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내면에는 두 가지의 ‘나(我)’가 있습니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와 ‘남이 나한테 요구하는 나’가 있습니다.
‘나의 나’와 ‘남의 나’가 있는데 문제는 나도 모르게 내안에서 이 둘이서 항상 싸우고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 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얘기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 주변의 이웃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이렇게 사는 삶이 좋다고 자꾸 얘기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야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삶은 잘 아는데 스스로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생깁니다. 나도 모르게 어렸을 때부터 내면화 돼서 그러한 내가 어느 새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일부가 돼 버려요.
하지만 이렇게 살면 좋긴 좋아요.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들으니까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좋습니다.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남을 배려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무슨 얘길 해서 다른 사람이 가슴 아플 것 같으면 얘기를 안 해요. 참아버립니다. 그러면서 항상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고, 하고 싶은 것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삽니다.
우리 보살(여성불자)님들이 그렇죠. 남편, 아이들, 시부모를 위해 그렇게 남들을 위해 항상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이 원하는 나로만 살게 되면 어느 순간 ‘도대체 나는 뭐지?’ ‘나는 뭘 원하지, 나는 누구지?’ 의문을 던졌을 때 잘 모르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부모님들이 안 물어봤어요. 물어보지도 않고 하루라도 더 산 엄마가 더 잘 알아서 얘기합니다. ‘너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으면 돼’ 이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원하는 나로 살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대개 이 사람이 좋고 착하고 관계도 잘하고 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는 왠지 좀 불행한 것 같고 ‘내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인생을 헛산 것 같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싹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막 살아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안 좋아할 확률이 되게 높아지죠. 베스트셀러 중에서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었어요. 어느 정도 미움을 받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 그렇게 그 책은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고민이 됩니다.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춰주면서 살아야 되는 것,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해야 되는 것, 이 둘 사이에 우리는 항상 갈등을 합니다. 하지만 행복하려면 이 둘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춰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드릴게요.
“지금부터 내가 좋아하는 공부하자.” 이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가 뭔가를 공부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어 합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성장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성장이 멈춰버리고 다른 사람 위주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존적이 되고 맙니다.
남편이, 아들이 해줘야 되고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에 맞게 해줬을 때 내가 행복해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은 어느 새 약해져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힘을 기르기 위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자기 원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겁니다.
프랑스 중산층은 다섯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외국어 하나는 할 줄 알아야 된답니다. 두 번째 좋아하는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세 번째는 좋아하는 운동이 있어야 된데요. 네 번째는 자기만의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다섯 번째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야 된다는 겁니다. 돈이 얼마나 많고 적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본다는 거예요.
봉사활동을 하면 자존감이 생깁니다. 봉사활동 하기 전에는 자기가 아주 쓰잘데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봉사활동을 하고 나니까 자기가 아주 쓸모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 와서 봉사하는 것도 되게 중요한 것입니다. 안내나 후원 봉사라도 한 달에 아니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만 해보세요. 자존감이 좋아지고 자기 스스로를 되게 좋아하게 됩니다. 특히 자존감 낮아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봉사활동을 꼭 해보세요.
아이들이 잘 되면 그것을 낙으로 살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면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져 버립니다. 행복의 열쇠 애들이 갖고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자꾸 그 행복의 열쇠를 아이들에게 줘 버리면 나중엔 애들이 내 말을 안 듣습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이 내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싸우게 됩니다. 내 꿈을 네가 이루어줘야 하는 데 안 이루어준다 그래서 싸우게 됩니다.
애들은 자기 인생 살도록 내버려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합니다.
아이들도 자기만의 업(業), 카르마를 갖고 태어난 존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부모님이 지켜봐주고 옆에서 응원해주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아이에게 무조건 이거해라 저거해라 진두지휘 하지 말고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웬만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야 합니다.
아이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울수록 뭐든 다 해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것은 부처님 되려고 하는 겁니다. 부처성품을 제대로 봐서 내가 이미 부처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겁니다. 부처성품은 지금 현재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러분도 부처성품을 쓰고 있습니다.
항상 쓰고 있는데 그거다 하는 것을 자신이 모를 뿐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찾는 ‘부처성품’, 이 몸 받기 전부터 갖고 있는 그 성품은 뭐냐 하면 바로 ‘앎’입니다.
앎 자체는 모양이 전혀 없습니다. 대상이 없을 땐 고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대적(大寂), ‘큰 고요’라는 그런 말로도 쓰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고요해요, 하지만 어떤 대상을 만나면 앎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텅 빈 채로 조용한 것을 명상이나 좌선하면서 많이 경험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경계에 들어가면 또 편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신경 쓸 것도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화들짝’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에 머물 게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게 여러분이 그렇게 찾는 부처성품입니다.
그리고 ‘뭘 공부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자기 스스로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자꾸 남한테 뭘 공부하나 좋겠느냐고 물어보면 그것 또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뭘 공부하고 싶은지 가장 잘 압니다.
우리가 이생에 태어난 것은 성불할 때까지 공부하려고 태어난 겁니다. 영적인 성장을 하려고 태어난 거예요. 그 과정에서 아픔, 괴로움 그런 것을 겪으면서 배우는 게 많습니다.
내가 너무너무 잘 나가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배우는 게 없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몸이나 마음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어떤 일이 있으면 그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삶이 무상해지면서 부처님의 ‘넘버원 가르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실 영적인 공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피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윤회를 믿게 되면 선(善)을 가까이 하고 악(惡)을 멀리해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과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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