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면목(本來面目)

2020. 1. 19. 10: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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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면목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을 가리키는 방편(方便)의 말이다. 방편(方便)의 말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른 방편(方便)의 말로 깨달음, 진리, 법(法), 본성(本性), 자성(自性), 진성(眞性), 불성(佛性), 참나(眞我), 도(道), 진여(眞如), 여래(如來), 일심(一心), 진심(眞心), 성품(性稟), 부처(佛), 선(禪), 마음(心), 법신(法身, 공(空), 허공성(虛空性), 무(無), 무생법인(無生法印), 통일장(統一場), 전시안(全視眼), The all seeing eye,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존재,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현전 등등으로 말하고, 다른 방편의 말로 말하면 애국가에도 나오는 하느님, 한님(Oneness),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하나님 등등 모든 종교나 철학에서 가리키는 우주삼라만상만물의 근원(根源), 근본(根本), 본질(本質)을 말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인 '이것'에 대해서 수많은 다른 이름과 그에 대한 설명을 수도없이 들었지만, 정작 '이것'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작용(作用)하고 있고 '이것'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이 뭣꼬(본래면목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대표적인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


마음 바깥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 등등으로 수행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도대체 안의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내면의 소리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건지, 뭘 알아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 도무지 깜깜하다. 무턱대고 내면을 들여다 본다고 해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사람들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다. 문득 아! 하고 한 순간에 툭깨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로 바닷가의 모래사장 속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격이다.


그러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찰나지간도 우리들과 분리되어있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쓰면서 살고있다. 그 쉽고 쉬운 '이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 찾고 있으며 또 왜 찾으라고 하는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확인해서 알고 나니 옛적 성현들의 그 오리무중 같은 선문답(禪問答)이나 법문(法門)들이 어찌보면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그렇게 찾고 찾아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을 확인해서 알아 보는 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것',  이 글을 보고 있는 '이것'이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다.


이러한 말은 참으로 많이 들어왔고 이러한 표현 역시 옛날부터 많이 써먹은 구태의연한 소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말을 하고는 '이것'에 대해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없으니, 이글을 쓰고 있고 '이것' 이나 이글을 보고 있는 '이것 이라고 말해봐야 사실 뜬 구름을 잡는 격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다. 이 글을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주의를 기우려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글을 구상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치는 그 손가락은 내가 생각해서 치고 있는 것인가? ‘손가락을 움직여!’ ‘이 손가락 근육을 움직이고, 또 저 손가락 근육을 움직이고, 옳지! 그 다음엔 그렇게 눌러야지!’ 하면서 키보드를 치고 있는가?


독자들께서 눈으로 이 글을 보고 읽기위해 좌우 위아래로 눈동자를 움직일 때 님들께서 일일이 그에 필요한 근육을 움직이라고 눈에 명령하는가? 그리고 눈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 경계의 모습들을 시신경을 통해 뇌로 보내어 종합적으로 정보화시키는 일을 님들께서 일일이 명령하는가?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일으키고 정리를 할 때에 뇌 속에 담겨있는 이글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뇌세포 속에서 일일이 빼내어서 논리적으로 일일히 정리하라고 명령하거나 가져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무엇이 그런 일들을 해주는 것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들, 즉 생각하는 거,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냥 의지(意志), 의도(意圖)를 일으킬 뿐이지 행위하는 것, 즉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근육과 호르몬과 세포 등등의 일체에의 작용에 대해서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즉 착각(錯覺), 즉 아상(我想)이 하는 것이 아니다.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고, 생겨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무언가가 모든 행위와 작용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또한 사람들이 의지 의도를 일으킬 때 그것들을 일으킬 수 있는 생명과 에너지 역시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만일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즉 아상(我想)이 정말로 나라면 나라는 존재는 이 몸 이대로 영원불멸(永遠不滅)해야 되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다 이루어져야 한다. 나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진정한 나라면, 내 몸에 병이 났을 때에 ‘병아 나아라.’라고 명령을 하고 병을 내 생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모든 치유법을 알고, 또 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통력을 얻어 불로장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생각,즉 착각, 즉 아상(我相)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조차도 어떤 생명력이나 에너지가 없으면 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고 있는 생각, 즉 아상(我想)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행위(行爲)하고 작용(作用)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 무엇이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다. 그 무엇 '이것'이 생명(빛의 입자)과 에너지(빛의 파동)다. 생명(빛의 입자)과 에너지(빛의 파동)가 바로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물질이다. 생명과 에너지가 그러한 기초물질들이 서로 인연(因緣 : 원인과 조건)이 되어 온갖 모습과 존재로 드러나는 법칙이다. 또한 그렇게 태어난 형상과 존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생명(빛의 입자)과 에너지(빛의 파동)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방편(方便)으로 일심(一心)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스며들어있지 않은 존재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한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생각과 육체를 나라고 믿는 그 분별되고 상대적 관념(觀念) 개념(槪念) 생각(生覺)의 방해 때문에 우리들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부처에게 있는 '이것'이 중생에게는 없는가? 돌맹이 바위에게는 없는가? 개미에게는 없는가? 나무나 꽃 식물들에게는 없는가? 금강경 제 삼분 ‘대승정종분’에서 말하는 “온갖 중생(衆生)의 무리인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사생(四生)과 유색·무색(有色無色 : 형상이 있는 것 없는것), 유상·무상(有想無想 : 생각이 있는 것 없는 것), 비유상·비무상(非有想 非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 것)”의 우주삼라만상만물에 '이것'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어서 육신이 부패해서 지수화풍(地水火風) 각각의 원소로 돌아갈 때에도 그렇게 돌아갈 수 있는 것 역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없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말하고, 감촉을 느끼고, 온갖 생각을 일으키고, 분별하고 인식해서 아는 그 모든 작용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과 육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고, 그 어떤 행위나 작용도 할 수도 없으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다. 오직 '이것'에 의지해서 사람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몸과 생각, 세상 모든 것이 온통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 본래의 나인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순간순간 변해가는 몸과 행동들 그대로가 '이것'의 화현(化現)된 모습이다. 그러니,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갇혀있는 개체적인 내가 진정한 나일 수 있겠는가?


 I AM THAT,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 하느님, 깨달음, 도道), 진리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바로 눈앞,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진정한 나인 것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보려면 손가락을 움직여보라. 그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면서 과연 내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내 생각 아닌 그 무엇 '이것'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말이다.


'이것'이 눈에 응해서는 사물을 보게 하고, 입에 응해서는 맛을 보게 하고 말을 하게 하고, 소리에 응해서는 소리를 듣게 하고,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게 하고, 몸에 응해서는 감촉을 느끼게 하고, 일에 응해서는 생각과 행동과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을 일러 생각 이전의 자리라고도 한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라고 하면 생각이 하나의 논리를 가지고 형태를 지니기 전의 것을 일러 생각 이전의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그것을 일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라고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무엇이든지 생기는 대로 다 그 속에 품어 안는다. 그래서 '이것'은 허공(虛空)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것이 생겨나도 생겨난 것들을 분별 차별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허공(虛空)과 같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하게 말을 한다고 내 입의 근육이 예쁘게 되고 말을 더 잘하도록 근육이 움직이는가? 내가 나쁘게 말을 한다고 내 입의 근육이 못나게 되고 말을 잘 못하도록 근육이 움직이는가? '이것'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말함에 필요한 것을 해줄 뿐이지 그 내용에는 조금도 분별도 하지 않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허공(虛空)과 같다고 한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는 우슷개 소리로 울다가 웃는 사람을 보고 놀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생각과 행동에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가 나면 그 화가 사라질 때까지는 기쁘거나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생각을 하지 못한다. 설사 그러한 마음이 들더라도 오히려 주책스럽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속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속이 상하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마음이 늘 편치 못해 기쁜 마음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듯이 그렇게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좋은 말을 하다가 나쁜 말을 해도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입을 어떻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도 어떻게 잘못되어 미끄러져 부끄러운 행동을 해도, 사람들의 분별을 하는 생각이 부끄러워할 뿐이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걷는 행동이나 미끄러져 부끄러운 행동이나 모두 분별함이 없이 그렇게 그러함에 맞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멋지게 걷다가 넘어지는부끄러운 행동은 우스운 것이니 그런 행동을 하지마!’하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는다. 만약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멋지게 걸을 때에는 절대로 미끄러질 수가 없다. 그리고 울다가 웃을 때에 만약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그것을 수치스럽다고 여긴다면, 울다가 절대로 웃을 수도 없을 것이며, 웃는다고 해도 입이 비뚤어진다든가 할 것이다.


하지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일으키게 해주고, 그 생각에 맞게끔 응해주며, 우주삼라만상만물의 어떤 것에도 그와 인연된 어떤 상황에도, 맞게 응해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그렇게 분별없이 모든 것에 응해주기에 허공(虛空)과 같다고 한다.


다만, 한 개체가 살아온 습관, 습성에 따라 '이것'이 다른 모양으로 드러날 뿐이지 '이것'은 자신의 어떤 의지(意志)도 의도(意圖)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나라고 조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한다. 또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우주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힘과 법칙과 공간을 다 가지고 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과거에는 없었던, 과거 사람들이 볼 때에 놀라자빠질 정도의 신비한 물건들과 방식과 법칙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그러한 물건들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비록 사람들의 머리로 신비한 물건들과 방식과 법칙을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칙이 본래부터 없었다면 그것들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새로운 금속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새로운 금속이 합성되었을 때에 그러한 금속이 합성될 수 있는 조건과 법칙이 본래부터 없었다면 과연 금속이 합성이 될수가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합성이 안 되는 금속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미래에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이 우주삼라만상만물 속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금속을 합성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에 내재되어있는 것이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다. 그래서 ‘이것'에는 모든 보물과 지혜가 다 들어있다.’고 한다. 다만, 인간들의 생각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을 뿐, 아예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空間)이 없다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처럼, 모든 보물과 지혜가 들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내세우지 않는, 분별함이 없고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이것',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다 멸한다 해도 '이것'은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사(不生不死)이기에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


'이것'은 우주삼라만상만물 그 어떤 것에도 들어있지 않음이 없어서(인간 몸의 세포 하나하나 그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티끌 하나라도 '이것'이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고 사라질 수가 없다.


성경(聖經)에 “하늘을 나는 새도 하느님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땅에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체와 생각 역시 '이것'이 없으면 어찌 생겨날 수가 있으며 사라질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내가 아니라, 그러한 개체적인 나라는 것이 있게 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그러한 나라는 것이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도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으며, 개체적인 나라는 것이 멸할 때에도 인연 따라 사라지게 하는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진정한 본래 모습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처에게도 있고, 중생에게도 있으니, 어찌 갈고 닦고 찾아서 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실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한 "나는 감춘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즉,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마련해놓으시고 인간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어서 생명나무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善惡果)만은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하였다.


생명나무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우주삼라만상만물이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 지는 것, 그리고 바깥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람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이 일어날 수 있는 인연과, 그렇게 일어나는 그 모든 감정들이 바로 생명나무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당부한 선악과(善惡果)란 무엇인가? 선악과란 바로 선과 악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이다. 바로 분별을 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을 일컫는 것이 선악과(善惡果)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고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사람들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보지 못하는 원인(原因)은 바로 이 분별심(分別心) 하나뿐이다. '이것'이 분별심에 가려져서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 즉 '이것'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을 하기 때문에 진정한 나, 본래의 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제대로 확실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수행을 통해 진정한 나, 본래의 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찾으려 하지만, 그렇게 찾으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자신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분별심(分別心)에 기인하는 것이니 어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끝도 없고 할 수도 없는것이지만, 이 글을 읽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비록 '이것'과 계합은 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에 대해 이해는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궁구하다보면 그것의 속성(屬性)을 알 수가 있다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앞에서 말했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조작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인연(因緣)에 응하여 그에 필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또 내어준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어서 인연이 생기면 인연에 응하여 비추어서 온갖 형상을 나타내지만, 인연이 다하면 곧 쉬어버리니, 거짓이 없고 내가 없다. '이것'은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아름다움도 없고 추함도 없다. 즉 '이것'은 어떤 분별도 차별도 없다


그리고 우주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나고, 우주가 팽창하고 내가 성장하고, 우주가 멸하거나 내가 멸해도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조금도 피로해하거나 지치거나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병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소리도 없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으며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다. 그래서 억지로 '이것'에 방편으로 이름을 붙여 이 글 처음에서 말한 본래면목, 자성, 진리, 일심, 부처, 마음, 본성, 깨달음 등등이라 칭할 뿐이다.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어떤 것을 빼앗아 다른 어떤 것에 보태거나 감하거나 해서 서로 빼앗거나 무너뜨리지만 '이것'은 어떤 것에도 차별 분별없이 나누어주어 어떤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빼앗거나 무너뜨리지 않으며, 어떤 것은 마음에 든다고 하여 더 나누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사랑이다. 자성 스스로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나 사랑이 가득하다.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하더라도 이미 지난 과거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만 집중하고 몰입한다. '이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오직 찰나찰나 흘러가는 매 순간순간에만 있을뿐이다. '이것'은 그래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어디에도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 머무는 바가 없는 그런 마음을 내서 쓰라.’고 하는 것이다.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에는 모든 지혜와 보물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것'을 반야지혜(般若智慧) 공(空)의 지혜(智慧)라고도 하고, 항사묘용(恒事妙用)이라고도 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하고,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도 한다. 진공(眞空)이 무엇인가?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묘유(妙有)가 무엇인가? 수많은 보물로써 인연에 응하여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지혜가 바로 묘유(妙有)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에 들어있기에 부처니 마음이니 중생이니 하는 어떤 분별 차별이 없다. 그래서 진여(眞如)라는 방편의 이름을 '이것'에 붙인다. 진(眞)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기를 ‘보탤 것이 없기에 진(眞)이라 한다’ 라고 했다. 보탤 것이 없다는 말은 곧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참(眞)이다 라는 말이다. 여(如)는 ‘세울 것이 없기에 여(如)라 한다.’고 했다. 세울 것이 없다는 말은 이것이 옳다, 이것이 거룩하다, 이것이 좋다 등 분별 차별할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참이고 진실하여 따로 내세울 것이 없음’이 바로 진여(眞如),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바다에 비유하니 “바다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가 매우 깊음이요, 둘째가 광대함이요, 세번째가 온갖 보배가 다함이 없음이요, 네번째가 온갖 형상이 비춰서 나타남이다. 진여(眞如)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라는 큰 바다 또한 매우 깊고, 광대하고, 온갖 보물이 다함이 없고, 온갖 형상이 비춰서 나타남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잘못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며(매우 깊음),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이며(광대함), 온갖 덕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며(온갖 보배가 다함이 없음), 나타내지 않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온갖 형상이 비춰서 나타남)“이라고 하였다.


매우 깊고, 광대하고, 어떤 분별도 없고, 잘못도 잘못 아님도 없으며, 모든 보배가 다 들어있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며, 온갖 형상을 비춰서 나타냄에 인연이 되면 언제든 인연이 원하는 어떤 형상이든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본래면목 진여 자성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 스스로는 움직임이 없어서 인연이 있으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곧 쉬어버리니 그 공적(空寂)함이 허공(虛空)과 같다. 그러니 '이것'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즉 조작하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진여(眞如)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의 공덕(功德)이다.


'이것'의 공덕(功德)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행동으로 바꾸더라도 우리의 몸은 그대로 따라준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약간 어색할 때에도 있겠지만, 몸을 움직이는 '이것'이 왜 그래? 하고 다른 행동을 거부하지 않는다. 만약에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나 몸을 움직이는 생명력(生命力)이 사람들의 생각처럼 분별(分別) 차별(差別)함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을 바꾸는 유연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사람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슬픔에만 잠겨있는 사람은 없다. 슬퍼하는 중에도 뜬금없이 우스운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화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것은 그때그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끼리 인연이 되어서 그러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온전히 진여(眞如)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그 자체(自體)이기 때문에 그러한 온갖 일들이 이렇게 저렇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분별을 하는 생각은 그러할 때에 자신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게 하는 '이것', 즉, 진여(眞如)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아무런 분별없이, 인연 따라 일어나는 우스운 생각이나 화나는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나 때에 따라 모두 이루어지게 한다. 왜 그런가? 본래면목, 진여, 자성, 깨달음, 부처, 도, 진정한 나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에는 나라는 것이 없고,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이것'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조작하는 일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생각, 전도몽상(顚倒夢想)인 분별심(分別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의 그러함을 도리어 잘못되었다고 탓하며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분별 망상 번뇌와 고통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할 뿐이며, 무심(無心), 무분별심(無分別心)이라는 것은 '이것'의 그러한 공덕, 즉 속성을 알 때 '이것'이 모든 인연(因緣)에 응하여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어주지만, '이것' 스스로는 분별(分別)이 없어서 '이것'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거나 무엇 하나 조작함이 없다는 사실만 알아도 우리는 우리의 본래 모습인 '이것'이 바로 무심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무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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