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론적 자연관과 과학주의적 태도

2007. 12. 16. 09:59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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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론적 자연관과 과학주의적 태도

  이 글에서 지구 생태계의 파괴를 두고 '환경 위기'로 표현하지 않고  '생태계 위기'로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환경'이라는 말은 인간을 제외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즉 통상 기후, 토양, 지형을 가리키는 의미가 더 크다. 그에 반해 '생태계'라는 말은 인간을 포함한 '하나의 자연'이라는 의미를 더욱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주변 환경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어서 환경의 파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파괴를 동반한다. 생태계의 위기는 인류의 생존을 건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의 이러한 생태계의 위기를 발생시킨 데에 크게 기여한 철학적인 배경이 바로 이원론적인 입장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주체와 객체로 나누고, 자연을 인간이 개조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거나 환경이 모든 인간행동을 결정한다고 보는 두 가지의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자유 의지론이고 후자는 결정론이다.

  자유 의지론은 중세시대의 우주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시대의 우주론에 있어서 신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론은 기이하게도 '인간중심적'이었다.

  물리-신학적 자연관의 산물인 '존재사슬' 개념에서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시키는 중세 학자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지만 이러한 존재사슬 속에서도 인간의 위치는 다른 대상보다 우월하므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암암리에 갖게 되는 이중성이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바라보는 이원론적인 입장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철학적인 사조에 의해서 더욱 체계화되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데카르트는 세상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였고, 물질적 세계 곧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 이런 생각은 유기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데카르트는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면서도 그 현상들을 부정했다. 그는 생명과정들을 역학의 법칙들로 환원시키고자 함으로써 동물들을 기계들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그의 방법론인 '분석적 사고방식'은 전체성의 단절을 초래하여, 요소환원주의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데카르트 한 개인의 사상이 원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성의 시대'에 흥분한 그 당시의 사상가들은 산업혁명의 기운을 힘입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치화, 기계화하여 가장 잘 작동되는 구조 틀을 짜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흐름 아래서 자연현상을 모두 수학공식으로 표현하려 했던 갈릴레이, 기계론적 세계상을 수학공식으로 표현했던 뉴튼 등의 과학이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합리적 사고방식이나 분석적인 사상, 이념 등을 번성하게 하여 근ㆍ현대 산업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생시키는데 기여하였으나, 동시에 가치라든가 감성, 직관을 소외시켰다. 또한 세계를 나누고 쪼개다 보니 분열적 세계상을 노정하여 자연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종과 인종, 부국과 빈국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이 하나의 '기계'로 사고되고, 인간의 복리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 본래 의미로 대해졌던 근대 4백년의 역사 내내 자연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을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죽임 당하는 날을 지속해왔다. 여기에서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의 폭력이 아무런 제재없이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의 파괴상태는 그 가해자인 인류까지도 파멸시키는 사태에까지 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생태위기 문제는 선진국의 생활문화운동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생존운동이 되었다.

   또한,  일반인이 환경문제를 논할 때 종종 정부나 지배계급에 의해 제한되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전문성, 과학주의이다. 특히 핵에너지 이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견해를 비과학적, 비전문적이라는 말로 비판한다. 우리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원자력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찬성자들이 반대 의견을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하는 행위의 밑바탕에는 한가지 중요한 전제가 깔려있다. 이 전제는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이라는 복합적인 기술에 대해서 거의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핵에너지뿐만 아니라, 고속전철 건설이라든가 대형 소각로 건설과 같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모든 일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시민은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는 현대 과학기술의 특성으로 비추어 볼 때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두드러진 특성중의 하나는 그것이 대단히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는 것이다. 세분화되어 있는 과학의 각 분야들에 종사하는 개별 과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지식에 대해서만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현대과학의 실상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기술은 세분화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사회에 나와서 응용될 때는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학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하나는 아무런 의견도 내오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이해나 지배계급의 이해, 특정 과학기술자 집단의 이해에 따라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명백히 이윤추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판결이 난다. 과학자들의 연구작업은 엄청난 자본이 요구된다. 자본은 이윤이 극대화되는 과학기술에 투자를 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은 근본적으로 자본의 이해에 종속 당하고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정치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이때의 위험성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의견이 전문적인 지식에 입각한 것이라고 포장함으로써 일반인들 사이의 건전한 토론을 불필요하고 방해작용을 하는 것으로 단정해버린다는 데 있다.

 결국, 사회에 응용되는 복잡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좁은 전문지식과 그들이 근거한 제한된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전문가들보다도 어떤 문제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의 활발한 토론이 더 바람직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