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생명사상

2007. 12. 16. 10:0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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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생명사상  
진월 스님(동국대 정각원장)

1. 머리말  

 근래에 이른바 “자살테러”를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생명 살상 사건과 갈등 및 분쟁 야기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보도는 지구촌 공동체에 “생명”과 “평화”에 대한 우려를 점증시키고 있으며, 그 문제 해결에 대한 진지한 담론과 대안의 모색이 절박한줄 안다. 시대의 양심을 지닌 우리나라의 지성인들도 상황 호조에 이바지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가운데, 생명에 대한 자비와 실존적 내면의 평정 및 이웃 사랑의 평화를 가르치고 수행하는 종교인들의 책임 및 사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도 요청되고 있으며, 주어진 역할에 적절한 솔선수범도 기대되고 있다.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보편적인 진리를 설파하고 있지만, 그 교설도 시대와 지역적인 문화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어 왔다. 한국 불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명 및 평화를 위한 담론에 참여하는 동지들과의 탁마를 위해 소회의 일단을 나누어 보려한다.        
 불교는 대체로 미망에 사로잡인 뭇 생명(중생)들의 생사(生死) 세계가 고통과 번뇌로 점철되는 윤회(輪廻) 세계임을 알리며, 아울러 생사의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 및 열반으로 상징되는 바, 영원한 생명의 깨침과 극락(極樂) 세계에 도달할 방법을 가르친다. 이렇듯 불교는 생명의 부정적 측면은 물론 긍정적 측면을 동시에 연계하여 문제 삼고, 궁극적으로는 깨친 이의 입장에서 그 모든 차별이 초월된 경지인 실상 (實相)의 세계를 제시한다. 불교는 생명의 지속적인 변화 현상과 아울러 영원히 불변하는 실상을 깨우치며, 뭇 생명 및 우주의 본질에 대한 해명과 아울러, 미혹한 이들의 제약과 그 한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가르친다. 탐욕에 지배되는 어리석은 중생은 번뇌와 고통 속에 헤매면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지만, 진리와 정의를 깨달은 이들은 서로 평화를 이루고 누린다. 즉 불교의 주제는 생명이며 그 인식과 수행의 기초 및 궁극적 목표는 성불과 정토의 실현으로서 개체와 전체의 완전한 평화를 성취함이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공통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교가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1700여 년 전 한국에 들어와 한국 문화 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우리의 생명 평화 사상과 실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왔다고 짐작된다. 여기서는 먼저 생명 및 평화에 대한 보편적 불교의 이론과 수행법 가운데 기초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 그 것을 한국인이 어떻게 수용하여 살아냈는지 전통적 사례를 들어 음미해 보려 한다.

2. 불교적 생명 사상

 1). 인식론적 기초

   (1). 삼법인(三法印 )
 석존의 사상 가운데 모든 존재의 특성을 알려 주는 대표적 교설로는 이른바, ‘세 가지 진실한 모습(삼법인Trividya)’으로서 ‘모든 현상은 항상 함이 없다 (諸行無常印 Anitya sarva-dharma lakṣaṇa), 모든 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諸法無我印 Niratmana sarva-dharma lakṣaṇa), 번뇌의 불이 꺼지고 나면 고요하고 평안하다 (涅槃寂靜印 Śāntaṃ nirvanam lakṣaṇa)’라고 하는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이는 사람의 생명도 보편적 존재의 한 부분이며 전체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내 것이라고 집착할 것이 없지만, 마침내 실존적 및 사회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이상적 상태로 변화할 수 있음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현상을, 일시적인 생물학적 영역의 인식을 넘어, 한량없이 큰 하나의 생명체가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총체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고, 그렇게 무상한 현상을 초월하여 항상 안락한 열반의 세계 즉 절대적 종교 세계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미혹한 소아적 번뇌의 극복과 실상을 깨달음으로 궁극적이고 자연적인 평화와 안락을 성취함이 살림살이의 목표이며 의미가 되는 생명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연기설(緣起說)
 불교의 근본으로 통하는 연기설(Pratītyasamutpāda)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는 존재의 참모습을 나타낸 교설로서, 모든 존재의 공간적 시간적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상대적인 존재구조와 조건을 밝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도 모든 우주의 총체적 존재구조 안에서 파악해야 될 줄 안다.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의 존재가 필요하며 따라서 어떠한 자기 이외의 존재라도 결코 나와 무관한 것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실존적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려면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공존공생의 존재론적 이유와 당위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일시적이며 독자적이고 개체적인 절대적 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통시적이며 연대적이고 총체적인 연기적 생활관을 보게 된다.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적 생활방식은 지양되며 사회적 인간관계를 배타적 경쟁체제가 아닌 포용적 상생체제로 인식하는 유기적 협조가 요청된다. 연기론적 생명관 혹은 생활관은 인간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및 자연 환경적 존재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용되어야 함과 아울러 그에 따른 당위로서의 공동체 윤리를 지켜야 됨을 시사한다.

   (3). 업설(業說)
 인간 사회 및 자연에 이르는 생태계의 온갖 존재 사물들은 모두 어떤 원인과 수반된 조건으로서의 연(緣), 즉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의 합성어인 인연(因緣) 속에 생성되었다가 변화 소멸되고 있다. 인연과 과보(果報)의 말이 합쳐지고 줄여져 인과(因果)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과보를 형성시키는 업(Karma) 즉 행위의 과정이 중요시된다. 업은 일과 행위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불교 안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쓰여 왔다. 불교에서는 행위를 이해할 때, 신체적 행위뿐만 아니라 말을 통한 언어적 행위는 물론, 생각을 통한 의지적 행위도 중시해 왔으며, 업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연기설과 결합하여 초기 불교 인생관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은 금생에 짐승 같은 생각과 행위로 살면 내생에는 그 과보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으며 지옥에 가거나 천상에 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 즉 즐거움을 가져오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 즉 괴로움을 가져옴으로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업을 지어가기에 달렸다 (自作自受 自業自得)고 믿어왔다.
중생의 삶을 현상적으로 해명하는 인연업과의 전개논리는,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존재로서의 특성과 그 생명들이 머물러 사는 곳을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로서 역사적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정보라 하고 국토 등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의보라고 한다. 정보를 중생세계, 의보를 기세계(器世界) 즉 중생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존재로서의 세계라고 한다. 인간과 환경은 개인과 집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공통의 뿌리를 가진 업보로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모든 생명들은 인(因)이요 국토와 환경은 연(緣)으로서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세계형성과 진행의 주체이다. 인간과 자연 환경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 상호 무시하고 배제할 수 없는 필연적 관계에 있다. 우리가 제대로 잘 살려면, 오직 환경을 인간 자신과 한 몸, 한 생명으로 인식하며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서로 아끼며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됨을 깨우친다..

   (4). 『화엄경(華嚴經)』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화엄경』 (Avatamsakasutra)의 특성으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에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는 인간 및 생명의 존엄성 강조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는 유심사상 및 잡화엄식(雜花嚴飾)의 화엄회상, 즉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정원’의 다양성과 통일성 혹은 보편성과 특수성 등에 대한 교설이다. 이 자연 세계는 자연 그대로 이미 완전무결하여 거기에 어떤 개조나 변경할 필요가 없다. 잘 지키고 가꾸며 누리면 되는 것이다. 광대한 우주 가운데의 조그만 행성의 하나인 지구와 그 부분인 육지와 바다 모두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와 미래세대 모두 잘 살기 위해 보존 유지되어야 할 아름다운 화장세계의 일부이다. 그러한 깨달음의 눈을 통해 현실 상황을 보면, 사람마다 각자가 모두 평등하게 고귀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각자의 개성과 역할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필요한 즉, 모든 주체가 동등하게 인정되며 귀천 없이 고유한 존재 이유를 평가받는다. 개인마다 부처와 같은 이상적 인격실현을 위하여 무한히 향상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평등하게 온전히 갖추고 있으며, 자연환경도 부처와 같이 존중하여야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갈 수 있도록 사회문화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며, 자연환경도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경외의 존재로 대하여야 된다. 오늘의 우리사회 현실에서도 화엄사상의 실현이 모든 생명 주체의 평등한 입장존중과 다양한 직업의 육성, 환경보호와 평화 복지의 조화로운 문화를 조성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는 길임을 알게 한다.

 2). 수행론적 접근

   (1). 중도행(中道行)  
 석존의 최초 설법인 사성제(四聖諦 Catvāri ārya-satyāni)는 고통스러운 인생 현실(苦)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며 그 원인(集) 분석과 아울러 고통을 해소(滅)의 온전한 해결방법(道)을 가르치는 간결하고 명료한 불교의 기본 교설로서 근본수행방법인 중도행을 지시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떠한 괴로운 문제도 원인이 있고 그 해결을 위해서는 원인 규명과 적절한 상응조치가 필요하다는 존재론적 인식론과 근본적 방법론이며, 모든 문제의 접근과 해결을 위한 대안 모색의 기초가 됨이다. 따라서 생명 문제도 고성제로 보고, 그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법도 도성제 안에서 구할 수 있다. 도성제의 구체적 예인 팔정도(八正道)는 인생의 평안과 해탈에 이르는 바른 길로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적중(的中)하게 하는 바, 올바른 삶의 길이라는 뜻으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첫째 존재의 연기구조와 사성제를 이해하며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는 바른 견해 (①正見 Samyag-dṛṣṭi)를 갖고, 바르게 생각하며 (②正思 Samyak-saṁkalpa), 바르게 말하고 (③正語 Samyag-vac), 바른 행위를 하며 (④正業 Samyak-karmānta), 바른 직업 생활을 하고 (⑤正命 Samyag-ājīva), 바른 노력을 하며 (⑥正精進 Samyag-vyāyāma), 바른 관찰수행을 하고 (⑦正念 Samyak-smṛti), 끝으로 바르게 정신을 집중 명상을 하여 (⑧正定 Samyak- samādhi) 열반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정견과 정사는 올바른 인식과 지성적 추구로 삶의 지혜 방면을, 정어와 정업 및 정명은 도덕과 윤리적 삶의 실천 방면을, 정정진과 정념 및 정정은 마음의 계발과 안정 방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의 바람직한 생활과 아울러 다른 이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생활 즉 이웃과 사회 공동체의 평화로운 발전을 위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팔정도 가운데 생명을 중시하는 평화로운 공동체적 생활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조목으로는, 정업과 정명을 들 수 있다. 정업은 개인과 집단의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며, 다른 생명들을 자비로움으로 돕고 자신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올바른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정명은 개인의 직업과 생활 방식에 관련하여 다른 이들과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건전한 직업과 올바른 생활을 할 것을 지시한다. 즉 생명을 살상하는 무기나 인신매매, 마약이나 도박업 등 퇴폐적 영업에 종사함을 금지하고 사회에 유익하고 건강한 생업을 권장한다.
       
   (2). 계율행(戒律行)
 불교의 생명존중사상과 생활윤리 및 행동지침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계율인데, 이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제정된 규범이다. 수도자들이 건강해야 정진할 수 있으며, 이웃에게 방해나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도 우선 육신의 유지와 보호가 전제됨으로 그를 위한 물질적 문제도 필수적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다. 원래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실천을 강조하며 바람직한 행위 및 좋은 습관으로 안내하려는 계(戒 Śila)와 원만한 공동생활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이고 타율적인 규정인 율(律 Vinaya)의 합성어로서, 계율은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도들의 성별 (性別) 및 계상 (戒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재가자에겐 계목 (戒目)이 적고 단순하며 포괄적이고 남녀의 구별이 없으나, 출가자에겐 계목이 많고 복잡하며 구체적이고 여성에게는 더 많다. 출가자의 계목은 미숙한 예비수련자와 성숙한 정식 수도자, 남성과 여성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근본 내용에는 비슷하다. 초심의 남녀 견습생인 사미 (沙彌 Śrāmaṇera)와 사미니 (沙彌尼 Śrāmaṇerikā)는 함께 10계를 받아 지키는데 첫 번째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이다. 이는 수행자가 되는데 필요한 기초로서 미리 포괄적인 계율을 제정하여 윤리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데 우선의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한국의 정규 남성 수행자인 비구는 250계, 정규 여성 수행자인 비구니는 348계를 지닌다.
먼저 재가자들이 받아 지키는 계율을 보면, 5계 (Pañca śila)와 8계 및 10계 (Śikṣāpada)가 있다. 이들 세 가지 계율 모두에서 첫 번째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 (不殺生)’로서 생명존중사상을 보여준다.
 대승계는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는 물론 이웃과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생활 방식이다. 개인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절제하는 소승류의 계율을 포함하며 남을 위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적극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하고, 나아가 모든 중생을 보살피며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계율의 조목도 구체적인 사건위주의 서술보다 원리를 제시하여 윤리정신을 북돋우고 결과보다 동기의 중요성과 자발성을 강조한다. 대승전통의 대표적인 계율로서 『범망경 (梵網經)』도 첫 번째로 “남을 해치지 말라”고 가르치며, 평화로운 생활 방식을 제시한다. 나아가 생명을 해치지 않음에 그치지 말고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잘 살도록 돕게 한다.

   (3). 보살행(菩薩行)
 보살(Bodhisattva)은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혹은 이웃을 깨우치는 존재 즉 깨닫는 혹은 깨달은 생명체를 가리킨다. 보살의 수행은 깨달음을 지향하되 자신과 남을 아울러 이롭게 하려고 한다(自利 利他). 보살 수행의 보편적 덕목으로 이른바, 육바라밀이 있다. 바라밀(波羅密 Pāramitā)이란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함 (到彼岸), 혹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보시(布施 Dāna), 지계(持戒 Śīla), 인욕(忍辱 Kṣānti), 정진(精進 Vīrya), 선정(禪定 Dhyāna), 지혜(智慧 Prajñā)를 가리킨다. 보시는 자기가 가진 재물과 지식 등을 이웃과 나누며 경제정의를 자비로서 실천함이고; 지계는 탐욕심을 절제하여 검소하게 살며 이웃과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는 공동체윤리를 지킴이며; 인욕은 어려운 사정을 적절히 참아내며 평화를 추구함이고; 정진은 근면하게 연구 수행하며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며 문제해결에 집중하여 방안을 모색함이고; 지혜는 건전한 생활을 위한 올바른 자료와 방법을 확보하며 과제를 해결하는 슬기로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보살은 자신과 이웃에게 깨달음을 함께하는 열린 생명이며 보살행은 생명의 이상을 성취코자하는 평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4). 참선(參禪)
 선(禪)은 산스크리트 dhyāna의 음역으로서 정려(靜慮)나 사유수(思惟修)를 뜻한다. 집중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삼매(三昧 samādhi)와 뜻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 하고 그 수행을 참선이라 한다. 선정은 윤리와 도덕적 생활규범에 관련한 계율과 교리 및 지식에 관한 지혜와 아울러 불교 수행의 중추를 이룬다. 우리의 삶은 마음에 따라 그 전개가 좌우되는데, 참선은 완전한 본래의 마음을 찾고 거기에서 지혜를 얻어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전인적(全人的) 노력이다. 우리가 바람직한 언어와 신체적 행위를 하려면 마음을 맑고 밝게 하여 뜻을 올바르게 함으로서 가능하므로 참선은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선결조건이다. 참선의 토착화와 상황적 변용의 하나로 선종(禪宗)의 청규(淸規)가 있는데, 이는 선수행자들이 일정한 지역에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생활하며 수행의 효율과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결과로서 집단노동과 역할분담으로 재물의 공동생산과 사용 및 검소하고 질박한 내핍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농경시대에 계발된 정신 수행을 농림경제생활과 일치시켜 노동을 단순한 물질적 생산개념을 초월한 종교적 수행의 당위로 승화시켰으며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기보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하며 수도에 전념하려고 노력한 환경친화적 경제생활의 선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불교전통을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을 강조하는데, 이는 일상 수도생활에 있어 모든 시간과 공간을 통해 항상 깨침으로 통하는 문인 화두(話頭)에 관심을 집중한다. 요즈음 “화두”라는 말에 대한 이해는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전문적 영역을 넘어 사회적 관심으로 확산하여 일반화된 듯하다. 상식적인 화두에 대한 인식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긴박하고 난해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현안 과제를 가리킨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여 각자에게 혹은 집단적으로 당면한 문제로서, 당장은 묘안이 없지만 꼭 해결해야할 절박한 과제로 통한다.
참선자는 어디에서건 항상 참선하는 생활 혹은 생활하는 참선(生活禪)으로 화두와 생활이 둘이 아니게 열성으로 매진 몰입하여 이른바,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여 화두와 참선자의 삶이 하나가 되고 문제의식이 최고조에 이르러야 마침내 타결의 계기를 같게 된다. 수행자의 생활과 참선이 둘로 나뉨이 없이 하나가 됨을 불이선(不二禪)이라고 하며, 여러 분야에 적용시킬 수 있으니 이를테면, 농업과 참선이 둘이 아닐 때 선농불이(禪農不二)나 선농일치(禪農一致), 참선과 다도가 하나일 때 다선일미(茶禪一味), 참선과 작시(作詩)가 하나일 때 시선일치(詩禪一致), 서도와 관련하여 선서일치(禪書一致), 무도와 관련하여 선무일치(禪武一致) 등을 들 수 있다. 참선은 불교수행자만의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며 비종교인에게도 각자의 삶을 최선으로 성취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3, 한국불교의 생명문화

 1). 고대: 국선(國仙)ㆍ화랑도(花郞道)/풍월도(風月道)  
 이 제도와 운동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창도한 것인데, 그는 신라 제24대 임금으로서 불교 구현을 위해 헌신하였고 만년에는 출가수행을 하기도 했는데, 수많은 절을 짓고 법회를 많이 열었다. 그의 주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풍월도 즉 국선 화랑도의 창설인데, 이는 청소년들을 교육양성하기 위한 정책적 방안이었다. 풍월도는 그 제도와 내용이 나라를 순화하고 밝히는 수련의 공능을 상징하는 말이며, ‘화랑’은 ‘꽃다운 젊은 이’로서 풍월도를 수행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국선은 화랑들의 대표로서 국가적 지도자로 경칭한 말이다. 국선은 미륵보살과 같이 미래 사회의 구세자임을 암시한다. 김영태, 『佛敎思想史論』(서울: 민족사, 1992) 299-310쪽 참조
이는 분열된 한반도를 통일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국가적 지도자로서의 인격을 함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화랑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영향과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이 모두 진흥왕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무력보다 정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 사상이다. 화랑들의 생활신조와 행동강령이었던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원광(圓光) 법사로부터 전해진 것으로서, 국가와 가정에 모범적으로 충실할 것과 아울러, 생명존중과 인간 신뢰가 중요한 내용임에 주목할 만하다. 세속오계란 세상 속에 살면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서, 나라에 충성하고(事君以忠), 부모에 효도하며(事親以孝),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交友以信),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며(臨戰無退), 산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殺生有擇)는 것이다. 우정상 김영태 공저 『韓國佛敎史』 (서울: 진수당, 1970) 34-37쪽 참조    
아무튼 진흥왕 자신이 현세의 전륜성왕으로 통칭되는 인도의 아쇼카왕을 본받아 미륵보살의 정토를 이루어 내려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쇼카 (Aśoka 재위 268-232 BCE)는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임금이며 인도를 통일한 첫 번째 제왕이다. 그는 무력적 정복을 포기하였고, 평화로운 정치를 하며 사회복지 등 공공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국내는 물론 멀리는 스리랑카와 이집트 및 마케도니아 등지까지 불교를 가르치는 법대관과 포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는 평화와 복지를 위한 사회사업의 불교적 모범자이며, 무력 사용 대신 정법을 통한 평화적 통치를 하는 전륜성왕(Chakravarti-rāja)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며 평화로운 불국정토를 추구하고 성취하려 애쓴 일종의 생명문화의 지도자라고 할만하다.

 2). 중세: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향가(鄕歌)
 보현십원가는 균여(均如 923-973)가 사회를 깨우치며 민중을 위안케 하려고 그 당시 민간에서 불려지던 노래형식인 사뇌가(詞腦歌)로 지어 낸 향가이다. 균여는 고려 초기의 고승으로서 당시 남악과 북악의 두파로 나누어져 있던 화엄학을 융섭 통합하여 부흥시킨 화엄종사였다. 그는 태어날 때 너무나 못생겨 버려졌으나 새들이 보호하여 살려내었던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총명하며 재능이 뛰어났었고, 일찍 출가 수행하여 당대의 탁월한 선지식이 되었으며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와 『화엄경삼보장원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 및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등 수십 권의 저서를 내었고, 위로는 광종 임금이 절을 지어 바치며 숭앙하였고 주위 승단에서도 널리 존경되었다. 현존 저서와 전기는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제4책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2) 전반부 참조.
「보현십원가」는 균여가 민중과 함께하려는 동체대비심에서 『화엄경』안에 보이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을 향가로 만들어 대중에 보급한 것이다. 앞 책 513-516쪽.
주요 부분의 내용을 보면,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에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하나인 연기의 이치를 찾아보고는 부처와 중생을 다 들어도 어디 내 몸 아닌 남이 있을까?..... 어느 사람의 착함들이야, 어찌 아니 기쁠 것인가”;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에는 “생각 생각 끊임없이 부처님 하듯이 중생을 공경하리라. 아, 중생이 편안하다면 부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다”;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에는 “내가 닦은 일체의 선을 돌이켜서 중생의 바다 안에 헤매는 무리들 없도록 알리고 싶어라”라고 하였다. 끝으로 균여가 결론삼아 지은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에서는 “중생의 세상이 다하면 내 소원도 다할 날 있으련가, 중생을 일깨움이 끝없는 내 소원인가, 이다지 큰 원 세우고 이렇게 나아가니, 향하는 대로가 착한 길이로다.”라고 하며, 그 자신이 보현보살과 같이 보살행을 서원하며 민중들도 동참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과 부처 및 중생이 하나인  생명관으로 생활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근대: 다선일미(茶禪一味) 시선불이(詩禪不二)
 이른바, 다도(茶道)와 참선이 한 맛이며, 시(詩) 및 서화(書畵) 등 예도(藝道)와 참선이 하나이고 둘이 아닌 일치 혹은 불이(不二)의 상태라고 하는 사상과 삶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은 초의(艸衣 1786-1866) 선사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고승으로 선ㆍ교ㆍ율(禪敎律)에 두루 통달한 각 방면의 선지식이었고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초의시고(艸衣詩藁)』 및 『동다송(東茶頌)』 등 다수의 귀중한 저작을 남겼으며, 시와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소위 삼절(三絶)로 통했고, 다성(茶聖)으로 불리듯이 다도를 중흥시킨 팔방미인이었다. 『한국불교전서』 제10책 820-884쪽 참조; Young Ho Lee, Ch'oui Uisun (Fremont Califonia: Asian Humanities Press, 2002) 참조
그는 당시 실학 및 고증학 등에 대표적 인물인 다산(茶山) 정약용과 추사(秋史) 김정희 등 당대의 여러 지성인들과 교유하며 신분과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존중되는 정의 사회 구현에 노력한 선각적 종교 지도자였다. 초의를 비롯한 인문 사회 및 자연 과학적 지성인들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민중 지향의 개방적 진보 문화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 생명 본연의 보편적 실상을 들어내며, 일체감에 의한 동체대비 보살정신의 실현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상  생활 속에 끊임없이 참선하며 교양과 예술 및 각종 직업 활동 등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해 정진하여 수행과 생활이 다름 아니도록 한 불이문화 운동은 개인과 사회의 생명 존중 분위기 제고와 환경 및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였으며, 그러한 정신적 문화유산은 오늘날에도 유용하고 유익하게 계승되어 전파될 것으로 평가된다.
                                       
4. 맺음말
 불교가 뭇 생명을 구제하는 데에 근본적인 목적을 두고, 개체와 공동체의 이상인 성불과 불국정토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 생명을 주체로 하여 그 완전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평화 세계를 지향함에 있어, 필요한 이론적 기초와 실천적 방법에 대한 고찰을 한 후, 한국 문화전통 속에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았다. 한국불교의 생명사상은 불교본래의 생명 존중과 보호사상을 한국문화 속에 꽃피운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나라와 겨레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화랑정신을 북돋우며 사회 대중에게 동체대비의 보살행을 권하기 위해 균여와 초의 같은 열린 지성인들의 삶과 그 업적을 현창하고 그 정신을 고무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생명이 경시되고 갈등과 불화가 팽배한 현대 사회인들에게 모두 평등하게 공존 상생하는 연기론적 자각과 화엄회상 평화문화를 함께 가꾸어 나가자는 의식운동이 요청된다. 자연환경과 사회도 우리들 공동업의 결과이며 우리의 의지적 노력으로 기존의 병폐를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불교의 업설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회문제들을 주체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책임감을 갖는다면 평화로운 생명공동사회 건설도 자연스럽게 실현될 줄 안다. 탐욕과 무지로 말미암은 위험한 질주를 막고 차분히 마음을 맑혀 우리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진지하게 가다듬을 때이다. 자비와 평화가 충만한 본래의 완전한 인간성 회복과 건전한 생활을 위하여 우선 참선 즉 마음공부가 시급하다고 느낀다.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어느 상황에서나 자기 마음을 안정하고, 존재와 삶의 궁극적 물음인 참 생명과 평화 구현에 대한 화두를 통해 일상생활과 참선이 하나 되는 불이선 수행에 정진하여야겠다. 우리 모두 본래 한 생명임을 인식하며, 종교와 지역을 초월하고 남녀노소 등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모두 한 마음으로 연대하여 시대적 당위와 사명인 생명평화운동에 동참 정진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겠다.
 깨달음의 이상과 중생의 현실을 동시에 아우르는 상황적 인물인 보살은 중생을 지혜와 방편으로 이끌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갖고 평화로운 이상사회를 실현하려는 서원에 산다.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도 바람직한 인격실현과 이상세계 건설의 주역은 보살이 될 수밖에 없다. 보살은 모든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불성이 내재한 존재로 보고, 그 아름답고 훌륭한 참 모습과 능력을 깨닫고 발현하도록 일깨우며 그 조건을 마련해 나간다. 각각의 보살들이 모두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들의 평안과 해탈을 성취하게 하기 위한 깨침과 자비를 통한 보편적 목적과 더불어, 특수한 수행 원력과 권능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과 평화분야에 원력과 권능을 가진 보살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생명 혹은 평화보살이라고 불러도 합당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 나름대로 그러한 보살행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여야겠다.

(사)생명과 평화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