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법문 4

2008. 7. 17. 14: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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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대중법어/1981년 음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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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觀法)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경(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 배 절하고 화두 배워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 배 절 안하면 안 가르쳐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 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해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화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依支)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Aquinas)의 신학대전(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선(禪)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話頭)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뭣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를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 즉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그런데 망상이 죽 끓듯이 끓고 있는데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지, 이것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 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종문(宗門)의 스님네들은 암호밀령(暗號密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이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릅니다.  하늘 '천(天)' 할 때 '천(天)' 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내용이 아닙니다. 속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이라는 책을 약 30여 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어.'
그런데 고마자와대학은 조동종(曹洞宗) 계통인데 조동종의 종조(宗祖)되는 동산 양개(洞山良介)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不重先師佛法道德 只貴不爲我設破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버립니다. 봉사에게 아무리 단청(丹靑)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 보게 해 줄 따름입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 양개화상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파의 승려들은 떼를 지어서 수 십년을 연국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양개화상에 대해서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은 종명(宗名)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반역종(反逆宗)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자인 중촌원(中村元)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동양인(東洋人)의 사유방법(思惟方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서근[麻三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처님이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자연현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서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었는데 대해 삼서근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안을 해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 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우정백수(宇井伯壽)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선(禪)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 자기는 문자승(文字僧)이니까 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 법문, 선리(禪理)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중촌원(中村元)은 화두에 대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화두의 하나인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벽암록(碧巖錄)에 송(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道伴)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흰토끼가 몸을 비켜 옛길을 가니
눈 푸른 매가 언 듯 보고 토끼를 낚아가네
뒤�아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白兎橫身當古路 蒼鷹一見便生擒
後來獵犬無靈性 空向古椿下處尋

'뜰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전백수자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佛鑑懃)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彩雲影裏神仙現 手把紅羅扇遮面
急須著眼看仙人 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 보고서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 내용은 어떻게 해야 풀수 있느냐 하면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데에서 께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못푼다는 것, 이 근본자세가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동시에 '뜰앞의 잣나무'라는 뜻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