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입도요문론

2008. 7. 11. 17: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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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입도요문론

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心行處滅)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말로써 뜻을 나타내고 뜻을 얻으면 말은 끊어진다. 뜻은 곧 공했고, 공한 것이 곧 도이며, 도는 곧 말이 끊어진 것이므로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한다.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란, 뜻을 얻었으면 다시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생(生)함이 없고 생함이 없으므로 곧 모든 색(色)의 성품은 공하다. 색의 성품이 공하므로 곧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진다. 모든 관계가 끊어지면 곧 마음으로 생각함이 끊어진 곳이다.

문: ≪범망경≫에 "중생이 부처님의 계율을 받으면 곧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 부처님과 같이 되나니, 이는 진실한 불제자다."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답: 부처님의 계율이란 바로 청정한 마음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 청정행을 수행하여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는 마음이 되면 부처님의 계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부처님도 아무 받을 것이 없는 청정한 행을 닦아서 불도를 이루었고 오늘날의 수행인도 발심하여 받을 것이 없는 청정행을 수행하면 부처님의 공덕과 그 작용이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렇게 깨달으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아서 지위가 부처님과 같게 되므로 진실한 불제자라 할 수 있다.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가 청정하면 모든 부처님의 제자며 이를 불제
자라 부른다.

문: 부처님과 법은 어느것이 먼저 입니까? 법이 먼저라면 법은 어떤 부처님이 설하셨으며, 부처님이 먼저라면 어떤 가르침을 계승하여 도를 이루었습니까?
답: 부처님의 법의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다.

문: 어째서 부처님이 법의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습니까?
답: 만약 적멸법(寂滅法)을 의지하면 법이 앞이고 부처님이 뒤지만, 문자(文字)의 법을 의지하면 모든 부처님이 다 적멸법을 원인으로 해서 부처를 이루었으니 법이 앞이고 부처님이 뒤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스승은 무위법(無爲法)이다."하였으니 부처님도 깨달은 뒤에 비로소 경을 설하여 중생을 교화하였고 중생은 부처님의 교법을 계승해서 수행하고 성불한다. 이것이 곧 법이 앞이고 부처님이 뒤가 되는 이치다.

문: 불법에 유위를 없애지도 않고 무위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무엇이 유위를 없애지 않음이며, 무엇이 무위에 머물지 않음입니까?
답: 유위를 없애지 않음이란, 처음 발심에서부터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뒤에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기까지의 모든 법을 다 버리지 않음이 유위를 없애지 않음이다.

무위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비록 무념(無念)을 수행했지만 무념으로써 증득을 삼지 않고, 비록 공을 닦지만 공을 증득으로 삼지 않고 보리, 열반,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닦으나 이러한 것으로 증득을 삼지 않음이 곧 무위에 머물지 않음이다.

문: 부처님의 진신(眞身)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답: 유무를 보지 않으면 곧 부처님의 진신을 본다.

문: 어째서 그렇습니까?
답: 유는 무로 인해서 세워지고, 무는 유로 인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본래 유무를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무가 없으니 유가 무엇으로 인하여 있겠는가? 유와 무가 서로 인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니, 이미 서로 인연하여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러므로 유무의 두 가지 견해를 여의면 곧 부처님의 진신을 본다.

문: 어떤 것이 무위법입니까?
답: 유위가 무위법이다.

문: 어째서 유위가 무위법이 됩니까?
답: 유는 무로 인해 성립하고, 무는 유로 인해 나타난다. 본래 유를 주장하지 않으면 무엇에서 무가 생기겠는가? 만약 진실되게 무위를 논하려면 유위도 취하지 말고 무위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진실한 무위법이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법상(法上)을 취하면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에 집착하고, 만약 비법상(非法相)을 취한다 해도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상도 취하지 않고 비법상도 취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이 곧 진실한 법을 취하는 것이다."하였으니 이 뜻을 깨달으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알게 될 것이다.

문: 경에서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뒷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뒷세상의 몸이란 곧 육도(六道)에 몸을 받음을 말한다. 현세에서 중생의 마음이 미혹하여 기꺼이 모든 업(業)을 짓고, 그 업을 따라 생(生)을 받으므로 뒷세상이라 한다.

현세에서 어떤 사람이 구경(究竟)의 해탈을 닦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자는 곧 영원히 삼계(三界)를 여의고서 뒷세상에 몸을 받지 않는다. 뒷세상의 몸을 받지 않는 것이 곧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며, 법신은 바로 불신(佛身)이다.

문: 무념(無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답: 무념이란 일체에 무심한 것이다. 객관 세게도 없고 달리 구하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객관 세계의 사물에 대해서도 전혀 동요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무념이다. 무념은 곧 진념(眞念)이라고도 한다.

만약 생각으로써 생각하려 한다면 잘못된 사견(邪見)이요, 바른 생각(正見)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내가 무념의 법에 머물러서 32상(相)으로 큰 광명을 놓고 모든 세계를 비추는 큰 공덕을 얻었다." 하였으니 그릇이 작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념을 얻으면 모든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자연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게 된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이 이 무념에서 나타나신다." 하였다.

문: 무념이 곧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간다 하셨는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답: 무념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는 근본에서 일체의 법이 성립한다' 하였고 또 '비유하면 밝은 거울과 같다. 거울 자체에는 아무 형상이 없으나 밝기 때문에 만상(萬相)이 나타난다.' 하였다.

학인(學人)의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망념이 생기지 않고 나와 남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은 청정해지며, 청정하게 되면 한없는 지견(知見)을 낸다.
돈오(頓悟)란 금생에서 해탈을 얻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사자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사자인 것처럼 돈오를 수행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수행할 때부터 부처의 지위에 들어간다. 단번에 망념을 없애고 영원히 나와 남이라는 생각을 끊으면 결국은 공적(空寂)하여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범부이면서 성인이요, 성인이면서 범부다. 돈오를 수행하는 이는 이 몸을 여의지 않고 곧 삼계(三界)를 뛰어넘는다.
경에 이르기를 "세간을 파괴하지 않고 세간을 뛰어넘으며,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돈오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여우가 사자를 따라 다니는 것과 같아서 수없는 세월을 지내도 결국 사자는 될 수 없다.

문: 진여(眞如)의 성품은 공합니까, 공하지 않습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면 곧 모양이 있을 것이며, 만약 공하다면 곧 단멸(斷滅)된 것이니, 모든 중생이 어디에 의지해서 수행해야 합니까?
답: 진여의 성품은 공하기도 하고 또한 공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진여의 묘체(妙體)는 형상도 모양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하여 모양이 없는 묘체 가운데 무수한 작용을 갖추었으므로 어떠한 형상에도 응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고 한다.
경에 이르기를 "하나를 알면 곧 천 가지를 알게되고, 한 가지에 미혹되면 만 가지에 미혹된다."했으니 만약 사람이 한 가지를 지키면 만 가지를 망치게 된다. 이것이 도를 깨닫는 이치다.

문: ≪유마경≫에 "정토(淨土)를 얻으려면 마음을 깨끗이 하라" 했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끗이 합니까?
답: 끝까지 깨끗함이 깨끗함이다.

문: 끝까지 깨끗함이 깨끗함이란 어떤 것입니까?
답: 깨끗함도 없고 깨끗하지 않음도 없음이 곧 끝까지 깨끗함이다.

문: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하지 않음도 없는 것입니까?
답: 일체에 무심함이 곧 깨끗함이며 깨끗함을 얻을 때 깨끗하다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깨끗함도 없음이다. 깨끗함도 없음을 얻을 때에 깨끗함도 없다는 생각을 짓지 않아야 이것이 깨끗하지 않음도 없음이다.

문: 무엇이 중도(中道)입니까?
답: 중간도 없고 양쪽 끝도 없음이 곧 중도다.

문: 무엇이 양쪽 끝입니까?
답: 저 마음, 이 마음이 곧 양쪽 끝이다.

문: 무엇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 합니까?
답: 밖으로 형상과 소리 등에 얽매이는 것이 저 마음이며, 안으로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 이 마음이다. 만약 밖으로 형상과 소리 등에 물들지 않으면 곧 저 마음이 없어지고, 안으로 망념을 내지 않으면 곧 이 마음도 없어지니, 이것이 양쪽 끝이 없음이다.

마음에 이미 양쪽 끝이 없음이다. 마음에 이미 양쪽 끝이 없으면 중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중도라 한다. 경에 이르기를 "허공에는 중간도 없고 끝도 없다. 모든 부처님의 몸도 또한 그렇다." 하였다.
이제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서이지 명예나 이익을 구해서가 아니다.그대들은 헛된 명예를 구하지 말라. 입으로는 진여를 말하고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곧 말과 행동이 어긋나고 미치광이 노릇을 하게되면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한 세상의 헛된 명예와 쾌락을 구하지 말라.

깨닫지 못하면 오랫동안 재앙을 받을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라. 제 자신이 스스로 제도해야지 부처님은 제도해 주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면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셨으니 이미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을 터인데 어째서 우리들은 아직도 생사의 길에 떠돌며 성불하지 못했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제도해야지 부처님은 제도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수행하고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지 말라. 경에 이르기를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 하였다.


우담바라 <삼산법사님> 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