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 중(中)|…… 혜천스님설교

2019. 5. 5. 20: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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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특강 2: 중(中) (3월 2)불기2556년3월11일 





 


 

오늘 부터 법회 방식을 바꿔서 하도록하겠습니다. 그 동안은 강론을 하고 차를 마셨는데, 오늘부터는 강론을 하고, 강론 끝에 질문을 받겠습니다. 어떤 질문이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강론을 하며는 맥락을 연결해서 듣지 않고, 맥락을 끊어서 들어서, 그거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강론이 끝나면 차를 마셨었는데, 차 마시는 거는 없애고, 그 시간에 아파마나 수행을 하겠습니다. 좌선 수행을 하겠습니다. 강론이 끝나고, 질문이 끝나면, 바쁘신 분들은 가셔도 되고, 안 바쁘신 분들은 함께 아파마나 수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방식은 가을까지 갈 겁니다.  

 

부처님의 출가일이 지지난주 수요일이었고, 지난 주 수요일이 부처님의 열반일인데, 지금은 출가일, 열반일 주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특별 강론을 지난 주부터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를 하셔 가지고 알라라 칼라마와 붓탓카 라마푸타를 스승으로 모시죠. 두 사람과 다 결별을 하고, 고행림 속에 들어갑니다. 고행림에 들어가서 아주 극한의 고행을 하죠. 그 극한의 고행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초인적인 그러한 모습을 보고, 고행림에서 많은 고행자들이 고타마 싯타르타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죠.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고행림의 지도자로 부상를 합니다. 경에서는 고타마 싯타르타는 초인적인 고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죠. 아마 극한의 고행을 했을 거예요.

 

그런 고행을 하던 고타마 싯타르타가 네란자라강 강변 나무 밑에서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그 앞을 농부가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농요를 부르죠. 그 농요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면 끊어지리. 느슨하면 좋은 소리 나지 않으리. 줄을 알맞게 조율하여 아름다운 연주를 하리라.' 그 농부는 지나가면서 지금과 같은 농요를 불렀어요.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며는 끊어진다는 거죠. 느슨하며는 좋은 소리가 나지 않고. 줄을 알맞게 조율해서 아름답게 연주하리라 했어요.

 

고타마 싯타르타는 그 농부의 농요 소리를 듣고,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죠. 야윌대로 야윈 몸, 야윌대로 야윈 몸 때문에 혼몽해지는 마음.  우리 몸이요, 자니치게 피폐해져 피골이 상접해지면, 정신이 혼몽해져요. 고타마 싯타르타는 생각을 하죠. 지난 날 나는 몸과 마음이 얼마나 평온했던가. 그런데 정작 내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 고행림에 들어온 후로, 도리어 몸은 상하고 마음은 더 피폐하지 않는가. 고타마 싯타르타는 그 농부의 농요를 상기하죠. 줄이 팽팽하면 끊어지리.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으리. 줄을 알맞게 조율하여 아름답게 연주하리라. 고타마 싯타르타는 고행을 그만두게 되죠.

 

이 농요에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中)이라고 하는 개념이죠. 어쩌면 고타마 싯타르타가 앞에 농부가 지나가면서 이 농요를 불렀다고 하는 것은 아마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요. 왜 사실이 아닐지 모르냐며는 이 싯구는 농부가 부르는 농요는 아니죠, 사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왜 고행을 그만두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든, 부처님이 고행을 그만두게 된그 동기를 설명하고자 했든지, 이 싯구에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 바로 중이라고 하는 개념이예요.

 

중이라고 하는 개념은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부처님은 이 중이라고 하는 구조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이 중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삶 속에 끌어들이면, 윤리와 도덕입니다. 우리 삶 속으로 끌어들이면 그렇다는 얘기예요. 중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며는 윤리와 도덕이예요. 윤리와 도덕은 중심(中心)과 중행(中行)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윤리와 도덕을 굉장히 피상적으로 생각하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리와 도덕은 중심과 중행입니다. 중이라고 하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보며는 열반이 되지요. 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동요되지 않는 거를 뜻하니까요. 부처님은 중이라는 개념을 활용해서, 다양한 설법을 하셨죠. 윤리와 도덕을 지시했고, 본질적인 축으로 제시하기도 했고. 중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현대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하면, '알맞게 어울림'입니다. 알맞게 어울림. 우리가 앙상블이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중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 끌어 들이며는, 앙상블이죠. 뭐 하모니라고 할 수도 있고요. 하모니나 앙상블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알맞게 딱 들어맞는 걸 이야기하죠. 합창에선 하모니가 될 것이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해지는 것은 앙상블이라는 말로 되겠죠. 꽁무니 치마도 앙상블이니까요. 그림으로 말하면, 원근과 명암이 될 것이고. 건축으로 말하면 황금비율을 말하기도 하겠죠. 중이라는 것이 그렇겠다는 거예요.  

 

어느 날 빠사나디왕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이렇게 말하죠. 그의 왕비 마리카와 함께 와서 말입니다."제가 생각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죠. "그대의 말이 옳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빠사나디왕 자신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동일한 생각을 갖는다는 거죠.

 

바로 부처님은 중이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거죠. 중이라고 하는 것은 같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게 할려고 하죠. 같게 하지 않고, 그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 중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하시죠. 내가 옳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내가 옳다는 생각 때문에 싸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옳다는 생각이, 나는 잘못이 아니라고 봐요.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은 내 삶의 주체입니다. 내가 옳다는 소신과 내가 옳다고 하는 확신이 없으면, 나라고 하는 존재의 위치는 어디다가 비치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내가 옳습니다. 언제나 내가 옳습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되죠. 내가 옳다고 하는 확신이 잘못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찬양받고, 지지받아야 될 부분이지, 비난받아야할 이유가 아니예요.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같게 할려고 하는 거죠. 내가 옳다고 하는 것과 같게 할려고 하는 것. 무슨 말인가 하며는 내가 옳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네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옳다고 하는 그 생각을 넘어서서 네가 그르다고 하는 생각을 갖죠. 그러기 때문에 내 생각과 같게 할려고 하고, 내 생각과 같게 할려고 상대를 압박하죠. 네가 옳을 수 있다고 하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거죠. 내가 옳으면, 너도 옳다는 입장을 보여야 되는데, 나는 옳은데, 너는 그라다는 거죠. 네가 그르다고 하는 그 생각이 잘못이죠. 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옳아, 동시에 너도 옳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같게 할려고 하지 않고, 그 다름을 인정하는 거죠.

 

빠사나디왕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너 자신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라고 이야기하신 것도 같게 하지 않고 그 다름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같게 할려고만 하죠.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죽였고, 그렇기 때문에 소정묘를 죽였고, 그렇기 때문에 김구를 죽이고, 조봉암을 죽였죠.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예요. 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은 그 다름이 어우러지는 것을 말하죠. 조화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각기 다른 것이 어우러지는 게 조홥니다. 화음이 뭡니까? 각기 다른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 화음이죠. 합창에서의 하모니는 뭡니까? 각자 다른 소리가 어우러지는 거죠. 우리가 관현악에서 앙상블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혀 다른 악기가 어울러지는 거죠.  다른 것이 어우러지는 것, 그것이 중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리이고, 그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예요. 그 다름이, 그 각각의 다름이, 각각의 다름, 그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서 어울러지는 것, 그것이 중입니다.       

 

부처님은 그 농부의 농요 속에서, 중의 개념을 발견한 거죠. 붓다가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단지 그 순간에 그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왔다고 보는 것이 더 옳겠죠.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없어요. 단지 우리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거죠.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습니다.버려버리는 거죠. 잃어버리는 거고 말이예요. 우리가 중이라고 하는 개념을 몰라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내 아이에게 강요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내 남편과 내 아내에게 강요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조직과 사회에 강요할려고 하는 것이 몰라서 그러진 않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 다름을 말이예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바로 오비구에게 제시했던 것도 바로 중이라고 하는 개념이예요. 중에 처해라. 중은 우리 삶의 모습이자 동시에 우리 본질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고, 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평형이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이 늘 동요되는 이유는 중이라고 하는 것이 내 삶 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예요. 우린 끝없이 중을 이야기하지만, 이 중을 내 삶 속에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숲에 들어갔을 때, 강 가에 섰을 때, 바닷가에 섰을 때, 들판에 섰을 때,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중의 개념이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집을 짓고, 마당에 나무를 심고, 작은 정원을 꾸미는 것도 바로 이 중의 개념 때문인거죠.

 

중은 선(善)입니다. 중은 미(美)입니다.  중이 선이고, 중이 아름다움입니다. 부처님은 일생에 걸쳐서 선을 강조하셨죠. 선이 중이예요. 선이 다른 것이 아니라 중입니다. 선은 알맞게 어우러져 있는 거죠. 마당에 풀과 나무, 꽃, 작은 돌 그 자체가  바로 중의 개념을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단지 우리가 거기에서 중의 개념을 읽어내지 못하는 거죠.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멀리서 찾죠.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항상 멀리서 찾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윤리, 도덕을 넘어선 그 곳에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하죠. 윤리, 도덕을 넘어선 곳에 본질이 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윤리 도덕을 넘어선 곳에 본질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윤리 도덕이 있는 고 곳에 본질이 있죠. 본질이 있는 곳에 윤리 도덕이 함께 있습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다르던가요? 우리가 손바닥이라 그러고, 손등이라고 그러지마는, 그것은 하나의 손이죠. 손바닥이 없는 손등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손등이 없는 손바닥 또한 손이 아니죠. 손바닥이고 손등은 하나의 손입니다. 윤리와 도덕과 본질은 본래 같은 장소에 있는 겁니다.

 

우리 마당 정원에 나무가 있고, 돌이 있고, 꽃이 있고, 도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뽑아내는 잡초가 있지요. 꽃밭에 잡초가 있기 때문에 꽃밭입니다. 잡초는 꽃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죠. 꽃밭의 잡초조차도 꽃밭의 구성원이라는 야깁니다. 그 자체가 어우러짐인 중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고착된 편견이 있죠. 사람은 그걸 벗어나지 못해요. 부처님이 줄이 팽팽하면 끊어지리, 줄이 느슨하며는 좋은 소리가 나지 않으리, 줄을 알맞게 해줘야 아름답게 연주하리라고 하는, 그  농요의 구절을 듣고, 고행을 그만 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기가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렸다고 하는 것을 뜻하죠.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구성한 것을 말하죠.  

 

부처님이 굳이 중이라고 하는 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제시하는 이유는 그 중이야말로 새로운 마음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예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같게 하려고만 하지요. 같게 할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같게 할려고 하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죠. 세모와 동그라미는 합치되지 않습니다. 네모와 동그라미 역시 합치되지 않죠. 네모는 네모로써, 세모는 세모로써,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로써, 그 각자가 그 다름으로서의 쓰임새가 있는 겁니다. 섯가래가 기둥을 대신하지 못하죠. 기둥 또한 대들보를 대신하진 못합니다. 대들보가 용마루를 대신할 순 없어요. 그 각자는 다름입니다. 그 각자가 조합이 돼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 내죠. 중할 뿐,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부처님은 중이라고 하는 개념을 우리 삶 속에 이끌어 들일 것을 권하죠. 네 삶 속에 이끌어 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야만이 비로소 네 삶이 편안하고, 안온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편안과 안온은 중에 처할 때만이 올 수 있습니다. 중이 아니며는 모든 조화가 깨어져 버리죠. 부처님이 그 농요을 듣고, 자기 자신을 살펴봤을 때, 몸과 마음의 부조화를 인식하죠. 그러면서 부처님은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조화로울 때 평화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 하죠. 중은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조화시키는 걸 잘 못해요. 우리가 왜 조화시키는 걸 잘 못하느냐면, 우리는 조화를 시키는 것이 굉장히 서툴기 때문입니다. 많이 서툴죠. 특별히 조화를 시켜야 된다고 하는 인식을 가져보지 않았걸랑요.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하는 확신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옳다고 하는 확신만이 진리이기도 하죠. 근데 우리는 모두가 다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확신을 그르다라고 해선 안되죠. 우리는 그 확신을 그르다고 보고 싶어 해요. 나만이 옳다고 하고 싶어 하죠. 그렇 때문에, 나와 다르면 가차없이 공격을 해대죠. 상대가 누구인가는 가리지 않죠.

 

옛날에 해인사 성철 스님은 반드시 삼천배를 했어야 만나 줬어요. 그 분은 삼천배를 안하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성철스님 문턱은 굉장히 높았습니다. 대신 웬만한 사람은 성철 스님을 만날 생각을 몬했죠.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대통령이 해인사에 와서, 성철 스님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성철 스님은 이렇게 이야길 했죠. 만나고 싶으면, 삼천배를 해라. 그래서 전두환이도 만날 수 없었고, 박정희도 만날 수 없었어요. 부산에 아주 연로한 실업가가 있었죠. 너무 성철 스님을 만나고 싶어 했어요. 그래도 원체 연로하신 분이라 특별히 그냥 만났죠. 그래 성철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당신은 돈이 많으니, 죽을 때 그 돈을 다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일부는 세상에 좋은 일에 써라! 그랬더니 그 노인은 말했죠. 스님이 세상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냐고. 아맘 그분은 재산을 세상을 위해서 좀 쓰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불쾌하고, 분했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벌었는데. 다 내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그걸 누굴 주라고? 이런 돌중놈을 봤나? 아마 그 분은 그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노인은 화를 내면서 가버렸죠.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가 누구인가는 가리지 않습니다. 내 이익에 침해가 되고, 내 생각과 다르며는 가차없이 공격을 하죠. 왜 가차없는 공격을 할까요? 우리는 중하지 못하걸랑요. 부처님이 중이라고 하는 개념을 굳이 제사한 이유는 그래서 그렇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중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 삶속에 끌어들이면 윤리와 도덕이라고. 윤리와 도덕은 중심과 중행입니다. 가운데 중자, 마음 심자. 가운데 중자, 행할 행자. 중심, 중행이 윤리와 도덕이예요. 중심, 중행하면 본질에 다가갈 수가 있죠. 우리가 중심하고 중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정(中正)이 안 됩니다. 중정이 안되니까, 당연히 본질인 그 열반에 이르지 몬하죠. 부처님이 중을 제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심과 중행, 그리고 중정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라는 거예요. 열반은 그 중이, 그 본질에 부합된 걸 말해요. 그것이 바로 평안이죠.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죠, 모든 것을. 우리가 수학이 어려운 것은 수학이기 때문이예요. 수학 그러며는, 일단 머리부터 찌근 찌근 아파오니까요. 쉽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쉽죠. 수학이라는 것도 우리가 공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어려운 거죠. 중이라고 하는 것도 어려울게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 끌어들여서 내 삶을 바꾸어 가면 됩니다. 결국 중이라는 것이 내 삶 속에서 내 삶을 바꾸어 내는 거죠. 특별할 것도 없고, 특별하지 않을 것도 없죠.

 

우리가, 부처님께서 왜 우리에게 중이라고 하는 개념을 제시하는가를 정말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거를 깊이 생각하면,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의 해탈이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할 것 있으면 하시죠. (질문: 중정할 때 정자는 한문으로?)아, 예 바를 정(正)자입니다.  


요조 내가 말했잖아 - 가족끼리왜이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