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스님 법문

2008. 7. 4. 17: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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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체득되는 선의 깨달음에 눈뜨라"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 3월 20일 조계사 기획법회서 법문 ---




"화두의 뜻을 풀어도 된다. 대신 온 몸으로 체득되는 깨달음에 눈을 떠야 한다."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은 3월 20일 서울 조계사(주지 원담)와 불교신문사(사장 향적)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공동 주최한 ‘한국불교 미래를 듣는다’ 기획법회에서 ‘불교의 깨달음’을 주제로 한 법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스님은 “간화선에서는 현실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인연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신비화해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간 화두의 뜻을 푸는데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게 했고, 또 화두를 풀어서도 풀지도 못하게 했다”며 “깨달은 사람이 그때그때 방편을 열어 부처님 같은 법을 쓰든지 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알려줘야 한다”고 법문했다.

스님은 또 “한국선의 앞날을 위해 화두를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화두를 풀든 말든 하나를 풀면 다 풀린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비밀로 할 필요 없다. 화두는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체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한다”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이나 못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온몸으로 체득되는 그런 깨달음에 눈을 떠야 한다”며 “이런 깨달음의 방법을 모든 중생에게 공개돼야 한다. 여기서는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법으로든 몽둥이로 맞아서든 열어 보여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다음은 수불 스님 법문 전문

겨울은 이미 봄을 잉태하였고, 봄이 오니 저절로 새 싹이 움튼다네.
이는 동군이 천기를 누설한 것도 아니요, 때가 되니 풍요로운 햇살이 쏟아질 뿐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잉태하고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립니다.
왜냐고요? 많은 분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봄이 그리워지는군요.
지금부터 저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아무리 추운 겨울의 삭풍이 몰아치는 날이라 할지라도 나의 마음에는 이미 봄이 왔습니다.
참선하는 이여! 너무 많은 걱정들은 하지 마시고 저와 함께 봄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눈으로 가르치는 종교이다. 우리는 종교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위한 믿음, 즉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쉽게 말하면, 종교적인 눈과 상식적인 눈이 있다. 그 눈이 차이점을 잘 알지 못하고 종교를 의지하고 믿기 때문에 종교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비유하면, 상식적인 눈은 밝음이 어둠을 비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상식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하고는 또 다르다. 밝음도 어둠도 비출 수 있는 동시 비출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밝다고 할 수 있다.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종교 영역을 이해하려면, 한 쪽으로 뜨지 못한 한 눈을 보려는 것과 같다. 양쪽의 눈을 다 뜨고 이쪽저쪽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으려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쪽 눈만 떴다든지 겨우 한 쪽 눈만 떴는데 양쪽 눈을 다 뜬 것처럼 이야기하면, 그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청정하면 마치 깨끗하다고 한다. 그것이 맞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이 맑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양쪽을 다 소호할 수 있는 이치를 먼저 밝히고 또 이치를 밝힌 연후에 그 이치를 버리고 직접 체험에 들어갈 수 있는 눈을 열어야 한다.

종교를 위한 종교생활을 하면 어리석어진다. 광신자 맹신자 되기 십상이다. 이들은 물질적 정신적인 상을 의지하게 된다. 우상 아닌 본질을 자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종교가 이야기하려는 근본 핵심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런 가르침에 의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그런 입장이 돼야 한다. 일반적인 진리개념과 윤리적인 개념은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진리개념은 선을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다. 깨끗한 것은 진리고 더러운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는 진리고 불이는 진리가 아니다. 이런 개념 속에서 이해된 그런 모습을 ‘맞다’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 윤리개념으로 들어가면, 그 말에 모순이 있다는 말을 알게 된다. 종교윤리개념 속에서는 선속에서도 진리가 있고 악 속에서도 진리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말한다. 때문에 진리는 선악을 포용하되 선악에 물들지 않는다. 물들지 않은 그 영원한 마음을 우리는 자각을 해야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자각했고, 조사들이 그것을 전했고, 오늘날 우리들은 그것을 통해 깨달음에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를 믿지 않고 진리에 나아가는 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이나 과학이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기껏해야 과학은 지동설 등을 증명하는 수준에만 머물 뿐이다. 때문에 과학이 아직 종교를 뒤쫓아 가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종교를 믿어야 하는데 종교를 통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게 해야지 진리에 눈을 뜨게 할 수 있다. 종교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이 발전됐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집단이 종교학이고, 그것을 조금 보태놓은 것이 종교사학이고, 정밀하게 일상생활에 소화시켜놓은 것이 종교윤리학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배울 수 있지만 거기에 머물거나 집착하면 아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만 머물고 빠지면 안 된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회도 그렇다. 사회윤리, 사회사상 등 개념적 정리를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것이 수레의 양 바퀴와 같다. 한 쪽은 정신적인 바퀴고 다른 한 쪽은 물질적 바퀴라 할 수 있다. 이 두 바퀴는 진리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수레바퀴가 같아야 똑 같은 움직임이 있지만, 크기가 다르면 작은 바퀴를 축으로 그 자리에서 돌게 된다. 그럼 나아가지를 못한다.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수레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타고 갈 수 있는 대승적인 수행방법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종교윤리, 의식, 제사, 종교교육, 사업 등은 모두 종교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종교는 진리를 깨닫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종교를 통해 지향점을 찾게 된다. 과연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물을 수밖에 없다.

보다 나은 가르침을 통해 자각할 수 있는가? 먼저 눈을 떠 앞서가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종교 이전은 지식과 상식이 통한다. 그러나 종교가 배움과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지혜란 이름으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비유하면, 밝은 해가 깊은 바다를 비추는데, 과연 몇 미터를 비출 수 있겠는가? 과학에서 증명된 것으로는 1만 미터 이상이라 했다. 해가 아무리 깊은 비춰도 그 이상을 비출 수 있겠는가? 현실 속에서 가장 밝은 해가 5백터 1천미터를 비춘다고 하자. 나머지 밑은 어떠냐? 바다 밑 바닥은 한번도 밝음이 비춰지지 못한 세계다. 그것은 근본무명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런 깊은 어둠까지도 밝게 비출 수 있는 빛이 필요하다.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밝음도 어둠도 비출 수 있는 빛이다. 어둠과 밝음을 함께 비추는 빛이야 말로 모든 바다를 다 비출 수 있다. 그런 지혜를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또 그런 지혜를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우선 막혀 그런 인연에 머물러 있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출가해 새벽 별을 보고 깨닫고, 용수, 중국 달마 스님에게로 이어져 왔다. 그 중 하나가 <능가경>을 가져왔고, 그것이 삼조 승찬 스님까지 내려오다 이후 <금강경>으로 바뀌게 된다. 역사적인 사건이다. <금강경>으로 바뀐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후 역대 조사들은 <금강경>을 통해서 선적인 사유를 했다. 또 육조 스님 이후 남종선, 북조선 등이 갈라졌고, 이후 종고 스님이 간화선을 체계화했다. 이후 남종선이 중국선을 지배하면서 조사선이 활짝 열린다.

그런데 조사선적 가르침은 선지식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특히 조사선적 가르침은 직접 부딪쳐야 한다. 조사선의 가르침은 공안을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근원적인 의심을 하게하고 문턱을 닳도록 조실 스님 방문을 두드리라고 했다. 조실을 만나 바로 선으로 들어가게 하고 믿음으로 언하변오하게 했다. 또 인연따라 깨달음을 얻는 그런 공부법을 채택한 것이 조사선이다. 많은 조사들이 나왔고, 하지만 한정이 됐다. 사원 중심으로 그런 일련이 진행됐기에 재가자들에게는 깨닫는 이가 제한됐다. 그런데 간화선 시대가 열리면서 승속을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서장>에서 나오는 부분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뤄진 선서다.

하나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하면서 한 것이 간화선이다. 반면 조사선에서는 근원적인 의심에 대한 공부를 강조했다. 화두를 사유해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는 않아도, 곤란한 말이다. 깨달음을 구하고 난 뒤 부처님도 사유를 했다. 깨닫기 전에는 사유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통한 사유는 말할 수 있어도,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간화선적인 입장은 하나의 공안을 들고 심화해야 한다. 한국 선종은 이미 신라 때 마조선이 들어왔다, 마조선, 구산법문, 고려 보조국사가 서장을 보고 ?뗌습? 밝혔다.

간화선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두공안을 신도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럼 공안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냐면, 조사선 시대의 공안제시 방법과 간화선 시대의 공안제시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을 구별하게 될 수 있고, 그런 양쪽의 수행방법을 다 체득하게 되면, 더 이상의 말 할 것 없이 좋다. 묵조선 수행법은 조용한 환경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다변화되는 현실 속에서는 묵조선 수행이 쉽지 않다. 오히려 일과 수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수행법이 필요하다. 의심을 하되 의심을 한번에 잡을 수 있는 그런 의심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번에 의심을 잡을 수 있는 의심을 하지 않고 있다.

선지식을 잘 알아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수행을 하고 점검받을지가 오늘날의 수행자들의 숙제다. 진짜 공부 잘 하고 싶은데 불교를 잘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불교를 제대로 알고 눈을 뜰 수 있겠는가? 다 하고 싶은데 만만치가 않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됐다. 가령 ‘누가 나를 끌고 다니는가’라고 물었을 때, 본인이 본인에게 묻는 공부방법은 곤란하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뭣고’하고 하는 공부는 이미 죽은 공부다. 그렇게 공부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기심을 자극해서 공부시켜는 것은 물론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다. 하도 사탕 달라고 조르니까 ‘이거 물고 있어라’는 차원에서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뭣고’하고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부법으로 현실적으로 병폐가 생긴다. 공부를 더 힘차게 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만들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뭣고’하는 것은 선지식이 묻는 질문이다. 눈 밝은 선지식이 이미 답을 안 연후에 답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네 본래면목을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이렇게 물어줬을 때, 언하변오하든지, 의심이 되는지 또 다른 선지식에게 묻는 등 이런 일련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뭣고’하고 물었을 적에, 문제를 외면서 답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 문제를 한번 보고 듣고 익히면 된다. 스승이 제자에게 한 마디 던진 물음에 제자는 답을 해야 된다. 거기에 대한 올바른 답을 했을 때 인가를 해주는 것이다. 답을 얻지 못했을 때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의심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의심을 안 할 것 같으면 그만 둬야 한다.

의심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제대로 의심이 되면, 목을 꽈 쪼는 것을 경험해 죽을 지경까지 돼야 한다. 또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사방에 쪼여 온다. 나갈 길은 안 보이고 답은 찾아야 겠고, 그러나 길은 안 보이고, 앉지도 서지도, 가도 못하고 오도 못하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야 되는 경지가 의심이 바짝 든 상태다.

화두는 온 몸으로 갑갑한 마음 상태,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들려져야 한다. 그렇게 화두가 들려져야 한다. 직접 주인공을 불러야 한다. 온 몸으로 의심이 될 때, 의심을 들어야 한다. 스승에게 만나 묻든 편지로 물어야 한다. 공부는 빨리 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다. 언제든지 몸에서 우러나오는 의심이 돼야 한다. 멋대로 하고 안 하면 안 된다. 그때서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수행이 좋다고 하는 말만 듣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가령, 선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선은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진리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무슨 공부로 이 것을 온몸으로 바로 체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승속,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공부라고 부처님은 말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뒤에, 근기와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했다. 깨달은 난 뒤에 근기에 맞춰 인연법을 설했다.

육조 스님은 <단경>에서 법문을 들려고 온 모든 사람이 선지식이라 했다. 대선지식을 못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지식을 만날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견성법, 마하반야밀법을 설했다. 여기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은 견성하고 난 뒤에 견성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말한다. 혼자만 깨달았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겠다는 법이 마하반야바라밀법이다. 입만 갖고 마하반야바라밀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을 해 문자로서 현실적으로 증명돼지는 실질적으로 온몸으로 체득되는 그런 깨달음에 눈을 떠야 한다. 이런 깨달음의 방법을 모든 중생에게 공개돼야 한다. 여기서는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부처님은 공개 안 한 것이 없는데, 무슨 노하우라도 된다고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법으로든 몽둥이로 맞아서든 비판도 받고, 칭찬도 듣고라도 열어 보여야 한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현실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인연법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자칫 잘못하면 신비화돼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알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또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게 했다. 화두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니 화두를 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물론 공부 못한 사람이 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그때그때 방편을 열어 부처님 같은 법을 쓰든지 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알려줘야 한다.

‘화두를 푼다’는 말은 없지만, 한국선의 앞날을 위해 화두를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화두의 내용을 말하면, 일반적으로 ‘화두를 풀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화두를 풀면, 잘못했다고 두들겨 맞게 된다. 지금까지 이렇게 내려왔는데 내 멋대로 화두를 풀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비판을 받는다. 화두를 풀든 말든 하나 풀면 다 풀린다고 했는데, 무엇을 말 못할 것이 있다고 그런 것을 비밀로 하나. 화두는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체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이나 못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몇몇을 위한 잔치하는 그런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전체가 다 알아야 한다.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 스님은 “없다” 그것으로 끝냈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이건 아닙니다”라 했다. 그러기 때문에 무자로 확정됨을 뒤에 조사들이 말했다. ‘무’ 거기에서 끝냈다. 그대로 알든지 의심하든지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어째서 뭘까’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또 병통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것을 모른다. 그렇게 해야 의심이 되는 줄 안다. 화두를 제대로 제시 받고, 그 속에 들어가서 온 몸으로 살아 남으려고 헤엄쳐봐야 한다. 어떤 것이 화두 길에 바로 들어갔는지, 화두 의심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해봐야 한다.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전유물로 삼지 않았다. 액면 그대로 펼쳐 보였다.

화두는 활구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죽은 말을 들고 하면 안 된다. 활구는 의심하지 않으며 필요로 의심되어지는 것이 화두다. 의심을 끝날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구는 억지로 하는 것이다. 오래하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어리석어진다. 활구는 흙탕물을 맑게 가라앉히는 화구참구가 아니다. 흙이 가라앉은 물이 뒤집으면, 다시 흙탕물이 된다. 사구는 흙이 물 아래로 가라앉을 때가 기다리는 활구참구법이다.

조사어록 가운데 간화선 수행법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말해 보겠다.
활구화구 참구법의 중요성은 <선요>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선에 들어가서 날짜를 기약해 성공하고자 한다면, 마치 천 길의 우물 바닥에 떨어진 것과 같이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오직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깊은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그것을 빠져나오는 길은 따로 없다. 빠진 그 길로 올라가야 한다. 보조 스님은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인연해서 일어난다” 했듯이 그 길로 올라가야 한다. 끝까지 온 몸으로 올라가려는 신심이 꽉 찼을 때에 가능하다. 신심은 자기에게 주어진 활구화두를 믿어야 한다. 그 때는 부처님의 조사의 누구의 말도 믿지도 듣지도 말고 화두 하나만의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믿음이라고 한다. 대신심을 이렇게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런 믿음이 근원적인 믿음이다. 눈앞에 당면한 그 문제를 믿어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진짜 믿어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또 <몽산법어>에서 “오조 법연 스님이 ‘석가와 미륵이 오히려 남의 종’이라 했을 때, 남은 누구일까?”라고 했다. 석가도 미륵도 종이다. 누구의 의해서 조정당하고 있는가? 나는 누가 움직이는가? 눈이 보는가 귀가 듣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실질로는 눈이 본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놈이 있어서 볼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적인 눈이다. 양쪽의 눈으로 다 보라는 의미다. 천수천안처럼 천개의 눈과 귀를 가져라. 다 열고 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또 온 몸을 화두의심을 지어야 한다. 하나의 화두로 끝까지 밀고 붙여라. 숨이 막히는 골이 부서져지든 그럴 때 뭔가 벗어난 것이다. 허망하게 벽만 쳐다보면 안 된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벽을 봐라. 그 벽을 깨트리고 봐야 제대로 의심을 지을 수 있다.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만든 것에 속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반드시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않고 참의심을 일으키면, ‘이뭣고’ 하는 순간에 화두를 꽉 잡게 된다. 다시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려든 것처럼 말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된다. 안 할 수 없게 된다. 그 때 눈 밝은 선지식이 채찍을 들고 조지게 된다. ‘이 놈 참 공부할 놈이구나’ 또는 ‘공부할 있는 인연에 걸려들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화두 의심은 한 번 듣고 의심하고 끝내는 것이다. 화두 의심에 전력해야 한다.

천마의 허망한 모습에 속아도 속는 줄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끄달려 왔던가.
목마가 불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목에 걸린 가시를 뽑았도다.
천지가 본래부터 자리하지 않았거늘
그림자가 어느 결에 생겨 나리요.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셋 달린 신장을 밀쳐 버리니
황금빛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는 구나.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