이 바로 이 몸 가운데 본래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삼매경론) 시각이 원만하면 곧 본각과 같아져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없기 때문에 ‘一覺’이라고 하였으며,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힘’이라고 하였고, 一覺 안에 네 가지 큰 지혜를 갖추어 모든 공덕을 지니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가 一心의 양과 같아서 모두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一覺은 곧 법신이고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기 때문에 ‘바로 일체 중생의 본각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본래 무량한 性德을 갖추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두 가지 업을 짓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이라 한 것이다. 이 본각의 둘이 없는 뜻으로 말미암아 한 중생도 법신 밖으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곧 이 몸 가운데 본래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고 하였다.19)

(금강삼매경)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항상 一覺으로써 모든 을 전변시켜 唵摩羅에 들어가게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모든 중생은 本覺이 니, 항상 一覺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우쳐 저 중생들이 모두 본각을 얻게 하여 모든 情識이 공적하여 일어남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16) 금강삼매경론 본각리품, 1-632

17) 금강삼매경론 본각리품, 1-632, 637

18) 금강삼매경론 본각리품, 1-634-635

19) 금강삼매경금강삼매경론 본각리품, 1-633-

 

왜냐하면 결정의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 모든 중생이 똑같이 본각이기 때문에 ‘一覺’이라 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이것을 체득하여 곧 널리 교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으로써’라고 하였고, 이 본각으로써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항상 일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말하였다. ‘저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교화 대상이 전변하여 들어간다’는 구절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은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는다’는 것은 ‘들어간다’는 뜻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에 모든 여덟 가지 식이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 () ‘모든 중생은 본각이다’는 등은 本覺義이고, ‘모든 情識이 적멸하여 일어남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始覺義이니, 이것은 시각이 곧 본각과 같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20)

 

존재의 본원적 완전성에서 솟아 나오고 있는 불가사의한 자기 구현의 힘(본각의 불가사의한 훈습력)이 촉발시킨 ‘깨달아감(시각)’의 여정은, 존재 왜곡의 개념적 확산을 일삼는 분별식(情識)이 그치는 경지에 이른다. 구유식(舊唯識. 眞諦唯識)에서는 이 경지를 제8(아뢰야식)의 근본 무명을 떨쳐버린 제9식으로서의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 부른다. 존재의 본원적 완전성에 귀환한 이 9식의 경지가 바로 본각이며, 이 때를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은’ 일각(一覺)이라 칭한다.

시각의 궁극을 일컫는 일각의 경지에서는 모든 존재의 참모습, 그 본원적 완전성을 그대로 보므로, ‘모든 중생은 똑같이 본래 깨달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중생을 법신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각의 경지에서는 존재의 본원적 완전성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자비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 중생으로 하여금 제9 아마라식(본각)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이타의 교화행이 펼쳐진다. 이 때는 시각과 본각의 두 공덕이 ‘둘 아니게’ 결합하여 무한한 작용을 펼치게 된다.

“업식 등의 염법의 차별을 대하기 때문에 본각의 무한한 功德을 말하였고, 또한 이 모든 법의 차별을 對治하기 때문에 시각의 온갖 덕의 차별이 이루어짐을 일컫는 것이다.21)

“‘일이 있기에 앞서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옳게 알아들은 것이다. 무릇 말을 하여 佛事를 지으려 할 때에는 항상 먼저 그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하니, 이 생멸하는 은 본래 적멸한 것이고, 이와 같이 적멸한 것이 바로 如如이다.

 

가운데 본각과 시각의 모든 덕을 다 포섭하고 있으며, 또한 생멸하는 모든 법을 갖추고 있는데, 원융하여 둘이 아니니, 이 때문에 매우 깊고 불가사의하다.

20) 금강삼매경금강삼매경론 본각리품, 1-630-631

21) , 1-714

 

이 가운데 비록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지만, 는 오직 본각과 시각이 평등하여 둘이 아닌 것이니,

그리하여 ‘곧 마하반야이다’라고 하였고, 이와 같은 반야는 근원을 다하고 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하였다.22)

원효에 의하면,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같음’과 ’다름‘이 그 두 측면이다.

(금강삼매경)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허망한 것은 본래 일어남이 아니어서 그칠 수 있는 허망함이 없으니, 마음이 無心임을 안다면 그치게 할만한 마음이 없다. 나뉨()도 없고 달라짐()도 없어서 現識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치게 할만한 생겨남이 없는 것이 바로 그침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침이 없는 것도 아니니, 어째서인가? 그침이 없다는 것을 그치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 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는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뒤에서는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인정한 것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부정한 것은 시각이 오직 본각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이미 그치게 할 대상인 불각의 일어남이 없으니 곧 능히 그치게 하는 시각의 차이가 없다. 다르지 않다는 맥락(不異門)에 의하여 이와 같이 인정한 것이다.

 ‘또한 그침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르지 않은 시각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침이 없다는 것을 그친다’는 것은 일어남이 없다는 妄心을 능히 그치기 때문이다. 비록 일어남을 얻을 수 없으나, 한갓 일어남이 없는 것은 아니니, 한갓 일어남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쳐야 할 것이 없지 않으며, 그러므로 능히 그치는 이 없지 않으니 이와 같이 답한 것이다.23)

 

인간은 존재 오염의 현실(불각)을 깨달아감(시각)의 과정을 통해 정화시켜 간다. 그 깨달아감의 여정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존재의 본원적 완전성(본각)이다. 이 도착지에서는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므로, 불각이니 시각이니 본각이니 하는 구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불각과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게 되는 ‘둘 아닌 경지’인 것이다. 이 깨달음의 경지를 원효는 ‘일각(一覺)’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깨달아 가는 여정의 현실을 감안할 때는 ‘극복해야 할 불각’과 ‘심화시켜 가야 할 시각’ 그리고 ‘완성시켜야 할 본각‘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는 불각과 시각과 본각을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시각과 본각의 ‘다른’ 국면이다. 반면 여정의 종착역(사물의 본래 모습)에서 본다면, ‘그쳐야 할 불각’도 없고 ‘완성시켜야 할 시각’도 없다. 모두가 본각이고 법신의 드러남일 뿐이다.

22) 금강삼매경론 진성공품, 1-656

23) 금강삼매경금강삼매경론 무상법품, 1-619

 

‘불각과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결국 시각이 완전해져서 ‘시각과 본각이 둘 아니게 되는 일각(一覺)’은, 시각과 본각의 ‘다름’과 ‘같음’ 두 국면을 동시에 안고 있는 셈이다. 원효는 이러한

의미를 금강삼매경의 무상관(無相觀) 수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비로소 능취를 여읜다는 것은 始覺義이고, 본래 (능취를) 여읜 한 마음은 本覺義이다. 뜻은 비록 두 가지가 있으나 합해져서 一覺을 이루니, 똑같이 능취와 소취를 여의고 새 것과 옛 것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기신론)에서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 또한 이 一覺은 본각과 시각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본각의 드러내어 이룬다는 뜻(本覺顯成義)이 있기 때문에 진리대로 닦는다(眞修)는 말도 도리가 있고, 시각의 닦아서 이룬다는 뜻(始覺修成義)이 있기 때문에 새로 닦는다(新修)는 말도 도리가 있다. 만약 한쪽에 치우쳐 고집한다면 곧 미진함이 있게 된다.24)

 

중생으로서의 인간의 사유 활동은 모든 것에 실체 관념을 부여하는 근본 결핍을 안고 있다. 그 실체화의 대상은 주관과 객관을 모두 포함한다. 존재의 참모습은 이 실체 개념에 가리워 왜곡되어 버린다. 무상관(無相觀)은 ‘모든 존재는 본래 실체가 없음’을 관()하여 이 허구적 실체 관념을 극복해 가는 수행이다.

이 무상관의 입장에서 볼 때, 실체 관념을 투사하지 않고 사물을 보는 힘을 키워 가는 과정은 ‘깨달아감(시각)’이고, 그 힘이 완전해져서 실체적 분별이 없는 참모습과 하나가 된 경지는 ‘본원적 깨달음(본각)’의 구현이다. 그리고 시각이 본각과 ‘둘이 아니게 된’ 깨달음의 국면을 일각이라 칭한다. 따라서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본각을 기준으로 보면, 이미 구현된 모든 존재의 실체적 분별이 없는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本覺顯成義, 眞修)이 수행인 셈이고, 시각을 기준으로 보면, 아직 가리워 있는 존재의 참모습을 새롭게 밝혀 가는 것(始覺修成義, 新修)이 수행이 된다.

24) 금강삼매경론 무상법품, 1-611-612

 

 

4. 둘 아닌 실천

- 불이(不二)의 보살행 -

 

원효는 중생 구제의 간절한 염원을 치밀한 이론적 근거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중생 구제의 염원()과 실천()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원효가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또한 ‘둘 아님(不二)’의 사상이다. 특히 세속()과 세속의 초월()을 ‘둘이 아닌 것’으로 파악한 후 그 ‘둘 아닌’ 인식 위에서 타자

기여의 염원을 펼쳐 가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 둘이 아닌 ‘하나인 진실의 법’은 모든 부처가 돌아가는 곳이니, 如來藏이라 부른다.25)

“…… 이것은 이 하나가 아닌 에 나아가 움직임과 고요함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한 게송의 뜻은 二邊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곧 二邊을 떠났다’고 하였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에 머무르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인 진실(一實)’인 ‘한 마음(一心)’의 자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二邊을 떠났다’는 것은 진실에 입각하여(擧體) 움직이고 고요하기에 (그 움직임과 고요함이) 별개의 두 가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함을 알아야 한다.26)

 

“‘제가 이제 알기로 이 법이 斷見常見에 얽매어’라는 것은, 三乘敎門에서 말한 五事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그 까닭은 저 네 가지 법이 생멸의 을 지니고 있어서 단견이 집착하는 경계를 떠나지 못하였으며, (五事 중 나머지 하나인) 그 진여의 법은 常住性이어서 상견이 취하는 경계를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여래가 설하신 의 법은 단견과 상견에서 멀리 떠난 것이다’는 것은, 一乘의 교설인 三空의 법은 常 二邊의 과실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밝힌 것이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며, 한 상이 하다는 것도 하고, 해진 것 또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三空을 부정()하지도 않고 을 긍정()하지도 않으니, 비록 움직임과 고요함을 떠났으나 중간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斷邊常邊을 멀리 떠난다.27)

 

원효에 의하면, 三乘敎에서 설하는 五事는 모두 의 두 극단에 떨어진 것인 반면, 一乘敎三空斷邊常邊을 떠나 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25)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 659-.

26)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 663.

27)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p. 665-666.

 

 

그리하여 의 고요함에 머물지도 않고 의 움직임에 머물지 도 않으며 그 중간에 머물지도 않는 ‘머물지 않는 중도’가 된다. 이것이 ‘아주 없어짐()과 영원히 있음()․참됨()과 거짓됨()․고요함()과 움직임()이 둘이 아닌 도리’가 된다.

중도인 ‘둘이 아닌 경지’는 ‘둘 아닌 하나’도 아니고 ‘둘을 합친 하나’도 아니다. 두 가지 치우친 오해를 모두 벗어나는 것이면서도 ‘두 가지를 합한 하나’나‘둘 아닌 하나’는 아닌 것이다. ‘둘이 아닌 중도’의 경지를 ‘하나인 진실(一實)’인 ‘한 마음(一心)’의 경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인 진실․한 마음’이라는 말을 듣고 ‘둘 아닌 하나’라는 오해를 일으켜서도 안 된다. ‘아주 없어짐()과 영원히 있음()’이라고 하는, 존재

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서 벗어나, ‘진실()과 거짓()이 둘이 아닌 도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진실()의 고요함과 거짓()의 움직임을 합하여 하나로 하거나 둘 모두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스러움과 속됨이 둘로 격리되지 않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입각하여 보면, 고요함과 움직임이 별개의 두 현상이 아

니면서도 뒤섞이거나 아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을 별개의 실체로 보아 어느 한 편을 배타적으로 선택하여 집착하는 존재의 동요는 사라졌지만(不二), 그러한 一實一心의 경지는 ‘움직임과 고요함의 둘을 폐기해 버린 하나’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不守一不一). 이것이 진정한 진속불이의 경지이다.

진속불이는 진실과 거짓, 성스러움과 속됨의 두 항을 ‘떠나면서도 포섭하는’지평이다. 이 둘 아닌 도리를 원효는 ‘동요 및 속박의 삶(生死)과 평온 및 해방의 삶( 涅槃), 그리고 생사와 열반의 삶을 불이적(不二的)으로 포섭하고 있는 대승기신론 一心二門의 문제에도 적용한다.

“현상()에 따르는 小乘門에 공통된 것이고, 에 따르는 은 오직 大乘門이니, 이 두 가지는 差別門이다. 세 번째 것은 平等門이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여러들을 총괄하여 포섭한다. (37)道品生死에 머물지 않는 이고, 四攝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 이며, 如如(眞如)을 따르는 六은 평등하여 둘이 없는 문(平等無二門)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문이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에 들어간 사람은 이라는 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如如함을 따라 행하면서도 언제나 현상에 따르고 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하다는 을 취해 적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여래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비록 현상과 에 따르지만 항상 여여함에 따라서 평등한 을 취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들어감을 들어감이 아닌 곳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그 들어가는 마음을 들어감이 아닌 곳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니, 들어가는 주체와 들어가는 곳(대상)이 평등하여 다름이 없으므로 ‘들어감이 아니다’고 하였고, 비록 다름이 없으나 또한 하나도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마음에 의거하여 임시로 ‘들어가는 마음’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간다는 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가는 마음을 들어감이 아닌 곳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다.28)

 

“‘뜻()으로 취한 것과 업으로 취한 것이 곧 모두 공적하다’는 것은, 둘 다 없앴으나 없앤 곳은 둘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뜻으로 취한 것’이라는 것은 이른바 열반이니, 적멸을 반연하는 마음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업으로 취한 것’이라는 것은 곧 생사이니,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니, 공적하여 둘이 없다. ‘공적한 마음의 법은 함께 취하는 것과 함께 취하지 않는 것에 또한 마땅히 적멸하다’는 것은 다음을 밝힌 것이다; 一心의 법은 또한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이 없는 곳이 바로 일심의 법인데, 일심의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모두 취하면 곧 일심을 얻지 못하니,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두 문을 폐하여 함께 취하지 않아도 일심을 얻을 수 없으니, 一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둘이 없는 마음의 법은 함께 취하는 것과 함께 취하지 않는 것에 또한 마땅히 적멸하다.29)

 

현상()의 분석과 통찰, 37조도품에 의한 수행을 통해 삶의 동요와 속박(생사)을 극복하려는 소승의 교설 체계(小乘門). 그리고 식()의 분석과 통찰을 주로 하며 사섭법 등의 보살행을 강조하여 열반에 대한 소승적 집착을 극복하려는 대승의 교설 체계(大乘門). - 원효에 의하면 이 두 교설 체계는 생사와 열반을 별

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교설 체계(差別門)이기에 생사와 열반을 ‘둘 아니게’ 포섭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진리와 같아진(如如해진) 경지(平等門)는 생사와 열반을 ‘둘이 아닌 평등’으로 본다. 이 때는 공()하다는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기에 열반의 적멸에 머물지 않고 차별의 생사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동시에 세속의 일과 중생의 마음으로 나아가 관계 맺으면서도 생사 차별과 번뇌의 동요가 없이

열반 적멸의 평등과 평안을 유지한다.

진리와 하나가 된 채(를 따르면서) 중생 구제를 위하여 六윤회의 세계를 다니는 보살행은 이처럼 생사와 열반의 각각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둘 모두를 포섭하는 경지(平等無二門)이다. 그리고 원효는 대승기신론一心二門 역시 이러한 경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생사와 열반이 공적하여 ‘둘이 없는’ 경지를

一心의 경지라 부르는데, 이 일심은 ‘둘 아닌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므로) 一心二門을 세운다.

28)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p. 660-661.

29)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 668.

생사와 열반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므로(생사와 열반이 모두 공적해졌으므로) 生滅門(생사)眞如門(열반)二門 모두를 합하는 것이 一心의 경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二門을 모두 버린다고 해서 一心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一心二門을 세운 것이므로 二門을 버리고서는 一心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아닌 도리’는 이와 같은 것이기에 생사 번뇌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게 하는 동시에, 생사 번뇌의 현장에서 중생 구제의 보살행을 쉬임없이 진행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 앞에서 대략 설명할 때는 다만 가 공적하다는 것만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이제 널리 설명할 때 인연의 에 나아가 모든 법의 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 평등한 깨달음의 도이니 이 (因果) 법 외에 따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이 게송의 大意이다.

이것은 승조 법사가 <도가 멀리 있는 것인가? 부딪히는 일마다 참된 것이다. 이 멀리 있는 것인가?

체득하면 곧 神妙함이다>고 한 것과 같다. ……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라는 것은 初地 이상에서 이미 일체 중생이 평등함을 증득하여 모든 중생을 보기를 마치 외아들을 보는 것과 같이 하니, 이것을 청정한 增上意樂이라 하는데, 비유에 의하여 마음을 나타내어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라고 한 것이다. ‘번뇌에 머문다’는 것은, 보살이 비록 모든 법이 평등함을 증득했지만 방편의 힘으로써 번뇌를 버리지 않는 것이니, 만일 일

체의 번뇌와 수면을 버리고 곧 열반에 들면 本願을 어기기 때문이다. ……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열반에 들어가지 않고서 널리 시방 세계 중생을 교화한다.30)

‘아주 없어짐()과 영원히 있음()’․‘실체로서 있음()과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존재 오해의 두 유형을 극복하여, ‘참됨()과 거짓됨()’․‘고요함()과 움직임()’․‘진실 그대로의 가르침(眞諦)과 세속의 관행에 응하여 펼치는 가르침(俗諦)’․‘생사와 열반’의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면서 그 모두를 포섭하는 ‘둘이 아닌 도리’는, ‘머무름 없는(無住) 중도’요 ‘하나인 진실(一實)․한 마음(一心)’이라 부르는 경지이다. 眞俗不二의 도리는 ‘떠나면서도 포섭하고’ ‘물들지 않으면서도 관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생멸하는 因果 현상과

번뇌로 동요하는 세속을 본질적으로 초월하여 성취한 존재 해방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면서도, 그 생사 번뇌의 현장을 떠나버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껴안으면서 중생 구제의 염원()과 실천()同體大悲에 입각하여 전개할 수 있게 하는 사상 원리가 바로 ‘이 둘이 아닌 도리’인 것이다. 이 ‘둘 아닌 도리’에 의거하여 원효는 불교적 이념의 구현을 위해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대중불교를 구현할 수 있었다.

30) 금강삼매경론, 같은 책 p. 674, 674, 675.

 

 

4. 맺는 글

원효가 추구하는 불교적 진실은, 세속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되는 인식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반성하여 해체한 후, 새로운 인식과 가치(지혜와 자비)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은 비판과 해체의 대상으로서 일단 부정되게 된다.

 

세속적 인식과 가치에 동의하지 못하여 그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는 사람에게,

세속은 싫어하고(厭離) 벗어나야 할()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아직 불교적 진실에 부합하는 단계가 아니다. 세속에 대한 비판과 해체의 의지로써

출발하여 마침내 세계를 진실대로 파악하게 된 자, 진실대로 보는 지혜(如實智)에 의해 진리다운 인식과

가치를 새롭게 구성한 자에게, 세속은 이제 부정의 대상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 채 포섭된다. 모색과 추구의 단계가 아닌, 성취와 체득의 경지에서 본 세속과 진실의 새로운 관계를, 원효는 ‘둘 아님

(不二)’으로 포착해 낸다.

세속을 비판과 해체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부정의 단계에 머물 때는, 중생 구제의 염원이 자연스럽게 솟아나지 않는다. 부정해야 할 세속()과 실현해야 할 진실()이 분리되는 단계에서는, 세속에 몸담은 중생을 ‘내 몸처럼 여겨 위할 수 있는 마음(同體大悲)’이 필연적일 수 없다. 반면, 세속 비판과 그 해체 작업에

성공함으로써 그로 인해 체득된 진실에 입각하여 새로운 존재 지평을 열게 된 자에게는, 부정의 대상이었던 세속과 성취된 진실이 ‘둘 아닌’ 관계로 통합된다.

허망한 세속()과 진리의 세계()를 이처럼 ‘둘 아닌(不二)’ 관계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한 몸으로 여겨 펼치는 위대한 동정심(同體大悲)’에 입각한 중생 구제의 염원을 일종의 존재론적 필연으로 갖추게 된 원효는, 자신이 지니게 된 그 새로운 세계 인식을 불이(不二)의 논리로 펼친다. 그에게 있어 ‘둘 아님’의

도리와 그에 관한 깨달음은 존재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중생구제의 보살행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불이(不二)의 존재 지평과 그에 대한 개안은 중생 구제의 염원()과 실천()을 수반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Rhys Davids, William Stede, Pali-English Dictionary(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79)

Sutta-nipata, Dhammapada, Vinaya,(PTS 간행본)

中村 元, 佛敎語大辭典(東京書籍, 1982) 유마경「입불이법문품」, 신수대장경 14.

원효, 대승기신론소별기금강삼매경론열반종요(한국불교전서)

박태원, 원효사상(1), 울산대출판부 2005. 원효사상(2), 울산대출판부 2005.

원효의 불이(不二) 사상 173

[Abstract]

The non-dual thought of Won-Hyo

Park, Tae-Won(Ulsan Univ.)

According to Won-Hyo(617-686), the supra-mundane and the mundane are not the dual.

There is no substantial separation between the two. All are under the non-dual relation.

This view of non-dual can open the new ontological horizon that permit all the reciprocal's

co-existence.

Once acquiring the non-dual view and opening the new ontological horizon, one can feel

all the other satient beings like oneself. Thus one leads one's life for the wellbeing of

others.

Won-Hyo was a man who found the road to salvation of being in the non-dual thought.

After realizing the non-dual view on the entire world, he felt the fundamental oneness

strongly and walked the altruistic way of life.


조용필 이선희 - 그겨울의 찻집, 알고싶어요, 꿈의 대화, 나 너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