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법문 3

2008. 7. 17. 14: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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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대중법어/1981년 음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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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으므로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心)자 한 자위에 서 있어서 이 한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을 한눈에 다 볼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나흘도 안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보면,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菩薩地盡 遠離微細
得見心性 名究竟覺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십지(十地)와 등각(等覺)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아라야식(阿賴耶識)의 근본무명(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버리면 진여(眞如)가 나타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묘각(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成無上正覺 得見佛性
得見佛性 成無上正覺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菩薩地盡十地 尙未明了知見佛性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십지(十地)가 되어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유가사지론(喩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究竟地菩薩 如微闇中見物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 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결국 일체만법의 본 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선종(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종조(宗祖)인 운문(雲門)스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일고 비오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十地菩薩 設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

십지보살은 법운지(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듯 그렇게 법문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대승불교의 총론(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涅槃經)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고, 유식종(唯識宗)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고, 종문(宗門)의 조사인 운문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지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삼현(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견성했다고, 도통(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병통(病痛)입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보희(普熙)스님이 지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습기(習氣)를 없애는 점수(漸修)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살의 수행 차제(次第)의 십신초(十信初)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은 중국의 규봉(圭峯)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만, 규봉스님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의 이론을 아는 해오(解悟)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 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를 견성이라 하면서, 그 지위가 십신초(十信初)라고 절요(節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스님인 보조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잘못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경(經)이나 논(論)에서는 분명히 삼현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니, 결국 보조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스님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것, 십신초(十信初)에서의 돈오가 견성이라는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니,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수 있는가? 무엇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종문(宗門)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