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란 무엇인가? 번뇌란 괴로운 마음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런데 ‘번뇌라는 것’이 ‘나라는 것’과 별개의 ‘것’일까?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의식되는 나’이다.
‘나라는 것’, ‘나’는 언제나 의식될 때만 존재한다.
우리가 졸도하거나, 잠에 빠지거나, 깊은 삼매 속에서 ‘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은 ‘의식되는 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번뇌란 것’은 무엇인가? 번뇌 역시 ‘의식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로 ‘의식되는 나’ 또는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식’이 바로 번뇌이다.
우리가 번뇌를 경험하지 않는 상태는 ‘나라는 것’이 의식되지 않는
상태라는 사실을 돌아보면 쉽게 이 사실을 수긍할 수 있다. 결국 ‘번뇌’란 바로 ‘나’이다. ‘나’가 바로 ‘번뇌’다.
‘나’가 ‘번뇌’를 경험하는 게 아니다. ‘나’가 ‘번뇌’ 그 자체이다.
‘의식되는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번뇌’의 실체이다. ‘나’가 특별히 의식되지 않고 활짝 열려 있는 의식의 상태에서는 ‘번뇌라는 것’이 없다.
‘나’가 의식되지 않으면 ‘번뇌’ 역시 의식되지 않는다.
‘나’가 의식될 때, 그 ‘의식되는 나’라는 느낌을 우리는 ‘번뇌’라고 분별할 뿐이다. ‘나’가 의식된다는 것은, 활짝 열려 있는 의식이 일정한 테두리, 한계, 경계 속으로
수축된다는 것이다. 축소된 의식, 한정된 의식이 바로 ‘나라는 것’, ‘번뇌라는 것’이다. 축소된 의식, 한정된 의식은 분리감, 고독, 외로움, 소외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
세상과 단절된 느낌, 서글픔, 서러움, 불안과 두려움, 공포, 우울과 짜증, 분노,
한 등의 모습으로 경험된다. 우리는 그 상황을 ‘나라는 것’이 ‘번뇌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가 ‘번뇌’와 맞서 싸우려 하거나, ‘번뇌’를 회피하려 하거나,
‘번뇌’를 없애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러한 ‘나라는 것’,
‘번뇌라는 것’이 더욱 의식 속에 머물게 된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렁 같은 고통의 악순환 속에 빠져들게 된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고통은 지속되고 증가한다. ‘번뇌’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든, ‘번뇌’를 회피하려 하거나 없애려 하든,
그러고 있는 ‘나’가 바로 ‘번뇌’일 뿐이다.
의식이 쏠리고, 협착되고, 경도되면 우리는 ‘의식되는 나’
곧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의식의 수축과 축소, 쏠림과 협착, 경도는 진실로 ‘나’ 아닌 것을
‘나’와 ‘내 것’으로 집착하는 마음의 힘, 업력(業力)에 의해 일어난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 듯이,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의 윤회는 끝이 없어라.
- 법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