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항상 반쪽이면서 동시에 늘 꽉 차 있다
이제 그 '연기설'(緣起說)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알고 보면 이 '연기설'은 조금도 어려운 내용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우리들이
일상을 통해서 평소 늘 경험하는 일상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데 불과하니까요.
사실 인간들이 머리로 짜낸 이론(理論)이 어렵지, '진실'(眞實) 그 자체는 본래
어려운 것도 쉬운 것도 아닌 거예요.
실로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겠어요?
마치 '나무'가 있어서 '그림자'가 있고, '소리'가 있어서 '메아리'가 있듯이 말입니다.
때문에 '그림자'나 '메아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고 말하는 거구요.
만약 그것들이 '자체의 성품'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 즉 '인연'에 의지해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어엿하게 '제 성품'이 있는 존재라면, 부모의 인연이 없이도 혼자
태어날 수 있을 테고, 밥과 반찬의 인연을 빌리지 않고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어떠세요?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자! 이런 온갖 인연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그래도 <'내'노라고 ··· > 내세울 게 있습니까? 사실, 이 이치만 분명히 깨친다면,
즉 어디를 찾아봐도 '나'니, '내 것'이니 할 만한 게 도무지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 그러면 이 경우, 누가 '깨닫는 자'이겠으며, 무엇이 '깨달은 바'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몰록 근원으로 돌아가 귀명(歸命)하면 이때,
비로소 <본연의 '깨달음의 성품'(覺性)이 항상 '빛'을 놓고 있었다(放光)>는 걸
알게 되고, 이것을 바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며,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일러서 '깨달은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깨달음 없는 깨달음>이야말로 '참된 깨달음'이건만,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오직 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그 공덕으로 먼 훗날 이 '나'가 깨달음을
얻을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야말로 채찍을 잇고 또 이어서, 그것으로 별을
따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쉽게 정리해 봅시다. 이건 철학이니 논리학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도 평소 일상생활을 통해서
사물을 관찰할 때 늘 무의식중에 쓰고 있는, 아주 간단한 삼단논법(三段論法)이에요.
첫째, '인연'에 의지해서 나는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體性)이 없다. 둘째,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없으므로,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체의 성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것도 하나 둘도 아니고, 더구나 존재로서의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일어나는 일'들까지 망라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실다운 존재'가 아니라니 말이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락없이 '꿈'이나 '허깨비' 같은 것이라면, ― 그것이
어김없는 진실이라면, ― 과연 우리 모두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앞으로 이 법회를 통해서 두고두고 우리 모두가 함께 밝혀내야 할 일인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바로 '남(生)이 없는 도리', 즉 '무생법인'
(無生法忍)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만 겉보기에 생겨나는 듯 할 뿐,
실제로는 생겨나는 일이 없으며, 생겨나는 일이 없으므로 당연히 잠시
머물렀다가 변하면서 사라져 가는 이 모든 현상도,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건,
인공적인 현상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서,
전혀 실다운 존재가 아니다」라고 감히 설파하는 이 '무생법인'이야말로
저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아득히 능가하는, 인류 문명사상
가장 획기적인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비록 숱한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무생법인'은 붓다의 '하늘 북'(天鼓)이 울린 지 무려 250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울림이 사람들 가슴에 살갑게 닿을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일은 언필칭 말법시대라고 하는 현대에 와서, 20세기 초엽
철학이나 종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단의 천재적 과학도들에 의해,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 엄청난 사실이 정교하게 증명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 2500년이라는 시간 간격과, 동서양이라는 공간 간격을 넘어서,
전혀 상반된 출발점에서 내디딘 두 발걸음이 놀랍게도 '같은 때'에 '같은 곳'에
당도한 겁니다.
여러분,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남이 없고'(無生), '성품 없는'(無性) 그 자리는
본래 '시간'도 '공간'도 없고, '옳음'도 '그름'도 없는, 그런 자리였던 겁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선 '2500년 전'과 '지금'은 '같은 때'요, '동양'과 '서양'은
'같은 곳'인 겁니다.
이젠 상황이 일변해야 마땅합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그 전까진 '붓다'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교'라는 한 종교의 교조(敎祖)가
제창한, 그러니까 한 특정 종교의 유별난 교리(敎理)쯤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에요. 아니,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널리 일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한 측면이 강하죠. 더구나 그 내용이라는 게 우리들의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고 보면,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사연들은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요인은 그런
종교적인 편파성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데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인식작용' 자체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이 바깥 세계와 교섭을 가지면서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통로는 오직
'인식작용'뿐인데, 그런데 이 '인식작용'의 주역인 '의식'(意識)이라는 이름의 광대
(廣大)가 본래 '반편'으로밖에 구실할 수 없게끔 틀 지워져 있으니 어쩝니까?
무슨 소리냐 하면, ―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사물을 관찰하고는 그 이해된 바를
말로 표현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이다" 혹은 "∼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말꼬리에 주목해 보세요.
항상 "∼이다" 아니면 "∼ 아니다" 하고 결정적으로 끝을 맺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면 그것은 '나의 경험'이 될 수 없겠지요.
결국 이렇게 해서 '의식'에 의해 수집되고 분석되어, '기억'의 형태로 축적된 우리들의
'지식의 창고'는 몽땅 '반쪽'만의 알음알이의 파편들로 꽉 차 있는 거예요. ·
·· '선'(善)을 배제한 '악'(惡)과 '악'을 배제한 '선', '고'(苦)를 배제한 '낙'(樂)과
'낙'을 배제한 '고', '옳음'을 배제한 '그름'과 '그름'을 배제한 '옳음', '깨달음'을
배제한 '미혹함'과 '미혹함'을 배제한 '깨달음' 등등, 그 모두가 이런 식으로, 본래
'하나'일 수밖에 없는 '진리의 세계'를 깡그리 두 토막으로 나누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본래 분열되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꾸려지고 굴려지고 하는
우리 인간들의 인식작용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수행자들이 그 '분열된 마음'을 바꾸어서 '완전한 마음'으로 하려는, 즉
'분별지'(分別智)를 여의고 '일체지'(一切智)를 얻으려는 어떤 노력도 결국은
또 하나의 분별이요, 간택(揀擇)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 이 대목에서 거의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길을 잘못 들고 말지만, ― 왜냐하면
그 모든 과정이 필연적으로 '의식의 영역'을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식 자체가 본래 치우친 틀 속에 갇힌 것이고, 따라서 늘 '반편'으로밖에 기능할
수 없도록 주조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는 건
이미 밝혀졌잖아요? 그러니까 '의식'이 일으키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한
일이라도 결코 속아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행해지는,
이른바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유위행(有爲行)은 결국은 또 하나의
'미혹'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알고 보면 이름만 바뀌었을 뿐 늘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서 <분별하는 것도 보지 않고, 분별하는 사람도
보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게 된 것도 보지 않고, 분별하지 않게 된 사람도 보지 않게
되면>, 이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분별을 여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경지를 얻은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 '깨달은 사람'(覺者)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항용 결정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해서 '큰 지혜'(大慧)의
경지를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급한 대로 우선 그의 치우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방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 즉 '있음'에 집착한 사람은 '없음'으로써 다스리고,
'공(空)한 도리'에 집착한 사람은 '있음'으로써 다스리고, '정법'(正法)에 집착한
사람은 '사법'(邪法)으로써 다스리는 식으로, ― 사실 선지식의 처지에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는데, 다만 중생의 '무명'(無明)을 제하기 위해서 말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무명'이 그대로 '부처 지혜'인 경지>를 얻게 되어서야 비로소
저절로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더듬어 헤아릴 곳도 다해서, 지금 있는
이대로가 항상 '열반의 땅'인 겁니다.
― 이 경지에 이르면 저 '화신불'(化身佛)이 49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열반에 들고 한 것이 모두 권교(權敎), 즉 방편교(方便敎)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성교(聖敎)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
만을 달달 외워 가지고 다니면서, 마치 크게 이룬 양 우쭐한다면, 이야말로
선문(禪門)의 말마따나 '당나귀 해'에도 깨달을 분수가 없다고 할 만하죠.
여기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주고받는 문답내용을 잠깐 소개해 볼까요?
―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구백비에 맞추어서 꾸민 말이 아닙니다.
이 양자물리학자들은 늘 '양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
과연 그들은 '양자'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는 걸까요? ··· 여기서 자칫 잘못 '부리'를 놀리면 입이 뎁니다.
ⅰ) '양자'는 존재합니까? 아니요. ⅱ) '양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ⅲ) '양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아니요. ⅳ) '양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아니요.
이들은 '양자'의 성질에 대한 어떤 결정적인 언급도 '양자'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고,
나머지 다른 것은 옳지 않다는 식의 접근은 온당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죠.
다만 이 네 가지 경우의 언급은 각각 나름대로 '양자'가 존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똑같은 비중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매우 독특한 견해를 가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에요. 요컨대 어떤 '지견'에도 집착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한 말과 같은 뜻인 겁니다.
따라서 이 같은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법은 이렇게 알아도 옳고, 저렇게
알아도 옳다>는 뜻이 되는가 하면, 또한 동시에 <이렇게 알아도 틀리고, 저렇게
알아도 틀린다>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다시 말해서 그 말에 대해서 결정해(決定解; 단정적인 결론)를 짓지만 않는다면,
그 말 자체야 무슨 허물이 있겠어요? ···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이 양자물리학자들은
'양자'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아무 '견해'도 갖고 있지 않는 걸까요? ― 이 경우 <알되, '앎이 없는 앎'이
'참된 앎'이니라> 하는 말이 언뜻 머리에 떠오르면 이것은 바로 '앎이 있는 앎'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앎'이 없는 것>과 <'앎이 없다'고 아는 것>과의 차이를 알 수
있겠어요? ···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여전히 이 말 가운데서 규범을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게 범부의 근성입니다.
앙산 선사(仰山禪師)가 꿈속에, 오백 성현(聖賢)이 모인 미륵회상(彌勒會上)에서
제이좌(第二座)로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존자(尊者)가 백퇴(白槌)를 쳐서 대중에게
알리기를, 「오늘은 제이좌 스님께서 설법하실 차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선사가 일어나서 대중에게 말하기를,···
『마하연법(摩訶衍法, Mah y na, 大乘法)은 사구백비(四句百非)를 여의었으니,
잘 들으시오, 잘 들으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설법을 들은 오백 성현이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서 각기 제 처소로 흩어져 돌아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낭야각(瑯 覺)이 이 화두(話頭)를 들고(拈)는 말하기를,···
『말해 보라. 오백 성현이 흩어졌다 하니, 이는 앙산을 긍정한 것인가, 긍정치 않은
것인가? 만약 긍정했다면 도리어 앙산을 저버린 것이요, 만약 긍정하지 않았다면
마치 '평지'(淨土) 위에서 억지로 교분(交分)을 맺은 것과 같도다.
산승이 오늘 두 눈썹을 아끼지 않고 여러분 앞에서 주(註)를 내어 주리라.···
「'마하연법'은 '사구백비'를 여의었나니, ···」 그대가 만약 제방(諸方)으로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여>, 제방에서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지옥으로 들기가
쏜살같으리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백 성현은 바로 오온(五蘊), 즉 '몸'과 '마음'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몸'과 '마음'이 본래 체성(體性)이 없어서 작용이 없는 건데, 사람의 마음이
여기에 머물러서, 이 '몸'과 '마음'으로써 '작용의 주체'를 삼는다면, 여여한 본체를
등지고 허망한 대경(對境)을 좇게 되어서 '생사의 바다'에 잠겨 버릴 것이고,
이 '몸'과 '마음'이 작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회심하게 되면,
― 곧 오백 성현이 흩어져서 제 처소로 돌아가면, ―
사구백비를 여의어서 곧 대승법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요약하건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실상(實相)을 밝히고 보면, <늘 반쪽이면서도
동시에 항상 꽉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의식'이 지어내는 온갖
알음알이들은 딱히 옳다커니 그르다커니 말할 수가 없어서, 늘 반쪽이지만,
그러나 그 의식의 본바탕인 '한 마음'은 항상 참되고 여여(如如)해서, 늘고 줄고
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달의 모양은 늘 '초승달'이나 '반달'이지만, 실제로 그 '달' 자체는
항상 '만월'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묵묵히 얻어야'(默得) 비로소 상응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대우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