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 엄 경
능엄경:제8권1/9 점진적으로 닦아 가는 세가지 법
'아난아, 이러한 중생 하나하나의 종류 가운데 각각
열두 가지 뒤바뀜을 갖춘 것이 마치 눈을 비비면
허공에 어지러이 헛꽃이 생기는 것과 같아서 오묘하고
원만하고 참되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뒤바뀌어서
이와 같이 허망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느니라.
네가 지금 부처님의 삼마지를 닦아 증득하려면 그
근본 원인이 되는 원래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점진적 순서를 세워 놓아야 비로서 제거하여 없앨 수
있으리니,이는 마치 깨끗한 그릇에 담겨 있는 독한
꿀을 제거하고 끓인 물에 재와 향을 섞어 그 그릇을
깨끗이 씻어낸 다음에야 감로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점진적인 순서라고 하는가?
첫째는 닦고 익힘이니 도 닦는 데 방해되는 근본을
제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참된 수행이니 그 정성(正性)*을 없애는
것이요,
셋째는 더욱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그 현재의
업을 어기고 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도와 주는 원인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세계에 열두 가지 종류의 중생이 스스로
완전할 수가없어서 네 가지 식사방법에 의하여
살아가나니 그것은 이른바 씹어 먹는 것과 접촉으로
먹는 것과 생각으로 먹는 것과 의식으로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먹는
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하신 것이다.
아난아, 일체중생은 단 것을 먹기 때문에 살고 독한
것을 먹기 때문에 죽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삼마지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다섯 가지 냄새나는
채소를 끊어야 하느니라.
저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발생시키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
지나니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비록 십이부(十二部) 경전을 설법한다고 하더라도
시방의 하늘이나 신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여 모두가
멀리 떠날 것이요, 모든 아귀들은 그가 밥 먹을 적에
그 입술을 핥으므로 항상 귀신과 함께 있게 되어
복덕이 날로 사라져서 영원히 이익이 없을 것이니라.
또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삼마지를 닦더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 그리고 시방의 선신들이 와서 수호하지
아니하므로 힘센 마구니의 왕이 그 틈을 타서 부처님의
몸으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설법을 하되 금하는 계율을
그르다고 비방하고 음행.성냄.어리석음을 찬양하리니,
죽어서는 마왕의 권속이 되었다가 마구니의 복을 다
받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아난아, 보리를 닦는 이는 이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영원히 끊어야 하나니 이것은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첫번째 차례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성(正性)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중생들이 삼마지에 들어가려면 먼저 깨끗한
계율을 엄하게 지켜서 음욕의 마음을 영원히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불로써 음식을 깨끗이 하여 날
것의 기운을 먹지 말아야 한다.
아난아, 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음란한 마음과 살생할
마음을 끊지 않고서는삼계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이치가
없나니, 마땅히 음욕을 독사보다 더 무섭게 여기거나
원수와 도적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니라.
먼저 성문의 네 가지 또는 여덟 가지 내침을 당하는
계율을 잘 지켜서 몸을 가다듬어 흔들리지 말고 그런
다음에 보살의 깨끗한 율의(律儀)를 행하여마음을
가다듬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금하는 계율을 성취하면 이 세상에서 서로 낳고 서로
죽이는 일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요, 훔치는 것과 겁탈을
행하지 아니하여 서로 빚을 지는 일이 없으면 역시
세상에서 갚아야 할 묵은 빚도 없어지리라.
이렇게 깨끗한 사람이 삼마지를 닦으면 부모가 낳아 준
육신에 반드시 천안(天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히
시방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들으며, 직접 성인의 뜻을 받들어서 큰 신통을 얻어
시방세계에 노닐면서 숙명(宿命)이 밝아지고 어렵고
험함이 없어지리니 이것이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두번째 차례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현재의 업장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렇게 깨끗하게 금하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마음에 탐욕과 음욕이 없어지면 밖의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에 대다수가 흘러 빠지지 않게 되리니, 흘러 빠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근원을 돌려 스스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을 반연하지 않으면 여섯 개의
감각 기관은 상대할 것이 없어져서 흘러감을 되돌려
전일하게 하며 여섯 가지 작용이 행해지지 아니하며
시방의 국토가 밝고 깨끗함이 마치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달아놓은 듯하여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오묘하고
원만하고 평등하여 크게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요,
모든 부처님의 긴밀하고 원만하며 깨끗하고 오묘함이 다
그 속에 나타나서 이 사람은 즉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느니라.
이로부터 점점 닦아서 가는 곳마다 행동을 일으켜서
성인의 위치에 편안히 서게 될 것이니 이것이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세번째 차례이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욕애가 말라버려서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앞에 나타나는 남은
바탕이 다시는 계속하여 생기지 않을 것이요, 집착하는
마음이 비고 밝아져서 순수한 지혜만 남게 될 것이며,
지혜로운 성품이 밝고 원만해져서 시방세계가 환하게
통하며 그 지혜가 마른 것을 '간혜지(乾慧地)'라고
하느니라.
욕애의 습기가 처음으로 말라서 부처님의 법류수
(法流水)와 접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마음으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면 오묘하고 원만함이 열려 퍼지게 될
것이다.
참되고 오묘하고 원만함을 따라서 거듭 참되고 오묘함이
발생하며 오묘한 믿음이 항상 머물러서 부질없는 모든
생각이 남김없이 없어지고 중도가 순진(純眞)하게
되는 것을 '신심주(信心住)'라고 하느니라.
참된 믿음이 밝고 또렷해서 일체가 원만하게 통하고
오음과 십이처와 십팔계 이 세 가지가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못하며 이와 같이 과거부터 미래에 이르기
까지 무수한 겁을 지내는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던
모든 습기가 모두 앞에 나타나게 되면, 이 선남자가
그것을 다 기억해 생각해서 잊어버림이 없는 것을
'염심주(念心住)'라고 하느니라.
오묘하고 원만함이 순수하고 진실하여 참다운 정기가
조화를 발하여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의 습기가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으로 통해지거든 오직 정밀하고
밝음으로써 참되고 깨끗한데에 나아가는 것을 '정진심
(精進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정기가 앞에 나타나서 순수한 지혜로 되는
것을 '혜심주(慧心住)'라고 하느니라.
지혜의 밝음을 잡아가져서 두루두루 맑고 고요하여
그 고요하고 오묘한 것이 항상 섞여 있는 것을 '정심주
(定心住)'라고 하느니라.
선정 속에 빛이 밝음을 발하여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 오직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아니함을
'불퇴심(不退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으로 나아감이 편안해서 보호하여 지키고 잃지
않아 시방 부처님의 기분과 서로 접촉함을 '호법심
(護法心)'이라고 하느니라.
밝은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서 능히 오묘한 힘으로써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돌이켜 부처를 향해 편안히
머무름이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빛을 서로 마주하는
것과 같아서 그 가운데 오묘한 그림자가 거듭거듭 서로
들어가는 것을 '회향심(廻向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빛이 가만히 돌아와서 부처님의 가장 오묘하고
깨끗함을 얻어서 작용이 없는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서
잃음이 없는 것을 '계심주(戒心住)'라고 하느니라.
계에 머루름이 자재하여 시방에 노닐면서 가는 곳마다
원하는 대로 됨을 '원심주(願心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진실한 방편으로 열 가지 마음을
발하고 마음의 정기가 빛을 발해서 열 가지 작용을
거치며 하나의 마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발심주
(發心住)'라고 하느니라.
심지(心地)에 들어감과 아는 것이 모두 또렷해지고
밝음을 얻어 시방에 노닐되 머물거나 걸림이 없게 된
것을 '수행주(修行住)'라고 하느니라.
행하는 것이 부처님과 같아서 부처님의 기분을 받음이
마치 중음신이 스스로 부모를 구할 적에 음계의 소식이
가만히 통하는 듯해서 부처님의 종성(種性)으로
들어감을 '생귀주(生貴住)'라고 하느니라.
이미 도태(道胎)에 들어서 친히 부처님의 아들을
봉양함이 마치 세상의 부녀자가 이미 아이를 배서
사람의 모양으로서 결함이 없는 듯한 것을 '방편구족주
(方便具足住)'라고 하느니라.
용모가 부처님과 같으며 마음의 형상도 그와 같은 것을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느니라.
십신(十身)의 신령한 모양이 일시에 구족한 것을
'동진주(童眞住)'라고 하느니라.
형체가 이루어지고 태에서 벗어나서 친히 불자가
된 것을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느니라.
성인임을 표시함이 마치 국왕이 모든 나라의 일을
태자에게 나누어 맡기며 저 찰리왕이 세자가 장성하면
이마에 물을 붓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부처님의 아들이 되고 나서
부처님의 한량없이 오묘한 덕을 완전하게 갖추어서
시방에 순하게 따르는 것을 '환희행(歡喜行)'이라고
하느니라.
능히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요익행(饒益行)'이라고 하느니라.
자신도 깨닫고 남도 개닫게 하여 거스르고 막는 것이
없음을 증득한 것을 '성냄과 원한이 없는 행[無瞋恨行]'
이라고 하느니라.
갖가지 중생들이 생겨남에 따라서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삼세에 평등하며시방에 통달함을 '다함이
없는 행[無盡行]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것이 화합하여 동일해져서 갖가지 법문에 차오
(差誤)가 없게 되는 것을 '어리석고 어지러움을 벗어난
행위[離癡亂行]'라고 하느니라.
곧 같아진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나타내며
하나하나 다른 형상에서 각각 보는 것이 같은 것을 '잘
나타내는 행위[善現行]'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시방의 허공에 이르기까지 작은 먼지까지도
만족하며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고 경계를 나타내어도서로 머물거나
걸림이 없는 것을 '집착이 없는 행위[無着行]'라고
하느니라.
가지가지 앞에 나타나는 것이 모두 제일의 바라밀다인
것을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하느니라.
하나하나 모든 것이 깨끗하고 번뇌가 없어진지라 한결
같이 참되고 작위가 없어서 성품 본래 그대로인 것을
'진실행(眞實行)'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신통력을 만족하게 갖추어서
부처님의 일을 이루고 나서는 순결하게 정진해서 남아
있던 모든 시름이 멀어지거든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상(相)을 없애고 작위가 없는 마음으로
돌아가서 열반의 길로 향하는 것을 '일체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상을 여윈 회향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무너뜨려야 할 것은 무너뜨리고 여의어야 할 것은
여의는 것을 '무너뜨릴 것이 없는 회향[不壞廻向]'
이라고 하느니라.
본래 깨달음이 맑고 고요해서 그 깨달음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음을 '모든 부처님과 같은 회향
[等一切佛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정밀하고 참된 것이 밝음을 발하여 지위가 부처님의
지위와 같아짐을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
[至一切處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세계와 부처님이 서로 들어가되 걸림이 없는 것을
'다함이 없는 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의 지위와 같은 데서 그 지위 가운데 각각
깨끗한 원인이 생기고 그 원인에 의해 빛을 발휘하여
열반의 도를 취하는 것을 '평등한 선근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참된 선근이 이미 이루어지면 시방의 중생들이 모두
나의 본성인지라 그 성품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중생을 잃지 아니함을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것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에 나아가며 모든 모양을 여의나니 나아가고
여의는 두 가지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진여상회향
(眞如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참되고 여여한 것을 증득해서 시방에 걸림이 없는 것을
'얽매임이 없이 해탈한 회향[無縛解脫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이렇게 깨끗한 마흔한 가지 마음을
다 하고 난 다음에 네 가지 오묘하고 원만한 가행
(加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 나갈 듯하면
서도 나가지 못함이 마치 불을 피울 적에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을 '난지(煖地)'라고 하느니라.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밟아오신 것을 이루어서
의지한 듯하면서도 의지하지 않음이 마치 높은 산을
오를 적에 몸은 허공에 들어갔으나 아래는 약간 걸림이
있는 것과 같음을 '정지(頂地)'라고 하느니라.
마음과 부처 그 두가지가 같아서 중도를 증득한 것이
마치 모든 일에 잘 참는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는 것과 같음을 '인지(忍地)'라고
하느니라.
헤아림이 없어져서 미각(迷覺)과 중도 그 둘 다 지목할
수 없음을 '세제일지(世第一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가장 높은 보리에 대해 잘 통달하여
그 깨달음이 부처님과 통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다한
것을 '환희지(歡喜地)'라고 하느니라.
다른 성품이 같은 데로 들어가고 같은 성품도 없어진
것을 '이구지(離垢地)'라고 하느니라.
맑음이 지극하여 밝음이 생김을 '발광지(發光地)'라고
하느니라.
밝음이 극진하여 깨달음이 원만함을 '염혜지(焰慧地)'
라고 하느니라.
일체의 같고 다름이 지극하지 못한 것을 '난승지(難勝地)'
라고 하느니라.
작위가 없는 진여가 되어서 성품이 맑아지고 밝게
드러나는 것을 '현전지(現前地)'라고 하느니라.
진여의 끝까지를 다한 것을 '원행지(遠行地)'라고
하느니라.
한결같은 진여의 마음뿐인 것을 '부동지(不動地)'라고
하느니라.
진여의 작용을 발하는 것을 '선혜지(善慧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모든 보살들이 이로부터 이전에 닦고 익히는
공부를 마치고서 그 공덕이 원만하여졌으므로 그 경지를
지목하여 '닦아 익히는 지위[修習位]'라고 하느니라.
자비의 그늘과 오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은 것을 '
법운지(法雲地)'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은 흐름을 거스르지만 이러한 보살은 순하게 따라
이르러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 어울리는 것을 '등각
(等覺)'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간혜의 마음에서부터 등각에 이르러야만
그 깨달음이 비로소 금강심 가운데에 첫 간혜지를 얻게
되느니라.
이렇게 거듭거듭 열두 가지를 홑으로 겹으로 해야만
바야흐로 묘각을 다하여 최상의 도를 이루느니라.
이 여러 가지 지위에 모두 금강으로 허깨비와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여 사마타(奢摩他)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비바사나로써 깨끗하게 닦아 증득해서 점차 깊이
들어가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것은 모두가 세 가지 증진법으로 수행하였으므로
쉰다섯 개 지위의 참된 보리의 길을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라 하고
이와 다르게 관찰하는 것은 삿된 관찰이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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