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식(心識)과 인식(認識)의 대상

2008. 5. 7. 20: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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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식(心識)과 인식(認識)의 대상

1) 심식(心識)의 삼량(三量)

심식(心識)은 인식주(認識主)로서 어떤 대상의 내용과 모습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식은 요별(了別)과 분별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내용을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밝히려 하는 것이 유식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의 성격도 나타나고 또 사물의 내용도 인식주인 마음의 인식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자체는 항상 진리로운 것이며 선악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주관에 의하여 인식되어지는 것이 사물이므로 인식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청정하며 진리로운 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사물도 청정하고 또 진리롭게 마음속에 비쳐진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마음이라면 사물도 악하게 나타나고 또 마음이 선하다면 그 사물도 선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객관계의 사물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그 가치가 정해지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논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삼량(三量) 논법이다.



삼량이란, 심식의 세 가지 인식내용을 뜻한 것으로서 양(量)은 헤아린다는 말이며

동시에 마음의 대상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헤아린다는 것은 인식을 뜻하며 이를 양탁(量度)이라고도 칭한다.

이러한 양탁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 등이 있다.

이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현량은 눈앞에 있는 사물을 틀림없이 보고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틀림없이 인식하는 것을 현량이라 한다.




둘째로 비량(比量)은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고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비교하며 또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과도 추리하여 비교할 수 있는 심식의 작용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여 판단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인식내용에 있어서 비량(比量)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모든 것을 비교하며 또 현재는 현재에 입각하여 무의식 속에 비교하면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획과 억측 등도 현재의 것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는 것인데 이들 심리활동은 모두 비량(比量)에 속한다.

특히 현재의 것을 비교한다는 말은 과거에 보고 듣고 익혔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현재의 사물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현재의 것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의 지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비량(比量)인 것이다.



그러나 현량은 틀림없는 인식을 뜻하고, 비량의 인식은 거의 틀림없는 인식으로 나타나지만 가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비유를 들면 담 너머에 보이는 뿔만 보고도 그 밑에 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와 같이 뿔을 가진 동물이 많고 또 소가 가지고 있는 뿔과 유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가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더 들면, 가령 먼 산의 연기를 보고 그 밑에는 반드시 불이 있을 것이라고 비교하여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먼 곳의 구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식의 비량은 거의 틀림없는 인식의 내용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가끔 틀릴 수 있는 인식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현량(現量)과 비량(比 量)과는 달리 모든 것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비(非)는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의미한다.

심식(心識)이 무명(無明)을 비롯하여 온갖 번뇌의 장애를 받아 객관계의 사물과 진리 그리고 주관계의 법칙에 대해서도 그 진실을 망각하여 항상 비진리적으로 관찰하고 생각하며 인식하는 것을 비량(非量)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눈병 난 사람이 푸른(靑色)하늘을 보고 누렇다(黃色)고 하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심식에는 삼량의 인식내용이 있다.

그러나 모든 식에 일률적으로 삼량의 뜻이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차별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오식(前五識)과 제8아라야식은 오직 현량(現量)의 인식만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 심식이 가장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을 하며 동시에 사물이 지니고 있는 진실을 가장 잘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6의식 또한 삼량의 인식활동을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전오식 등에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 즉 의식(意識)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작용뿐만 아니라 비량(非量)도 하는 심식이므로 주관에 해당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삼량의 인식활동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팔식(八識) 가운데 유독 제7말나식만은 비량(非量)의 인식만을 하게 된다고 한다. 말나식은 내면에 잠재하여 있는 심식으로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망각하는 등 진여성(眞如性)을 비진리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또 여타의 심식에 비량의 영향을 주어 진리를 착각하게 하는 전도심(顚倒心)을 유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심식에서 나타나는 삼량(三量)의 작용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2) 심식(心識)의 소연경(所緣境)



위에서 삼량의 인식내용을 살펴봤다. 심식은 이러한 인식활동을 하는 것으로서 그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는 것이 소연경(所緣境)의 설명이다.

소연경은 반연되어지는 데상, 즉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반연하고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심식이다.

심식은 인식(了別)하는 것을 성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인식할 대상을 요구하고 또 찾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은 항상 능동적인 입장에 있으며, 인식되어 지는 대상은 또 수동적인 입장에 있게 된다. 그러기에 심식(心識)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인식의 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능연은 능동적으로 반연하고 인식한다는 뜻이 있고, 소연은 수동적으로 반연되어지고 인식되어진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경(境)은 경계(境界)의 뜻으로서 인식의 한계를 뜻하고 또 대상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심식과 소연경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심식은 주관의 입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로 공존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주관이 없는 객관이 있을 수 없고, 객관이 없는 주관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심식과 소연경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심식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을 말하고,

소연경은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 법경(法境) 등을 말한다.

이들을 서로 관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안식(眼識)의 소연경(所緣境 )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인식한다.

색경의 본질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다.

지(地)는 견성(堅性)으로서 물질의 견고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물첼르 보호하고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수(水)는 물질의 습성(濕性)을 뜻하며 물질에 대하여 윤택(潤澤)하게 하며 서로 화합(引攝)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화(火)는 난성(煖星星)으로서 물질의 따뜻한 기운과 불의 성질을 뜻하며 물체로 하여금 성숙케 하고 그 자체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풍(風)은 물질의 동성(動性)으로서 물질의 운동과 동요는 물론 물체로 하여금 생장(生長)케 하는 동력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지. 수. 화. 풍을 사대(四大)라 하는데, 대(大)는 주변(周邊)의 뜻으로서 이 네 가지 성질은 어떤 물질 속에서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질이 처음 물질로 나타날 때 최소의 단위를 극미(極微)라 한다. 극미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단위를 말하며 이 단위부터 미진(微塵), 수진(水塵), 금진(金塵) 등 점차 큰 물체를 이룬다. 그리고 큰 단위로 변화할 때는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큰 산도 되고 천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대 중에서 지대(地大)의 세력이 강하면 육지와 같은 고체의 물질이 되고,

또 수대(水大)의 세력이 강하면 바닷물과 같은 액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화대(火大)의 세력이 강하면 불이 되고, 풍대(風大)의 세력이 강하면 물질의 동력이 되며 바람과 같은 풍력(風力)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상과 같이 사대(四大)는 여러 가지로 물질의 바탕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또 능조(能造)의 뜻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오종인(五種因)으로서 생(生), 의(依), 입(立), 지(持), 양(養)의 인력(因力)을 말한다.




먼저 생인(生因)은 사대가 물질을 생성하는데 근본원인(根本原因)으로서 마치 자모가 자식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다음 의인(依因)은 사대가 물질의 질료인(質料人)으로서 물질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치 제자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다음 입인(立因)은 물질에 대한 구성인(構成因)으로서 물체는 사대에 의하여 한 단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대지(大地) 위에 만물이 구성되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다음 지인(持因)은 유지인(維持因)의 뜻으로서 사대는 물체를 유지시켜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음식물이 모든 생물의 수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다음 양인(養因)은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사대가 모든 물체를 성숙케 하고 성장시키는데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수분이 여러 수목을 윤택하게 하고 양육시키며 성장케 하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대는 물질의 성질로서 무형의 성질이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 표면화될 때 유형의 물질이 된다. 유형의 물질을 상대하여 사는 범부들은 안식(眼識)을 통하여 유형의 색경(色境)을 대할 때, 그 색경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된다.

즉 현색(顯色)과 형색(形色) 등을 말한다.

현색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이 물질 위에 나타나는 색깔을 뜻하는데 이를 물질의 사본색(四本色)이라고 한다. 이 사본색으로 부터 변화하여 나타난 것이 팔종색(八種色)이다. 팔종색은 구름(雲), 연기(煙), 안개(霧), 그림자(影), 빛(光), 밝음(明), 어둠(闇) 등을 말한다. 이들 색은 자연의 색깔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들을 다른 물질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형색으로 나타나는 종류를 보면 형색이란 모습과 모양으로 나타나는 물체를 구별한 것을 뜻한다. 길고(長), 짧고(短), 모나고(方), 둥글고(圓), 높고(高), 낮고(下), 바르고(正), 바르지 못한 것(不正) 등 팔 종으로 구별하여 말한다. 이를 상대적인 색깔이라는 뜻에서 사쌍팔종(四雙八種)의 색(色)이라고 이른다.

이러한 형색도 안식의 인식대상이며 현색과 함께 20종의 색깔이 되는데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색깔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색경관(色境觀)이다. 이상의 모든 색이 안식의 소연경이다.







나) 이식(耳識)의 소연경(所緣境)

이식(耳識)의 소연경(所緣境)은 성경(聲境)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이 이식으로서, 그 소리는 동물의 소리와 물질의 소리로 크게 나누어 설명한다.

동물의 소리는 소리의 내용은 다르지만 대체로 음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이미 집수된 바 있는 종자를 원인으로 하여 감정이 있는 동물의 소리를 발성한다는 뜻에서 유집수대종위인(有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그리고 물질에 의하여 나타나는 소리는 동물과는 달리 감정이 없기 때문에 무집수대종위인(無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소리는 마음에 맞는 소리(可意聲)과 마음에 맞지 않는 소리(不可意聲)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식의 인식대상이며 소연경이다.







다) 비식(鼻識)의 소연경(所緣境)

비식(鼻識ml 소연경은 향경(香境)으로서 이는 여러 냄새를 총칭한 말이다. 좋은 냄새(好香)가 있고 나쁜 냄새(惡香)가 있다. 그 냄새들은 육체에 알맞은 유익한 냄새(等香)가 있고 육체에 맞지 않고 건강에 피해를 주는 불이익의 냄새(不等香)가 있다. 이들 냄새들은 모두 비식에 의하여 식별된다.







라) 설식(舌識)의 소연경(所緣境)

설식(舌識)의 소연경은 미경(味境)이다.

미경은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싱겁고 하는 등 맛에는 이들 여섯 가지 맛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본다. 이 여섯 가지 맛에서 여러 가지 맛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밖의 맛은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마) 신식(身識)의 소연경(所緣境)

신식(身識)의 소연경은 촉경(觸境)이다. 신식은 몸으로 감촉하여 식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도 몸에 닿음으로써 인식되어진다.

그 감촉의 내용은 매끄럽고, 껄끄럽고, 무겁고, 가볍고, 차고, 배고프고, 갈증나고 하는 등 7종의 촉감이 가장 기본적이다. 물론 그 밖의 표현도 있고 촉감도 있지만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된다. 이상과 같이 각 심식에는 인식의 대상이 있으며 이들 대상을 상대로 활동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바) 제6의식(第六意識)의 소연경(所緣境)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 인식의 대상으로 하는 내용을 살폈다. 이제는 제6의식과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의 식별대상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제6의식의 인식대상을 보면 제6의식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대상을 다 인식하는 심식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범위가 가장 넓으며 이 범위를 모두 합쳐 법경(法)이라고 한다. 이때의 법(法)은 곧 물질과 정신을 다 합쳐 총칭하는 말로서 유형(有形)의 것과 무형(無形)의 것을 총망라한 말이다.

물질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안식 등 전오식(前五識)과 더불어 활동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으로서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등 객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신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모든 무형의 대상을 포함하여 내면세계의 인식대상 등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의 대상들을 법처(法處)라고도 한다.

그런데 의식은 전오식과는 달리 물질과 정신적인 것을 함께 오묘한 경지까지 인식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합쳐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라고도 한다.

이는 또 극략색(極略色), 극향색(極향色), 수소인색(受所引色),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극략색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물질 가운데서 가장 적은 극미(極微)의 색상(色相)을 뜻한다. 여기에는 오근(五根)과 오경(五境)과 사대(四大) emdd; 포함된다. 이러한 색법(色法)은 능히 장애(能礙)가 될 수 있고, 또 능히 장애를 받을 수도 있는(所礙) 물질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극미의 경지이기 때문에 오직 의식(意識)만이 반연하여 이해하고 식별할 수 있는 대상에 속한다.




다음 극향색은 서로 장애되거나 접촉할 수 없는 물질을 뜻한다. 예를 들면 공간계(空間界)와 그림자와 광명(光明)과 어두움(闇) 등을 들 수 있다.이들 색법(色法)도 장애의 가능성과 서로 접촉하는 물질(有對色)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혜에 의하여 분석되는 극미의 모임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상으로 볼 때 큰 단위의 물체로 보이지만 이들을 분석하여 관찰하면 미립자의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립자까지 접근하여 인식할 수 있는 심식은 곧 의식이다.




다음 수소인색(受所引色)은 가르침과 스승(敎師)에 의하여 감수되는 내면의 인식대상을 뜻한다. 이를 무표색(無表色)이라 하는데 이는 남에게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가령 다니고(行) 거주하고(住) 앉아있고(坐) 누워있고(臥) 잡고(取) 버리고(捨) 구부리고(屈) 펴고(伸) 하는 등 신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보일 수 없는 내면세계의 작용이기 때문에 무표색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몸(身)과 입(口) 그리고 뜻(意) 등으로 실천하는 율법(戒律)도 포함된다. 이는 다른 표색과는 달리 다른 율동적인 것을 뜻한다.




다음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은 정신적인 환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인식의 대상을 말한다. 제6의식이 번뇌로 말미암아 착각을 야기하여 실체가 없는 가상의 대상을 집착하는 것을 뜻한다.

즉 변계(遍計)라는 말은 두루두루 비진리적으로 착각하고 집착한다는 뜻이며 환각(幻覺)으로 공화(空華)와 같은 헛것을 실체가 있는 양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변계소기색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착각을 야기하여 생겨난 허망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허망한 의식을 독산의식(獨散意識) 또는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고 한다.




다음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은 자유롭게 나타내는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또 번뇌에 구애를 받고 모든 물질의 진실성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해탈(解脫)과 정려(靜慮)의 혜안(慧眼)에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명 승정과색(勝定果色)이라고도 부른다. 즉 수승한 선정에서 나타난 대상물을 뜻한다.

특히 유식학에서는 유가(瑜伽)사상을 부르짖고 있는데 유가(yoga)는 곧 명상이며 명상은 또 중국의 선정에 해당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가라는 말은 번뇌심을 정화하여 객관계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증득하게 하는 수행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가, 즉 선정에 의하여 자재로운 마음이 나타나며 자재로운 마음 위에 자유롭게 대상물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경지들을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제6의식의 인식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다.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아비달마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 제일(第一)에 나오는 해석으로서 이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십이처(十二處)의 법처(法處)라는 말을 인용한데서 유래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십이처 중의 법처는 의식의 인식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의 의식(意識)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모두 인식 범위로 하고 있으며 그 인식의 심도도 물질의 극미에 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사)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소연경(所緣境)

다음 제7말나식의 소연경을 보면 말나식은 항상 제8아라야식의 견분(見分)만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다. 위에서도 이미 말나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전변(轉變)되어 독립된 심식(心識)이 되어 가지고 다시 아라야식을 반연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라야식을 평등하게 반연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실아(實我)의 집착을 내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번뇌만을 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이라는 말은 각 심식의 내용과 역할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사분설(四分說) 가운데의 하나를 말한다. 즉 견분은 각 심식의 핵심적인 인식작용으로서 그 활동의 작용을 착각하여 집착을 야기한 것이 곧 말나식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심성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아라야식을 상대로 하여 망상을 야기하는 심식이 곧 말나식이다.







아)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의 소연경(所緣境)

다음 제8아라야식의 소연경을 알아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의 소연경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를 반연하며

둘째는 자신을 둘러싼 육체(五根)을 소연경으로 하고 있다.

셋째는 인간이 몸담고 사는 객관세계를 반연하여 인식하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아라야식은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인 종자를 자체 내에 보존하는 장식(藏識)으로서 그 종자를 항상 반연한다. 마치 어머니가 품안에 있는 어린 아기를 상대로 어루만지듯이 아라야식도 자체에 훈습되어 오는 종자를 비롯하여 모든 종자를 상대로 하여 반연한다는 것이다.



다음 육체는 곧 안근 등 오근(五根)을 뜻하며 이들 오근을 반연하여 그 오근이 안전하거나 위태로움의 운명을 함께 하면서 꾸준히 유지시켜 주는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다.



끝으로 아라야식이 객관세계인 기세간(器世間)을 상대로 반연한다는 것이다. 기세간이 하나의 물체로서 큰 덩어리인 천체이지만 실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 있는 존재로서 아라야식이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마음 밖에 따로 경계가 없으며(心外無境), 만법이 오직 심식에 존재한다(萬法唯識)는 말에서 그 진리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을 유지시켜 주고 또 종자와 오근을 수령(受領)하며 각수(覺受)하고 집섭(輯攝)하며 동시에 주위 환경을 비롯하여 온 세계를 유지시켜 주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안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의 소연경을 살펴보았다.

팔식과 소연경의 관계에서 인간의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길흉과 행복과 불행도 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아서 사물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인식 여하에 따라 선(善)과 악(惡)이 대두되는 것이며 이 선과 악은 곧 업력으로 전환하여 자신을 끌고 가는 가공할 만한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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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팔식(八識)의 정신작용(心所相應)







다음은 팔식(八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을 알아보기로 한다.

심소상응이란, 심소는 작용으로서 각 심식에는 어떠한 심소가 서로 응하며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논술하는 것이다.

즉 심식은 모든 행동을 주재(主宰)와 같이 결단력이 있게 주관한다는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 하는 반면에 심소(心所)는 왕에 소속하여 명령만 받고 움직이는 신하처럼 결정권이 없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심왕은 각식(各識)의 체성에 해당하며 심소는 각식의 체성에 의하여 발휘하는 작용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각식에는 어떤 종류의 심소가 상응하고 있는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오식(前五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첫째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오식(前五識)은 동일한 심소와 상응한다.

그 종류는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심소들 가운데서 변행심소(遍行心所)의 5종과 별경심소(別境心所)의 5종과 선심소(善心所)의 11종과 탐. 진. 치(貪. 瞋. 癡) 등 삼번뇌와 팔대수혹(八大隨惑) 8종과 무참(無慙), 무괴(無愧) 등 중수혹(中隨惑) 2종 등 34종의 심소를 말한다. 이들 심소는 동시에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한 심소만 야기하게 된다.









2) 제6의식(第六意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제6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51종이 있다.

이들 심소는 유식학에서 정신작용으로서 엄선한 숫자이며 의식(意識)에는 이들 심소가 다 나타나있는 것이다. 그만큼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3)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다음 제7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18종이다.

18종의 심소는 변행심소의 5종과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사번뇌와 팔대수혹의 8종과 별경심소 중 혜심소(慧心所) 등을 합친 정신작용을 말한다.









4)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끝으로 제8아라야식은 변행심소의 5종만이 상응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에는 각 종의 작용이 있으며 그 종류들은 수시로 우리 정신생활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물론 근본번뇌와 같은 심소들은 밖으로 표면화되지 않고 작용하며 진리를 착각하도록 유도하는 것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정신작용들이다.

이상으로 팔식에 관계되는 모든 성질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유식학의 핵심사상인 아라야식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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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식(八識)의 명칭과 정신작용








1. 8식(八識)의 명칭과 성질






앞에서 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번뇌(四煩惱) 등 근본이 되는 번뇌가 말나식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지만 말나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타의 심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심식은 그 체성(體性)이 각각 서로 다르지만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소의처(所依處)를 들 수 있다.

소의처라는 말은 모든 심식이 의지할 곳을 의미하며 그 의지의 장소는 육체의 오근(五根)도 되지만 심식과 심식간에 상호 연결하여 의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행과 악행이 어떤 한 식(識)만의 단독행위라고 볼 수 없는 내용이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말나식의 번뇌는 가장 근본이 되어 여타의 심식의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차의 심식이 서로 연관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보통 한 심식을 설명할 때, 십 종(十種) 또는 팔 종(八種)의 내용을 분류하여 설명한다.

이제 모든 마음이 어디애 의지하여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그 내용을 분석하면 팔 종이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식의 명칭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2) 그 식에서 발생하는 작용은 실다운 업력(實種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짓된 종자(假種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3) 식의 성질은 어떤 내용인가?

4) 모든 심식은 삼계육도에 윤회하는 동안 출생처에 따라 여러 심식(八識)의 번뇌는 어느 정도인가? [繫界]

5) 모든 심식의 의지처는 어디인가? [所依處]

6) 심식의 인식현상은 어떤 것인가? [三量]

7) 심식의 인식대상은 어떤 것인가? [所緣境]

8) 심식의 작용은 몇 종류나 되는가? [心所相應]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심식내용을 알아보는데 여덟 가지로 분류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국의 규기법사 등 유식학자의 입장이다.

이제 여덟 가지 중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던 것과 약간 중복되기는 하지만 간단히 살펴보면서 말나식의 번뇌가 여타의 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심식(心識)의 명칭



석명(釋名) : 심식에는 반드시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이름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여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로 안식(眼識)은 안근(眼根)에 의지하기 때문에 안근의 이름을 따서 안식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육체상의 각 부분의 형체 이름보다 정신의 체인 이름이 늦게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식(識)의 이름이 정해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다.

그것은 심식의 작용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안식을 예로 들어보면, 안식은 몸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요벌(了別)의 인식작용을 갖고 있으니까 객관계의 대상인 빛깔(顯色)과 모습(形色) 등을 인식의 대상(色境)으로 하여 분별작용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식의 의지처인 육안의 이름을 따서 안식이라고 이름하느냐 아니면 인식의 대상인 색경의 이름을 따서 색식(色識)으로 하느냐 하는 등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한 결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식의 인식대상인 색경은 변천하고 파괴되어도 안식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만약 육체의 의지처인 육안(肉眼)에 해당하는 안근(眼根)이 파괴되거나 병이 나면 시각(視覺)이 흐려지고 또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볼 때, 안식에는 색경보다는 안근이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또 설사 천상세계에 가서 출생한다 할지라도 식(識)과 근(根)은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다는 이론에 따라 안식(眼識)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경(境)의 이름을 따서 색식(色識)이라고 칭명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상과 같이 식의 이름을 정할 때, 심식과 가장 가깝고 또 일반생활에서도 불가분리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의근(所 依根)의 이름을 따서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뿐만 아니라 내생에 만약 색계천(色界天)과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천국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면 하나의 심식이 하나의 소의근에 의지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대할 때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촉감을 동시에 갖게 된다는 경전의 말씀이 있다.

이에 의하여 식과 근은 항상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객관계의 인식대상은 일정하지 않고 한 식과 한 근에 의하여 여러 대상(六境)이 동시에 수용(受用)되는 경지가 전개되기 때문에 근의 이름을 따서 식명(識名)을 정하는 것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은 안근의 이름을 땄고 의식(意識)은 말나식에 의지하므로 의근(意根)에 해당하는 말나(意)의 이름을 땄다.



그리고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식자체(識自體)에 의존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자체의 기능에 따라 식명을 지은(自體得名) 것이다. 이러한 경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가행파들이 선정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는 말나식과 아라야식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은 심식이 서로 의존하면서 그 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체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 두 심식은 여타의 육식과는 달리 당체(當體)의 이름을 따서 식명을 정한 것이다.



그 이유를 보면, 말나식은 곧 의근으로서 제6의식의 소의근이 되며 또 아라야식에 의지하기는 하나 그 명칭만은 자체의 독특한 사량(思量)의 뜻이 있으므로 이에 따라 말나식이라고 정한 것이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藏)의 뜻에 따라 아라야(阿賴耶)라고 이름한 것이다.

동시에 이 식은 모든 심식(前七識)의 의지처가 되고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의(根本依)라 하고 또 근본식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식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원히 불멸하는 심식이므로 자체의 뜻을 따라 아라야식이라 식명을 정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심식의 이름을 정할 때 유식가에서는 원칙을 세우고 또 진리로운 근거에 의하여 한 것이다.









2) 심식(心識)의 종자(種子)



종자의 가실문제(種子假實) 어떤 심식이든 전칠식은 그 체성과 작용을 야기하며 활동하고자 할 때는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는 업력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게 된다. 보통 업력은 이미 여러 심식들이 선행과 악행 등을 나타내어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것을 뜻한다.

이 업력은 다시 다음의 결과를 발생하는 씨앗이 된다고 해서 종자(種子) 또는 인(因)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자가 다음의 심식활동에 힘과 세력(功能)이 되어질 때, 그 종자는 거짓된 종자(假種子)인가 아니면 실다운 종자(實種子)인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식은 실종자(實種子)에 의하여 모든 작용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심식은 행위를 통하여 종자를 조성할 때 분명히 가종자(假種子)가 아니라 실다운 종자만을 조성하며 다음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업력을 아라야식에 보존케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식의 활동과 종자와의 관계를 밝히는 일환으로 옛적부터 종자의 가실(假實)문제를 따져온 것이다.









3) 심식(心識)의 성류(性類)



성류라는 말은 모든 심식의 성질을 부여하여 밝힌다는 뜻이다. 보통 심식들이 활동할 때,

그 성질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심식의 성질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유식학에 의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심식, 의식 등 육식은 선성과 통하고 악성과도 통하며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에도 통한다고 하였다. 즉 무기성은 선과 악의 내용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성질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육식은 선성과 악성과 무기성의 성질을 다 갖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성질(三性)의 행위를 나타내어 업력도 선업과 악업과 무기업 등을 조성하는 심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으로서 항상 번뇌를 야기하는 역할을 많이 한다. 부(覆)라는 말은 부폐(覆蔽) 또는 부장(覆障) 등의 뜻으로서 심식의 진실성인 진여성과 불성 등의 본성을 가로막고 장애하는 번뇌를 의미한다.



말나식은 이러한 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혜를 장애하고 무지를 야기하여

제6의식 등 여타의 심식에 진리를 망각하게 하는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로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게 되며 동시에 청정한 무루(無漏)의 성도(聖道)를 은폐하면서 끝없이 윤회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성(有覆性)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성질과 같이 객관화되지 못한 상태의 번뇌이므로 무기성(無記性)이라고 한다. 그것은 제6의식과 같이 외부 대상(外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아라야식을 상대로 인식하면서 번뇌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부무기성인 말나식은 지혜를 장애하는 번뇌는 야기할지라도 과보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인은 조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번뇌가 전체의 심식에 궁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업인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라야식의 성질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이 말은 아라야식 자체에는 부폐와 부장의 성질이 없다는 것이며 이 아라야식에서 번뇌를 야기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번뇌를 야기하지 않고 또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아라야식에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만약 아라야식이 본래 번뇌의 성질이 있고 또 선성에 치우치거나 악성에 치우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후천적으로 전칠식(前七識)이 조성하는 모든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성질이 선성이라면 악업이 훈습될 수 없고 반대로 악성이라면 선업이 훈습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이 무부무기성이기 때문에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또 전칠식의 활동에 업력의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였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각 심식에는 성질이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이에 의하면 심식의 역할과 행위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정신생활의 내용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오식(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은 선과 악과 무기 등 삼성(三性)의 정신작용을 야기하는 심식들로서 선악관을 정립하는데 매우 용이한 사상이다.

그리고 말나식의 유부무기성과 아라야식의 무부무기성이라는 해석은 흔히 설명되는 학설이 아니기 때문에 심체의 작용을 파악하는데 매우 뜻깊은 심식설(心識說)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팔식(八識)에 대한 명칭과 종자(種子)의 가실(假實)문제와 그리고 성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밖의 성질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4) 심식(心識)의 계박(繫縛)



계계(界繫)라는 말은 팔식(八識)이 삼계와 육도에 윤회하는 도중에 번뇌에 의하여 어떻게 구속을 받고 또 어떻게 업력에 의하여 구속을 받고 있는가를 밝히는 명사이다.

즉 계(界)라는 말은 세계라는 뜻으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의 윤회세계를 말한다.

다음 계(繫)라는 말은 계박(繫縛) 또는 결박의 뜻으로서 이는 번뇌가 심식(心識)을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심리적인 번뇌의 작용을 객관화한 것으로서 실은 번뇌의 뜻이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업력(業力)이 달라지고 그 업력이 억압이라면 마음을 구속하고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계의 뜻은 심식이 번뇌에 의하여 계박된 실태와 또 번뇌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전오식(前五識)의 계계(界繫)

인간의 심식 인 팔식 가운데 안식과 이식, 신식 등 삼식(三識)은 초선천(初禪天)까지만 계박의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에 윤회하는 가운데 많은 복과 선업을 닦아 색계에 해당하는 초선천에 출생하면 안식과 이식와 신식에는 번뇌가 없고 동시에 업력의 구속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선업을 닦고 선정을 닦아 그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삼식은 그 이상의 이선천(二禪天)과 삼선천(三禪天) 등 수승한 중생이 태어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번뇌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 까닭은 욕계와 초선천까지는 번뇌가 많고 작은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미량의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계(界繫)의 뜻이 있게 된다. 그러나 초선천 이상의 천국에 출생하면 위에서 말한 삼종의식에는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 비식과 설식은 앞에서 말한 삼식보다도 더 빨리 청정해져서 욕계까지만 번뇌의 속박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 이식(二識)에게는 욕계(欲界)에 한해서 계계의 뜻이 있게 되며 지옥에 태어나면 번뇌가 더욱 가중하여 계계의 의미가 더욱 많게 된다. 왜냐하면 번뇌가 두텁고 악업이 많아서 심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욕계에서 가장 복이 많고 살기 좋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면 비식과 설식은 미량의 번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계계의 뜻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심식은 매우 청정하고 지혜광명이 항상 나타나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진리롭게 수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들 심식은 번뇌의 속박이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의하여 비식과 설식이 팔식 가운데서 가장 빨리 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안식과 이식과 신식이 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후삼식(後三識)의 계계(界繫)

다음으로 의식과 말나식과 아라야식 등의 계계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삼식은 모두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 가운데 어디에 거주하든지 번뇌가 남아있게 된다고 한다.

물론 이들 심식에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으나 악의 뿌리인 근본번뇌가 미량이나마 성불과 해탈의 직전까지는 남아있게 되므로 삼계에 두루 윤회하면서 계계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외적으로 향하여 분별하며 번뇌를 야기하는 외향식(外向識)이지만 안식 등 전오식에 비하면 내면의 정신체이고 또 염오식(染汚識)인 말나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심식이기 때문에 성불하기 직전까지는 있게 된다. 그리고 말나식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초의 무명도 이 식이 야기하고 또 최후까지 무명을 보존하고 있는 심식이기 때문에 삼계에서 해탈하기 전까지는 번뇌를 지니게 되며 동시에 삼계에 두루 통계(通繫)하게 된다.

다음 아라야식도 역시 삼계에 윤회하는 동안 어디서나 계계의 뜻이 있다. 그것은 의식과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그 번뇌식들이 훈습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말나식이 선정과 염불 등의 수행에 의하여 정화되고 또 자체내에 있는 유루종자가 다 정화되며 나아가서 무루종자만이 남아 있을 때 계속(繫 屬)의 뜻이 없게 되고 또 계박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는 계계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5) 심식(心識)의 의지처(所依處)



모든 심식에는 의지처가 있다. 대체로 말하면 우리의 육체는 마음의 의지처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의지처의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마음은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도 있고 또 육체와는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만 구성된 의지처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정신도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심식 가운데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은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심식들이다. 그런데 이 오식은 다 같이 육체에 의지하지만 육체의 구성과 조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도 각각 다르게 된다. 그 육체의 구성과 조직을 이름하여 오근(五根)이라 한다.

오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혀(舌根), 몸(身根) 등을 말한다.

이들 오근은 육체상에 나타난 감각기관으로서 마음이 이곳에 의지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根)은 마음이 의지한다는 뜻에서 의지처(依止處) 즉 소의근(所依根)이라고도 이름한다.




그리고 육체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장엄(莊嚴)이라 하며 또 인간자신을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인도(引導)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에는 부진근(扶塵根)과 승의근(勝義根)의 뜻이 있다.

부진근은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육체의 조직을 뜻하고

승의근은 몸 전체에 근원을 이루고 있으나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그렇지만 이 승의근은 전체의 몸이 유지되도록 해 주고 또 심식이 여기에 의지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전오식(前五識)은 몸에 의지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부진근보다 승의근에 직접 의지하여 객관계를 인식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뜻에서 근(根)을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발식취경이란 심식(心識)을 발생(發識)시키며,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取境)케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근에는 여러 식이 공동으로 의지(共依)하는 근의 뜻이 있고, 또 오직 한 식(一識)만이 의지(不共依)하는 근의 의미가 있다.




먼저 오직 일식만이 의지하는 경우를 보면, 안근은 오직 안식만이 의지하는 곳이고 이근도 오직 이식만이 의지하는 곳이며, 비근은 비식만이 의지하는 곳이고, 설근은 설식만이 의지하며 신근은 오직 신식만이 의지하는 곳이 된다. 이와 같이 오근(五根)과 오식(五識)은 단독 의지처가 되고 또 단독 의지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불공의라 한다. 즉 공동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한 식과 한 근만이 의지한다는 뜻이다.




다음, 제6의식(第六意識)의 불공의(不共依)는 의근(意根)이다. 의근의 정의는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유식학에서의 의근은 말나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려둔다. 제6의식은 말나식을 의근으로 하여 가장 밀접한 위지처로 하기 때문에 말나식을 의식의 불공의라고 한다.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의지처는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이다. 말나식은 어느 식보다도 아라야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은 말나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불공의(不共依)의 뜻이 있게 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말나식에 의지하며 또한 불공의의 뜻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말나식이 의근(意根)이기 때문이다.

이 의근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식(意識)의 의지처도 되고 말나식 자체는 물론 아라야식의 삼식(三識)의 의지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의근은 내면의 모든 정신계를 유지시켜 주고 동시에 활동하도록 도와주는 등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공의(共依)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공의라 함은 공동의 의지처라는 뜻이다. 그런데 심식(心識)은 각식(各識)의 개성이 뚜렷하면서 안으로는 서로 의존하는 인연관계를 맺는다. 여기에 공의(共依)의 뜻이 있다.

예를 들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은 오근(五根)에 의지하여 활동하면서 객관계의 사물을 인식할 때는 의식(意識)의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의식을 공동의 의지처로 하며 이를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의식이 오식에 가담하여(五俱意識) 선(善)과 악(惡) 등을 분명히 분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전오식에 대한 공동의 의지처이면서 동시에 분별의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말나식이 공의(共依)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전오식과 제6의식 등 육식이 말나식에 의지하여 염오(染汚)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육식에 대한 공의가 되면서 동시에 여타의 심식을 오염시키는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치(我癡)와 아견(我見) 등 근본번뇌를 야기하며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식에 의지하는 심식들은 필연적으로 번거로운 작용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말나식은 육식(六識)에 대하여 염오의(染汚依)의 뜻이 있게 된다.




아라야식도 공의(共依)의 뜻이 있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든 이 아라야식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아라야식에 의존하여야만이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아라야식은 공의도 되지만 모든 심식의 근본적인 의지처라는 뜻에서

근본의(根本依)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의 뿌리라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바와 같이 육체도 이 아라야식에 의하여 생존할 수 있고 또 심식들도 이 아라야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식은 모든 업력(業力)을 보존하고 있다가 심식들이 필요로 랗 때 즉시 보급해 주는 생명력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들은 각기 불공의로서 단독 밀접한 의지처를 갖고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정신계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진리적인 조직기능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계의 조화 속에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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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청정심과 무루훈습(無漏薰習)






위에서 여러 면으로 종자의 훈습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 유루훈습(有漏薰習)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유루훈습과는 내용이 다른 무루훈습(無漏薰習)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리로운 본성(眞如性)을 지니고 있었지만, 언젠가 홀연히 무명(無明)을 야기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또 번뇌를 야기하면서 고통을 받는 업인(業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명이 마음속에 나타나는 시기는 가히 알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도 그것을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하였다.




무시무명의 뜻을 직역한다면 ‘시작이 없는 무명’이라는 뜻인데,

그러나 이를 의역한다면 ‘무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마음속에서 무명이 나타나는 것을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 하며 이로부터 그 마음을 생멸심(生滅心)이라 한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학에서는 제7말나식이 무아의 진여성을 망각하여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범부들은 언젠가 진리에 대한 무명을 야기하여 여타의 번뇌를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번뇌들을 누(漏)라고 한다. 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누설(漏泄)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비유적인 명사로서 내심(內心)에서 탐진치(貪瞋痴) 등 근본번뇌가 약동하여 주야로 눈, 귀, 코, 입, 몸, 의지 등 육근문(六根門)을 통하여 번뇌를 누설시키기 때문이다.

번뇌를 누설한다는 말은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누(漏)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번뇌가 누설하여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의 윤회세계에 머무르게 하고 거주하게 하며 또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사론(俱舍論)]에서도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생사에 유전(流轉)케 하는 것을 누(漏)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인(惡因)을 조성하여 고과(苦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번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과업보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이를 우리 생활주변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음의 번뇌는 모든 인식의 대상(諸境界)에 대하여 애착심을 머물게 하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 그리고 또 계속 육근(六根)을 통하여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에 누락(漏落)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누락의 뜻도 있다.



이상과 같이 누(漏)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며 이러한 누(漏)가 마음속에 있으면 이를 유루심(有漏心)이라 하고, 또 유루심으로부터 발생하는 향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과 종자를 흔히 유루업(有漏業) 또는 유루종자(有漏種子)라 한다. 이 유루종자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은 유루종자에 의하여 생사고와 윤회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自覺)이 당연히 있게 된다.

이러한 자각심이 싹트는 것을 발심(發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발심에 의하여 불심(佛心)이 나타나게 된다. 윤회의 고통과 현재의 정신적인 고통을 면하려면 불심을 통한 선행을 해야 하며 더욱 나아가서 진리로운 행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행은 선업을 조성하고 진리로운 행동은 무루업(無漏業)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악행과 상대되는 선행이기 때문에 선보(善報)는 받을 수 있어도 영원히 윤회의 고통을 해탈시킬 수 있는 업력을 조성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무루업은 반드시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佛子)들은 일거수 일투족의 행동을 진리롭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정화가 없으면 누(漏)가 정화될 수 없고 누가 정화되지 않으면 항상 유루심에 입각한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마음이 정화되면 자동적으로 청정한 무루심이 나타나며 무루심에 의하여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곧 무루종자가 조성되고 또 훈습된다는 것이다.




그 훈습처는 제8아라야식의 자체분(自體分)에 의부(依附)하여 있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유루종자와 달리 청정하고 진리로운 업력에 속하기 때문에 표면으로 유루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의 대상(所緣)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루종자는 견분의 인연처이며 소연경인 상분(相分)에 포섭(攝)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자체분에 의지하여 있게 된다고 한다.

처음 발심하면 비록 무루심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더욱 정진함을 계속하면 무루종자가 강하게 되며 결국 유루심의 영역을 정화하게 된다. 따라서 유루종자도 추방되며 불성 또는 진여성도 점차 나타나고 구경에는 완전한 성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무루심이 나타나고 무루종자가 조성되려면 먼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생공무루(生空無漏)와 법공무루(法空無漏), 그리고 생공과 법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공무루(二空無漏)가 성취되어야 한다.

이들 공관(空觀)은 진리에 합당항 사상을 발생시키며 동시에 진리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 공관을 통하여 무루종자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사상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인간은 여러 인연으로 집합된 존재이므로 그 내용에는 공(空)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공관을 가져야 한다. 즉 나는 오온(五蘊)이 임시로 화합(假和合)된 것임을 관하여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수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생공관(生空觀)이라 하고, 또 아공관(我空觀)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인간은 안으로는 자신의 자성을 관찰하고 밖으로 삼라만상을 관찰하되 그 자성(自性)과 삼라만상의 체성이 공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법공관(法空觀)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자체와 사물의 자체까지도 공의 이치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임을 중도적으로 관찰하여 그에 대한 고정관념인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게 하는 수행이 곧 법공관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나(我)’라는 생각과 ‘나의 것(我所)’이란 생각이 동시에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이공관(二空觀)이라 한다.

이러한 공관을 통하여 자신의 머음속에 묻혀있는 온갖 지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지혜들을 방해하고 장애를 부렸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정화하게 된다.

즉 번뇌장은 마음의 편안함과 안정을 유지하는 열반(涅槃)을 파괴하는 것이며,

소지장은 인간의 본성에서 항상 발휘되는 지혜광명을 장애하고 무지(無知)케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지혜력에 의하여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유식학에서 말하는 사지(四智)와 불성(佛性)이 나타나며 이 불성을 흔히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도 한다.




사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을 말하며 아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또는 무구식(無垢識)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마라(阿摩羅)는 무구(無垢) 또는 청정하다는 뜻으로 청정한 진여심 그리고 불성을 하나의 식(識)으로 명칭하게 된 것이다.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의 유루식은 아공과 법공 등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곧 마음의 정화가 되며 아마라식과 사지(四智)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무루식의 활동에 따라 무루종자를 훈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나는 데는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워가면서 부단히 정진하여 무루종자를 하나하나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치 한 푼 두 푼 은행에 저축하여 결국 많은 돈을 모으듯이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범부들의 깨달음은 매우 미미하여 오히려 불각(不覺)이라 이름하였고 이승(二乘)과 처음 발심한 보살들의 깨달음을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초지(初地)로부터 구지(九地)에 이르기까지의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이 마음을 점차 깨달아가는 것을 수분각(隨分覺)이라 하였으며,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원만히 수행하여 최초에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완전한 심성으로 안주(安住)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도 무루종자를 훈습하며 깨달아가는 단계를 삼현(三賢)과 십지(十地)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는 초발심부터 시작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단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피하고 다만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등의 무루행(無漏行)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1) 견도(見道)의 수행



견도(見道)는 여러 설법을 자주 듣고, 깊고 견고한 대심(大心)을 발휘하여 진리로운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는 경지를 말한다.

견도의 보살은 초지보살이며 환희지보살(歡喜地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속한 보살은 삼공(三空)의 지혜를 나눈다.




첫째로 보살은 생공(生空)의 진여(眞如)를 관하여 생공 다음에 얻어지는 지혜(後得智)를 갖게 된다. 즉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갖 망상을 텅 비워버리는 곳에서 온갖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보살은 법공의 진여를 관하고 수행을 계속한 공덕으로 법공의 후덕지를 증득한다.

셋째로 생공과 법공이 함께 성취되는 구공(俱空)의 진여를 증득하여 관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구공의 후득지를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후득지는 생공관과 법공관 등 진리관을 갖고 수행을 열심히 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마음속의 지혜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견도의 경지는 공관을 갖고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는 수행을 쌓아 처음으로 진리다운 진리를 조견(照見)한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는 능히 집착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집착되어질 대상도 없는 절대의 경지에서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가 열리게 되는데,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진리를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 평등하게 관찰하여 합일의 경지에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진지(眞智)가 나타나서 마음을 동요시켜 장애를 야기하는 번뇌장(煩惱障)을 소멸하고, 또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를 방해하는 소지장(所智障)도 소멸하게 된다.

이제 말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은 번뇌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사실상 수행은 이 두 근본번뇌(根本煩惱)를 퇴치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뇌장은 아집을 발생시키고, 소지장은 법집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공관을 통하여 번뇌장을 퇴치하고 인간의 본심인 평화로운 열반을 중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한편 법공관을 통하여 소지장을 퇴치하고 역시 인간의 본성인 모든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보리(菩提)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열반은 마음의 평화와 안락을 뜻하고 보리는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지혜를 뜻한다.









2) 수도(修道)의 수행



수도(隨道)는 일명 수습위(修習位)라고도 한다. 이러한 수도위(隨道位)는 위에서 살펴본 견도의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용맹정진하는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보살의 수행은 대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십바라밀은

* 남에게 물질과 진리를 베풀어주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남을 도와 윤리적 실천을 수행하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진리탐구와 중생구제에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를 능히 참아내는 인욕바라밀(忍辱

波羅蜜)

* 보살은 역시 진리를 탐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때 방탕과 나태한 생각을 가지면 안 되고 전장

에서 적군과 싸우는 것과 같은 무퇴의 정진으로 책임완수를 하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

蜜)

* 선정은 마음을 평등하게 하며 동요의 정신을 버리고 항상 안주케 하는 선정바라밀(禪定波

羅蜜)

* 모든 사물을 진리롭게 관찰하고 불교적인 인연법과 연기법을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바라

밀(智慧波羅蜜)

* 보살은 무상관(無相觀)을 갖고 진리로운 방편으로 수행을 완수하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

蜜)

* 보살은 부단히 보리를 구하는 발원(求菩提願)과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발원(利樂他願)

등을 하며 쉼없이 정진하는 원바라밀(願波羅蜜)

* 지혜와 힘을 축적한 열 가지 힘(十力) 등을 발휘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역바라밀(力波羅蜜)

* 일체의 법을 반연하고 진여를 반연하여 진리롭게 수행정진하는 지바라밀(智波羅蜜)

등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십바라밀을 수행하되 자기 이익만을 추루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정화하고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계속 정진함으로써 무루심이 나타나고 또한 무루종자가 축적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오묘한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묘관찰지(妙觀察智)와 또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수도위의 기간은 초지보살로부터 제십지보살까지의 수행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차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면 결국 불타의 경지인 구경위(究竟位)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학도(無學道)의 수행



무학도(無學道)는 일명 구경위라 칭하기도 한다. 십지를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계속 추적해 온 나머지 불과(佛果)에 이른 것이다.

번뇌를 끊고 진리를 증득한 이른바 단혹증리(斷 惑證理)의 수행이 완수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안식 등 전오식(前五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화되고 제6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며, 제7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전환되고, 제8아라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하는 등 모두 지혜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의 목적은 유루식을 전환하여 무루지(無漏智)를 획득하는데 있다고 해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사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위에서 말한 사지를 증득하면, 그때는 무루의 정신작용(心所)만이 상응한다고 한다.

그 무루의 상응심소(相應心所)는 21종으로서 변행의 오심소(遍行五心所)와 별경의 오심소(別境五心所)와 선의 십일심소(善十一心所) 등을 말한다. 이들 심소의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피하기로 한다.




아무튼 사지에 무루의 21심소가 원만히 이루어지면 여기에는 오직 무루종자만이 훈습하게 되며, 결국 무루세계를 수용하고 동시에 중생에게도 회향하는 진리의 세계가 전개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루종자의 훈습은 일시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마음 안에 무루심과 무루종자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경에는 완전한 무루세계를 완성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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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훈습을 받는 마음과 훈습을 하는 마음 [所熏과 能熏]






위에서 여러 가지 종자설을 살펴보았다.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원인으로서 매우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자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되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즉각 현실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유루와 무루, 선과 악 등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안주(安住)하고 있다가 수시로 외부와 내부의 연의 도움(助緣)을 받아 현실 생활 위에 다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에 익혔던 지식과 습관 등을 말하며 이는 곧 새롭게 전개되는 정신의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곧 훈습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또 훈습(薰習)의 논리가 전개된다.




훈습의 논리는 아라야식과 그밖의 칠전식(七轉識)과의 관계를 논리화한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이식(耳識)은 성경(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등 모든 식(諸八識)은 제각기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하여 활동하는 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心)을 팔식(八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유식학은 팔식의 활동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면을 설명하고자 훈습설을 전개하고 있다.




유식학의 훈습설에 의하면 팔식의 활동은 훈습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훈습은 종자와 업을 조성하는 산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팔식의 내외의 활동이 곧 종자를 조성하는 훈습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여 훈습에 대한 내용을 현실성 있게 해석하게 된다.

즉 우리 인간이 정신을 통하여 지식을 익히고 배우며 개발하는 것을 생활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을 살펴서 훈(熏)은 개발(開發) 또는 유치(由致)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발은 전에 없었던 지식과 사상, 정신 그리고 육체적인 기술과 습관성 등을 새롭게 개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개발된 내용들은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미래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기술로 나타날 수 있는 종자로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키게 된다.

이러한 종자를 신훈종자(新熏種子)라 한다. 동시에 이 개발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지식과 사상 및 기술과 같은 원인종자(原因種子)를 돕는 조연(助緣)이 되어 현실의 정신생활 속에 발생하도록 한다는 뜻도 있다.

다음 유치(由致)의 뜻도 이미 보존되어 있는 아라야식 내의 종자를 밖으로 유치하여 현실생활에 현행(現行)의 상태로 표현되도록 하는 역할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발과 유치의 뜻은 현재의 정신생활과 밀착된 뜻을 지니고 있다.




다음 습(習)에 대한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습의 내용에는 생(生), 근(近), 삭(數)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부언하면, 습은 익힌다는 뜻으로서 종자를 아라야식 내에 새롭게 조성하되 시시각각 자주 익힌다는 뜻에서 삭(數)이라 하며 전체의 뜻을 종합하여 자주 훈습함을 말한다.

그리고 근(近)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로 하여금 시간적으로 즉시 훈습한다는 뜻이다. 끝으로 생(生)은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결과로 발생케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수, 근, 생의 뜻을 종합하여 보면 종자를 자주(數) 훈습하고 동시에 그 종자로 하여금 바로(近) 발생(生)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훈습의 뜻에는 매우 현실성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자의 훈습에는 밖으로부터 훈습되어지는 종자가 있는가 하면 안에서 밖으로 발생하는 훈습의 뜻도 있는 것이다.

즉 밖에서 안으로 훈습되어지는 것은 곧 아라야식을 말하고 그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은 칠전식이다.

그렇다면 종자의 훈습을 받는 아라야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훈습을 받게 되며 동시에 훈습을 하는 칠전식은 어떠한 내용이 있어 훈습을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심식의 활동을 말하여 소훈식(所熏識) 또 능훈식(能熏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종자의 훈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을 소훈식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하는 식을 능훈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 내용을 분류하여 소훈식 또는 능훈식으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들 별명들을 팔식에 관계시켜 보면 아라야식은 소훈식이 되고 그밖에 말나식 등 칠전식은 능훈식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훈식과 능훈식은 무조건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소훈사의(所勳四義)와 능훈사의(能熏四義)로서 설명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훈습을 받는 마음 [所熏識]



소훈식(所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훈습을 받는다는 뜻이 있다.

이는 칠전식이 훈습하는 종자를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훈습을 받는 입장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와 업력의 훈습을 받는 심식에는 반드시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에는 다른 식에 구비할 수 없는 네 가지 조건(四義)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네 가지 조건 즉 사의(四義)는

첫째, 견주성(堅住性) 둘째, 무기성(無記性) 셋째, 가훈성(可熏性) 넷째, 화합성(和合性) 등을 말한다.

아라야식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뜻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칠전식의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훈처(所熏處)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종자가 육의(六義)를 구비하였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들 네 가지 뜻은 다음과 같다.







가) 견주성(堅住性)

견주성의 뜻은 윤회하기 시작한 태초(太初)부터 번뇌망상이 해탈되는 구경위(究竟位)이 이르기까지 성질이 변하지 않고 일류상속(一類相續)한다는 뜻이다.

일류상속은 일류(一類)는 곧 견(堅)을 뜻하며, 상속(相續)은 주(住)를 뜻한다. 이 말은 훈습을 받는 곳(所熏處)은 그 성질이 견고하며 지속적으로 안주(安住)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훈습된 종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보(安保)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훈습처인 아라야식이 수시로 변질한다면 그 곳에 훈습되어 포장(包藏)된 종자는 안주하지 못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이는 보살수행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견도(見道)의 수행위에 오를 때 유루종자는 점점 없어지고 칠전식의 번뇌도 정화되어 무루식으로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종자의 훈습처인 아라야식만은 최후까지 윤회의 주체로서 지속하며 또 성불(成佛)할 때 까지 유루업을 지속시켜 준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만이 종자의 훈습처가 되고 또 윤회의 주체로서 자격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교설은 소승불교의 경량부 등이 업력은 몸과 마음애 같이 훈습(色心互熏)하게 된다는 이론을 배척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나) 무기성(無記性)

아라야식과 같은 소훈처는 반드시 모든 종자를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성질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은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 무기성은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기성인 아라야식은 선업과 악업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훈습되어 오는 종자들을 모두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장소에 적합한 것이다. 이는 다른 심식들이 선과 악에 치우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특성인 것이다.

만약 훈습을 받아 저장하는 장소(所熏處)가 이미 선성이거나 악성이었다면 선악업을 공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장소가 되고 만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에 독한 향기가 이미 배어 있다면 그 장소에는 다른 향기가 안착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배격되고 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처는 오직 무기성이어야 하며 그 무기성을 지닌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고 한다. 여기에 모든 종자는 자재하게 훈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 가훈성(可熏性)

가훈성(可熏性)은 어떤 종자든지 훈습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견밀성(堅密性)과 대조하여 하는 말이다. 견밀성이란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견고하고 밀착된 성질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견밀은 마치 암석과 같은 것에 물을 부어도 잘 젖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훈습을 받는 장소는 견밀성이 아닌 가훈성으로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라) 화합성(和合性)

화합성(和合性)은 소훈식인 아라야식이 능훈식인 칠전식과 어떠한 경우라도 마찰없이 화합하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과 칠전식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이탈하거나 마찰없이 중도적으로 부즉불리(不卽不離)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의 훈습과 시간이 다른 전후의 간격이 있는 훈습은 받지 않는다.

만약 훈습을 받는 장소(所熏處)가 안식 내지 말나식 등 칠전식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면 정신의 문란과 인과의 질서가 파괴되며, 또 다른 사람의 업과(業果)를 받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훈처인 아라야식은 다른 지말식들과 항상 화합하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식들의 훈습을 받는 장소로서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훈습을 하는 마음 [能熏處]



능훈식(能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능히 훈습을 하는 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팔식 가운데서 아라야식을 제외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칠전식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선업과 악업 등 온갖 업력을 아라야식을 상대로 능히 훈습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식(轉識)이라는 말은 심식의 성질이 선 또는 악 등으로 시시각각 전변(轉變)하고 변화하며 또 여러 작용을 전생(轉生)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여러 가지 성질로 활동하는 마음을 전식이라 한다.



이러한 칠전식을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들이라고 해서 능훈식(能熏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능훈식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 능히 훈습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 네 가지 뜻은 곧 유생멸의(有生滅義), 유승용의(有勝用義), 유증감의(有增減義),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 등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뜻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가) 유생멸의(有生滅義)

번뇌가 있는 유루적인 모든 것을 생멸이 있는 법(生滅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훈식도 무상하게 항상 전변하는 생멸의 성질을 갖고 있어야 선악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생과 멸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생멸심(生滅沈)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원리가 없으면 선악의 업력을 능히 훈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법(無爲法)은 생멸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여기서는 제외된다.







나) 유승용의(有勝用義)

능훈식(能熏識) 습기(習氣) 또는 업력을 훈습하고 증장(增長)시키는데 수승한 작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업과 악업을 능히 훈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칠전식은 선행과 악행 그리고 지혜를 장애하는 유부성(有覆性)을 강하게 나타내는 승용(勝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능히 선악업을 훈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라야식과 색법(色法) 등은 그렇지 못하다.







다) 유증감의(有增減義)

능훈식은 반드시 증감(增減)의 뜻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과 멸, 선과 악이 되풀이되는 유루식은 수행에 의하여 정화될 수 있고, 무루위에 오르면 필연적으로 염오의 성질이 감소되고 반대로 청정한 무루법은 증장되는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량심이 가장 많은 말나식의 성질도 제8지(第八地)의 보살위에 오르면 자연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전식에는 증감의 뜻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능훈식에 증감의 뜻이 없다면 아무리 수행하여도 그 마음이 정화되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중생들은 영원히 선악업만 짓게 되고 또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게 되는 비진리가 따르게 된다.

이와 같이 능훈식에는 증감의 뜻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번뇌의 마음이 정화되어 무루의 보살위와 불과위(佛果位)에 오를 수 있게 되는 인과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증감은 유루식에 한하고 무루식에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약 무루법에 증감이 있다면 부처님도 청정하지 못한 유루식으로 다시 타락해야 하고 또 생사에 윤회해야 하는 비진리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증감은 번뇌가 많을 수도 있고 감소 할 수도 있는 유루식에 한정되며 청정무구한 무루식에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루진여(無漏眞如)의 세계는 부증(不增)하고 불감(不減)하기 때문이다.







라)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는 칠전식인 능훈식(能熏識)과 아라야식인 소훈식(所熏識)이 서로 화합하여야 함을 말한다.

능훈식의 기능이 아무리 다양하고 활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업력과 종자를 훈습할 때 소훈처(所熏處)인 아라야식과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능훈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훈처인 아라야식과 마찰하여 종자를 훈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훈식이 새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자를 소훈처에 훈습할 때 소훈식과 추호도 마찰없이 화합하여 원만하게 훈습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서로 화합하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닌, 또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부즉(不卽)과 불리(不離)의 관계를 유지하여야만이 새로운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능훈식인 칠전식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네 가지 뜻(四義)을 가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여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할 수 있다.

그리고 소훈식도 역시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만이 모든 종자의 훈습을 받고 또 안보하며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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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체와 물체를 이끄는 업인 | 유식학입문 2004/11/0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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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체와 물체를 이끄는 업인(業因)




내종(內種)과 외종(外種) 그리고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생인(生因)과 인인(引因)도 단변과 중변의 내용과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생인과 인인은 또 다른 독특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생인에 대해서 말해 보면 글자 그대로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 생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果)는 여러 가지 과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과보로서 이를 근과(近果)와 정과(正果)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무성논사(無性論師)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비유하여 생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생인은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을 발생하는 업인이 되는 것이며 이 식을 근과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금생에 출생하는 식이 전생의 생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또 가장 가까운 인연관계를 맺고 있는 결과라는 뜻에서 말한 것 같다.

세친논사(世親論師)는 이를 정보(正報)라고 하였으며 식물에 비유하면 곡맥(穀麥) 등이 종자에서 직접 발생하기 시작한 그 자체를 생인이라고 하였고 동시에 이는 내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 생인이라는 것은 종자 자체가 발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내종이라 하고 같은 결과이지만 종자와 근접한 것을 근과 또는 정보라고 한다.




다음 인인은 앞에서 말한 근과와 정보라는 것과는 달리 원과(遠果) 또는 잔과(殘果)를 발생하는 업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출생할 때 최초로 태어나는 생명체를 정보라 하고 그 위에 이목구비 등 여러 형상이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이름도 별명이 있게 되는데, 정보를 발생한 종자를 생인이라 한다면 별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힘을 인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별보를 원과 또는 잔과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곡맥(穀麥) 등이 발아하여 그로부터 성장하는 줄기, 가지, 잎, 꽃 등은 모두 인인에서 발생하여 성장하며 이들을 말하여 원과, 잔과 또는 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은 내부의 과보보다 외부의 과보를 발생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인인은 더욱 확대 해석되어 외부의 세계에 나타나 있는 모든 사물까지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것은 세친의 주장으로서 가령 외부에 있는 수목이 수명이 다하여 고목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고목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으면서 점점 썩어질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식목이 다 없어질 때까지 무엇이 유지시켜 주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는 유루의 업력에 의하여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친논사는 수명이 다한 고목도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초목들은 생인과 인인에 의하여 생존하며 고목과 같은 것은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시체와 다른 잔재가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점차 부패되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은 인인의 힘에 의하여 그 몸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종자론(種子論)에서 일체의 삼라만상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어지고 또 유지된다는 말을 더욱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만을 중심하여 설명하면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은 물론 수명이 다한 시체와 고목 등 목석도 종자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불공종자(不共種子)와 공종자(共種子)



종자는 내종(內種)과 외종(外種)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으로도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종자를 불공종자와 공종자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내종과 외종 등의 역할과 흠사한 점이 없지 않으나 좀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과보와 공동의 과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불공종자(不共種子)의 내용을 보면 불공종자는 글자 그대로 공동의 업력이 아닌 개인적인 업력으로서 자신만이 과보를 받고 또 자신만이 수용하고 이용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신계는 말 할 것도 없고 적어도 몸의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불공종자라고 한다.



다음 공종자(共種子)는 공동사회와 공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를 뜻한다.

중생이 어디에 출생하든지 그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게 된다. 다른 생명체와 같이 살 때는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회가 있고 또 공동으로 활용하는 사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물체 그리고 공동의 자연계는 무엇이 창조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는 각자의 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중생 각자의 몸은 업력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여지는데 공동의 사회와 자연계 등 공유물의 연기(緣起)설은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사물은 공동의 업종자(業種子)에 의하여 유지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종자설도 확대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자란 마음을 중심한 행동에 의하여 창조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하여 유지되는 업력과 종자는 스스로 몸을 포함한 공동의 사회까지도 유지시킬 수 있어야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종자를 논할 때 종자는 모습이 있는 과보와 결과를 창조한다고 해서 모습과 직결시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 등이 그것이다.

즉 상(相)은 모습을 뜻하며 그 모습은 만유의 모습을 유지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종자에게 모습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들 종자에 대한 자세한 분류를 보면

불공상(不共相)은 불공중공(不共中共)과 불공중불공(不共中不共) 등으로 분류하여

세계와 사물을 창조하는 원리로 설명한다. 이러한 분류들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과 동물이 의지하고 사는 사회와 사물의 성질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 종자의 이론인 것이다. 이제 종자의 각 분류대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2) 불공중불공종자(不共中不共種子)



이 불공중불공종자는 종자의 성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미세한 위치에 있다.

이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공동의 것이 아닌 중에서 또한 공동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자기 혼자만의 소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의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정신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육체가 포함될 수 있으나 외부의 육체는 남에게 고용될 수 있으므로 포함시키지 않고 육체 가운데서도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勝義根)에 해당하는 것까지는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승의근은 육체의 본질이며, 무형(無形)의 육체이기 때문에 남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정신계와 같이 오직 자신만이 소유하며 사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공중불공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까지를 발생하고 또한 창조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



이 불공중공종자는 위에서 살펴본 불공중불공종자보다는 약간의 외형을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를 인간에 비유한다면 우리 자신의 신체를 의미한다.

육체는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만이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남에게 고용될 수도 있는 몸이기 때문에 공유물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공동의 것이 아니면서도 공동의 것이기 때문에 이 몸을 창조하는 종자의 성질도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라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즉 인도의 유식하자인 안혜논사(安慧論師)는 피부에 해당하는 부진근(扶塵根)은 물론 승의근까지도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 또는 창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호법논사(護法論師)는 사람의 피부 등으로 이루어진 객관계의 육체는 고용인이 노비(奴婢)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되거나 창조되지만, 지. 수. 화. 풍(地 . 水. 火. 風) 등 사대(四大)로 창조된 육체의 성질인 승의근만은 고용주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또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불공종자의 창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외부의 육체에 해당하는 피부 등 부진근만이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고 승의근은 불공중불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4) 공중불공종자(共中不共種子)



이 공중불공종자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제외하고 그밖에 대지위에 있는 가옥과 전답 등을 발생하고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 말은 모든 생명체와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연 가운데서도 개인의 소유가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넓은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누구에게나 소유할 수 있는 몫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공중불공종자라는 종자설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이다.









5) 공중공종자(共中共種子)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은 후천적으로 개인소유도 있지만 영원히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의 소유가 많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공기와 물 등 산하대지는 영원히 공동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업력사상이 곧 공중공종자(共 中共種子)사상이다.

이는 산하대지가 한 중생의 업력에 의하여 모두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라 일부분을 유지시키는 몫을 가지고 나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가히 셀 수 없는 뭇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의 업력에 의하여 지구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사는 중생들의 업력이 악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도 악화되어 그 생명체들이 살기에 불편하도록 환경이 조성된다. 반대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업력을 선하게 발생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는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가 살기 좋도록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축소하여 보면 우리 주변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으로 종자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가운데 종자가 각자의 몸과 마음을 변현하고 또 창조하는 핵심 세력이 된다는 것은 인과응보사상에서 많이 말하는 내용이지만,

인간외의 객관 세계까지도 종자에 의하여 유지되고 건설된다는 학설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론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상을 포함하여 만법(萬法)은 유식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자가 이 세계에 보탬이 되고 세계를 유지시키는 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그 이치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칸에 수백 개의 전등이 있다고 하자 그 방에 새로운 전등을 하나 더 켰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그 방에 한 전등이 꺼졌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도 공업(共業)을 발휘하면서 이 세상에 한 사람이 태어나거나 아니면 사망할 때, 그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렇게 알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생각하면서 공업설(共業說)을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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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자(種子)의 성질과 육의(六義)



종자는 곧 업력의 뜻이며 업력은 인간의 행위를 비롯하여 중생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다는 것을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성된 종자는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종자의 내용에는 여섯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여섯 가지 의미는

첫째로 종자는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둘째,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발생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종자는 항상 지속적이면서 발전적이어야 한다.

넷째, 종자는 선악의 성질이 분명하여야 한다.

다섯째, 종자는 여러 인연을 기다렸다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종자는 자신의 성질과 꼭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여섯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종자육의(種子六義)라고 한다.

이들 종자육의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찰나 생명의 성질 [刹那生滅義]



종자는 찰나에 생멸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윤회의 법과 그리고 유위(有爲)의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종자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사바세계와 중생의 선과 악 또는 고통과 안락 그리고 생과 사 등의 현상계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찰나찰나 생과 멸을 되풀이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멸의 법을 창조하는 만법의 종자는 그 자체도 생멸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식학의 주장이다. 만약 생멸이 불가능한 종자라면 찰나에 생멸하는 만법을 발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찰나에 생멸하는 종자만이 만법을 연기(緣起)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법(眞如法)과 무위법(無爲法) 등 상주하는 불생불멸의 진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주불변의 무위법은 무루종자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동시의 인과 [果俱有義]



인과가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과구유(果俱有)라고 한다.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발생하는 능생(能生)의 원인이다. 능생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결과도 동시에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현재의 행동과 현상을 발생하는 종자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행동과 현상은 바로 결과가 되며, 이 결과는 또 다시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안에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에 대해서 결과가 되며, 동시에 업력이며 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과 동시의 연기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과구유라 한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만약 앞에 훈습된 종자가 시간의 간격이 있게 되면, 그 종자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비진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전후가 없는 현재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3) 동일한 성질의 유지 [恒隨轉義]



종자는 반드시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

이를 항수전(恒隨轉)이라고 한다. 항수전은 앞과 뒤의 변화가 없이 항상 그 성질을 유지시켜 가면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지속성이 없다면 인과의 도리에서 벗어나 원인없는 결과(無因有果)를 초래하는 인과의 무질서를 가져올 우려가 있게 된다. 그리고 원인은 있어도 결과가 없는 유인무과(有因無果)의 잘못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자는 제8아라야식 안에서 영원히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지속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그 종자를 잘 보존하는 지종(持種)의 뜻을 살려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여러 식 가운데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고 하며 다른 식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가령 제7말나식은 최고의 수행위인 금강심위(金剛心位)에 오르면 염오식(染汚識)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전5식(前五識)은 항속(恒續)의 의미가 없어지며,

제6의식은 오위무심(五位無心)의 경우에 단절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말식(枝末識)은 종자를 지속시키지 못하는 흠이 있게 된다.

오직 아라야식만이 종자를 보존할 수 있고, 또 그 종자는 선의 내용과 악의 내용 등 자체의 성질을 변함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일류상속(一流相續)의 성질을 갖도록 하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4) 성질의 분명성 [性決定義]



종자는 아라야식 가운데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잡란(雜亂)치 않고 일정해야 한다. 이를 성결정(性決定)이라고 하며 종자는 성질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전7식이 활동하고 현행(現行)하는 내용이 선행(善行)이라면, 이 선행의 업력이 아라야식 안에 보존될 때도 선성(善性)의 종자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성질과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훈습되어지는 종자도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삼성(三性)의 성질 가운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던 간에 그 성질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









5) 조연의 기대 [待衆緣義]



종자는 위에서 말한 찰나멸(刹那滅), 과구유(果俱有), 항수전(恒隨轉), 성결정(性決定) 등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종자에 대한 조연(助緣)이 없으면 결과를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자든지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유식학에서는 대중연(待衆緣)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因)은 연(緣)을 만나야 과보를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연은 바로 만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나기도 하여 그 연이 도래할 때까지의 그 인의 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 과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를 발생하는 데는 인만이 단독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도 과에 대해서 인 못지 않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관찰할 때 인(因)과 연(緣)은 과(果)에 대해서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의 내용을 보면 안으로는 여러 심식을 비롯하여 경각심(警覺心) 등 작의(作意)의 정신작용(心所)과 심식의 의지처인 근(所依根)과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며 객관세계에 해당하는 육경(六境) 등이 모두 연에 해당한다.

이들 연은 아라야식 내에서 종자들끼리 서로 연이 되어 생동하고 있는데, 이들 인을 상대로 하여 결과를 발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연은 인에게 조력하여 과보를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그리고 연은 인과 과와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에서 오직 하나만의 원인(原因)이 다른 연의 도움없이 즉흥적으로 결과를 발생한다는 이론을 배격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발생적인 창조설을 부인하고 유일신(唯一神)적인 창조설에 해당하는 일원론(一元論 )을 배격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6) 종자와 과보의 동질성 [引自果義]



종자에는 각각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여러 성질의 종자가 있다. 이러한 종자의 성질에 따라 결과의 성질도 동일하게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여 인자과(因自果)라고 한다. 인자과라는 말은 선의 종자는 선의 과보를 받도록 하고 악의 종자는 악의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성격의 결과를 초인(招引)함을 인자과라 한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은 여러 가지 성질의 종자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현상계의 모습과 개체를 조성하고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만유(萬有)의 제법을 창조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일한 원인이 만물을 창조한다는 외도(外道)들의 삿된 사상을 배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불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외도라고 하는데,

이 외도들은 우주 안에는 유일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였다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 하나의 원리(一因)가 다양한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유일신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또는 유일한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일인(一因)이 많은 결과(一因多果)를 창조하게 되는 비진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인다과설을 배격하고 다인다과설(多因多果說)을 주장하는 것이 곧 불교의 인과설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종자의 성질은 다양한 것이며 동시에 다양한 결과를 발생시키고 또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자는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 의미(種子六義)를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4. 만법(萬法)은 유식(唯識)






위에서 종자에 대한 여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종자에는 내종(內種)이 있고 또 외종(外種)이 있다고 한다.

내종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로서 위에서 설명한 육의(六義)를 구비하고 있는 종자를 말하고 외종은 자연계에 생성하고 있는 곡식(穀麥) 등을 말한다.



이들 외종은 아라야식에서 발생한 공종자(共種子)를 의미하기 때문에 종자의 육의(種子六義)를 구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계(八識界)를 떠나 밖에 있는 종자라고 하더라도 아라야식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외종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되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인간의 정신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종자란 말은 자기 혼자만의 이용물이 아니고 여러 중생과 더불어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물과 환경을 발생하는 종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진실한 종자(實種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종자는 우선 가명으로 종자라고 할 뿐이며 실제의 종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종자는 결과에 대하여 북돋아 주는 증상연은 되어도 직접 결과를 발생시키는 친인연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육의가 구비한 종자만큼 직접적인 역할을 못하고 간접적인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단변은 친히 변현시키는 친소변(親所變)의 상분(相分)에 해당하며 이 상분은 또 제8아라야식의 상분으로서 이를 내종(內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상분은 내종에 해당한다. 이러한 아라야식의 내종은 직접적인 아라야식의 상분을 변현하기 때문에 이를 단변(單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 단변에서 다시 변현하여 외부의 현상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중변(重變)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는 외부의 현상계를 변현시키는 종자라는 뜻에서 외종(外種)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고 또 밖으로 결과를 발생할 때도 이중적인 변화를 얘기하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여 단변 또는 중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 종자도 자신의 수용물을 발생하는 것을 불공종자(不共種子)라 하고 동시에 여러 중생들이 함께 수용하는 사물과 자연계를 발생하는 종자를 공종자(共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을 달리 분류하여 내종과 외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종자에 대한 논리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또 확인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