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2. 10:4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10월 14일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입니다.
주제가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 여기에 앞에 나눠 주신 걸 보면서, 오늘 이걸 읽으면서 하겠습니다. 앞의 진묵대사의 '사모제문'은 석두선우가 준비하셨고, 뒤의 '접시꽃 당신'은 청연 선우가 준비했습니다.
진묵스님은 아마 한국 불교 1600년 역사를 통해서, 민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았던 스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진묵스님이 민중으로부터 사랑받았다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느냐면, 아직도 진묵스님의 어머님의 묘소에는 지방 사람들이 해마다 벌초를 하고, 진묵스님 어머님의 제례를 올리죠. 진묵스님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400년이 되었는데도 말이예요.
진묵스님은 전라북도를 떠나지 않으신 분이예요. 전라북도의 전주의 봉서사(鳳棲寺), 그 이웃의 원등암(遠燈庵), 또 운문암(雲門庵), 조금 멀리로는 부안의 월명암(月明庵), 또 전주 모악산의 대원사(大元寺), 그렇게 머물렀던 분이죠. 진묵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진묵대사전이라고 해서 19세기초 의순스님이 진묵스님의 구전되고 있던 일화를 모아서, 진묵대사전이라는 것을 편찬했는데, 우리가 그걸 보죠.
한 번 요거를 읽으면서 얘기하기로 하죠. 이거는 진묵스님이 어머니에게 올렸던 제문이예요. 조선 조 스님들의 많은 글이 남아 있지만, 진묵스님의 어머니 제문보다 더 훌륭한 문장은 없습니다. 굉장히 짧습니다. 한문 문장의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짧은 글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죠.
震黙大師 思母祭文
열 달 동안 태중에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갚사오리까. 슬하에서 3년을 키워주신 은혜도 잊을 수가 없나이다.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해도 저의 마음은 오히려 만족치 못할 일이온데 백년도 채우시지 못하시니 어머니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표주박 한 개로 노상에서 걸식으로 사는 저는 그렇다 하더라도 귀머리도 풀지 못하고 규중에 시집 못 간 어린 누이가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 불공과 하단 사십구재를 마친 승려들은 제각기 방으로 돌아갔고, 앞산은 첩첩이고 뒷산도 겹겹이온데 어머니의 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 슬프기만 합니다.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心猶爲嫌焉 百年內未滿百年 母之壽何其短也
單瓢路上行乞一僧 旣云已矣 橫釵閨中未婚小妹 寧不哀哉 上檀了下壇罷 僧尋各房 前山疊 後山重 魂歸何處 嗚呼哀哉
이 사모제문은 진묵대사가 어머니 49재(四十九齋)날, 어머니 영전에 올린 제문이죠. 이 진묵스님의 제문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사랑, 그리고 규중에서 아직 시집 못간 어린 누이에 대한 사랑, 그 애절함이 이 짧은 문장의 제문 속에 있죠. 이 제문을 읽으면, 다른 장면이, 마치 영화를 보듯이 떠오르죠.
부처님께서는 아버지 숫다다나(淨飯王,Suddhodana)가 돌아가시자, 스스로 그 관을 메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죠. 붓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의 관을 메는 것으로 표하죠. 진묵대사는 제문이라는 것으로써 스스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표했고, 붓다는 아버지의 관을 멤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마음 속에 흘러나오는 그 사랑을 표했죠.
시집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입니다. 그 당시에 무려 100만권이 팔렸죠. 시집이 100만권이 팔리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도종환 이후에 시집이 100만권이 팔린 일이 없죠.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이라고 하는 시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그 마음의 언어로서 풀어냈죠. 접시꽃 당신의 중심의 주제는 사랑이죠. 진묵스님의 제문도 그렇고, 붓다가 관을 멘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오늘 주제도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굉장히 함의적이죠. 진묵대사가 제문에서 표하는 사랑의 의미와 붓다가 아버지의 관을 멘 사랑의 의미와 도종환이 접시꽃 당신에서 쓴, 죽은 아내를 위해서 지은 시의 사랑의 의미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겠죠. 내가 오늘 이것을 주제로 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라고 나는 믿어요. 사랑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생명은 사랑이죠. 무정물은 모르겠지만,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생명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죠.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곧 생명입니다. 생명은 사랑이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자애심을 강조하시고, 또강조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자비경도 일체의 모든 생명에게 자애심을 가지라는 얘깁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너도, 모든 생명체는 자애심이 마음 속에 충만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자애심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자애심이 없으면, 설사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박제화된 인간입니다.
한국불교의 폐단 윤리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다
한국 불교의 폐단은 깨달음을 박제화시키는 거예요. 깨달음을 박제화시키니까, 윤리 도덕이 박제화되죠. 수덕사 방장 설정은 어느 외국인과의 대담에서, 경허 만공의 일화를 들면서 깨달음을 논했죠. 한겨레신문에 그게 실린 것을 내가 읽었어요, 봄에. 그가 말하는 깨달음은 박제화된 거죠. 생명력이 없는 겁니다. 정토회 법륜이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한다고 주장해요. 그가 말하는 깨달음은, 그가 말하는 윤리 도덕은 박제화된 거죠. 만약에 설정과 법륜이 말하는 깨달음과 윤리와 도덕이라면, 불교는 인간 세계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존재해서는 안 되죠. 반드시 멸절시켜야 되며, 반드시 제척시켜야 됩니다.
윤리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없습니다. 왜 윤리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이 없느냐? 윤리 도덕은 자애심의 발현이기 때문이죠.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애심이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나오는 것을 말하죠. 깨달음을 박제화시키고, 윤리 도덕을 박제화시키면 안 됩니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근본인 본질을 말하죠. 다른 게 윤리고, 다른 게 도덕이 아닙니다. 아까 나는 사랑의 본질은 생명이라 그랬어요. 모든 생명체는 자애심이 있을 때만이 생명체의 가치가 있죠. 그것이 박제화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왜 자애심을 강조했는지, 우리가 그것을 깊이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이 자애심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마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 도덕을 초월한다(?) 맞습니다.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하죠, 깨달음 자체는. 그러나 인간은 윤리 도덕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윤리 도덕을 떠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인간을 떠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다르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팔정도를 강조하셨죠. 팔정도가 뭔가요? 팔정도가 윤리 도덕입니다. 팔정도의 가르침이 윤리 도덕이예요. 팔정도의 실천이 윤리 도덕이죠.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사고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올바르게 노력하고, 올바르게 깨어 있고, 올바르게 마음을 평정시키는 것. 이게 윤리 도덕이 아니고 뭔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법(末法) 세상이 되면 외도(外道:불법을 섬기지 않는 무리)가 나의 가사를 훔쳐입고, 나의 정법(正法)을 훼손할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예요. 말법이 되면, 외도가 나의 가사를 훔쳐입고, 나의 정법을 훼손할 것이라 그랬어요. 바로 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설사 경에 그 말이 있다 할지라도 옳지 않으면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설사 그런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옳지 않으면 따르면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요? '설사 내가 한 말이라 할지라도, 너희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옳지 않으면, 따라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45년 설법을 딱 한 문장으로 응축시키면, 이런 문장으로 구성되어지죠. "나는 옳다." 부처님의 45년 말씀을 한 문장으로 구성하면 '나는 옳다'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나만이 옳다거나, 너는 틀렸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예요. 나는 옳다는 거예요. 나는 옳기 때문에 45년간을 꺼리낌 없이 흘러나오는 대로 그냥 둘 수 있었던 거예요.
부처님의 45년 설법의 핵심적 주요 내용은 자애심입니다. 자애심을 빼 놓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담아낼 것이 없어요. 자애심이 다르마입니다. 다른 것이 다르마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시죠. 자애심이 충만하지 않는 한 깨달음은 얻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내 마음 속에 자애심이 넘쳐 흘러야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박제화된 깨달음이죠. 윤리 도덕을 초월한 것이 깨달음이라면, 붓다가 무엇때문에 아버지의 관을 메었고, 진묵대사 무엇때문에 49재날 제문을 지어 올리면서 슬피 울었겠는가? 중국 임제종의 중흥조 오조 법연(五祖法演)은 어느 날 슬피 울죠, 젯상을 차려놓고. 그의 제자 원오극근(園悟克勤)이 묻죠. "무슨 일 때문에 스님께서 이렇게 슬피 우신단 말씀입니까?" "오늘 내가 진정극문(眞淨克文) 선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를 알지는 못 한다." 오조 법연은 진정 극문과 상면한 적이 없어요. "불법이 사람들에게 복되게 하는 것은 눈밝은 스승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지만, 그는 눈밝은 스승이다. 그런데 그가, 그를 이을만한 훌륭한 제자가 있다는 말을 내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을 위해서 내가 슬피 우는 것이다." 오조 법연이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입니다.
다르마의 중심은 자애심을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자애심이 다르마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아까 표현했듯이, 그런 불교가 있다면, 이 우주 끝을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그런 불교는 말살시켜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자애심과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형형색색의 단풍과 같죠. 지금 가을 단풍이 우리 마음 속까지 와 있잖아요? 어떤 단풍은 노랗고, 어떤 단풍은 붉고, 어떤 단풍은 불그스럼하죠. 각자가 각자의 모습으로서 스스로를 뽐내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애심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붓다는 붓다식으로, 진묵선사는 진묵선사식으로, 도종환은 도종환 식으로. '어떤 것이 깊다, 얕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를 논하는 것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소리야.
내가 왜 주제를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라고, 주제를 정했는지 아세요? 눈물에 젖는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눈물에 젖을 수 있다면, 눈물에 적셔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죠. 눈물에 젖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예요.
사랑은 오직 한 가지에만 젖죠. 오직 그것만이 사랑을 적실 수 있어요. 그것이 뭔 줄 아세요? 이거는 화두입니다.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아요. 눈물에 젖는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죠. 근데 오직 사랑은, 오직 한가지에만은, 그것에는 젖어요. 아주 촉촉히 젖죠. 마치 가을날에 어머니가 열어놓은 빨간 고추가 이슬에 촉촉히 젖는 것처럼.
오늘의 주제가 '사랑은 눈물에 젖지 않는다' 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눈물에 젖지 않는 사랑을 키우고 또 키워야 됩니다. 나는 그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죠. 나는 그것이 기도라고도 생각해요. 나는 그것이 깨달음이라고도 여기죠. 그것이 윤리고, 그것이 도덕이죠. 이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빼고 나면, 뭐가 있나요? 이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빼고 나면, 박제화된 인간 좀비들의 세계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음의 사랑을 키우는 좌선을 잠시 하겠습니다.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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