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여성관의 새로운 모색

2008. 7. 19. 23:17일반/가족·여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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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논제가 암시하듯, 우선 불교와 여성관에 대한 입장과 방향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라는 과제는 과거에 대한 고찰이라는 역사적 문제가 앞서 있을 때 가능하다. 또 교리의 측면에서 그 종지를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도 걸려있다. 이 글의 주제는 이 두 문제에 해결의 열쇠가 달려 있다.
  한편, 이 주제 속에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도 담고 있다. 여성에게 펼쳐진 삶 가운데 일어나는 대립과 고통의 문제를 걸머지고 사회 구조적 문제로 접근한 여성학 또는 여성운동이 관심 분야로 떠오른 것은 70년대 이후이다. 진보적 여성 운동의 관점으로 본, 강정숙 : 「한국 근대 여성 운동사」와 이승희 : 「한국 현대 여성 운동사」(한국여성연구회, 「여성학 강의」, 동녘, 1991.) 참조.
이러한 오늘날 한국 여성현실을 둘러보면, 여성운동의 힘이 부친상태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여성이 여성문제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물론, 이 글은 여성 문제의 본질을 한국 사회 구조 속에서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소한 여성 운동과 같은 맥으로 방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입장은 필자의 의도로서가 아니라 불교 교리의 측면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바이다.
불교의 논리 가운데는 진제와 속제의 이제가 깔려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眞], 저것은 진리가 아니다[俗] 라는 논리를 거듭 이끌어 가면서 종지를 밝힌다. 입문자 입장에서 이 진속을 가리는 일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므로 종지를 헤아리기 쉽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논리는 속제라 일컫는 헤상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해달, 해방을 위한 방편이다. 그것은 세상의 문제로부터 도피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여성의 문제도 석가모니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 초기 경전을 보면, 고통받는 여러 여성들이 부처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문제를 해결했다. 이 경우 대부분 부처님은 그들을 대화로 이끌어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고 깨우쳐가게 가르친다. 부처님의 이 교화 방법을 ‘대기설법’이라고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근기, 즉 이해 수준이나 개성을 잘 파악함으로써 가능하다. 상대방에 대응하는 능력, 즉 방편인 자유자재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거기에 담긴 사상이 ‘자비와 지혜’이다.
  왜 자비와 지혜가 필요한가? 부처님이 출발로 삼은 것이 인생의 문제이고, 그 현실은 문제투성이이고 괴로움의 연속이다. 이 문제의 해결 주체가 인간 자신이고, 해결 방법은 문제를 바르게 보고 대상의 이치를 깨닫는 데서 나온다. 보통의 종교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 자신을 의지처로 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사상을 깨닫도록 스승은 제자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가르친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아 키우듯 자비 정신으로 인간을 주체자로 일으켜 세우고, 지혜의 눈으로 인생을 주관하는 이치를 밝힌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은 그 이치의 깨달음이고, 이것이 곧 부처를 이룸[成佛]이다. 인생이란 현전하는 문제이다. 이 법을 깨달은 자 깨달은 자를 이름하여 붇다라고 하는데, 많은 다른 이름이 있다. 그 가운데 ‘세간해’나 ‘조어장부’는 세상살이를 꿰뚫어 알고, 지혜와 자비를 두루 갖추어서 중생을 잘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명호이다.
는 현전하는 삶 가운데 있는 주인공이다. 따라서 무엇이 진리의 깨달음인가를 밝히기 위해, 속제 가운데 진제를 말할 수밖에 없다. 인생이 있는 한 자비와 지혜는 늘 ‘지금 여기에’ 놓이는 실천상의 가치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는 ‘무엇이 부처인가’하는 관념적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끊임없이 자신으로 돌아오게 한다. 자신으로 돌아오는, 현전하는 문제의 관점으로 머리말을 풀어가는 것은 불교 여성관의 새로운 모색이 우리 현실을 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융성할 때의 힘은 대중부 성장이 이끌어낸 대승불교나 신라 원효의 사상처럼 당대의 민중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로 들어가고, 현대인의 감각과 근기에 따라 불교가 말하는 해탈, 피안, 도, 여래, 불국토 등등의 교리를 풀어갈 때, 불교 중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찾는 불교의 여성관은 불교의 여성운동을 축으로 하고, 그 힘의 사회 역사적 파장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경전에 나타난 여성관을 시기별로 살펴 그 의미를 밝히고, 특히 대승불교에서 보는 여성관의 의미를 조명함으로써 현대 불교 여성관의 토대를 세워보기로 한다.


2. 경전에 나타난 여성관

  대장경은 불교 경전 총칭이다. 워낙 방대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으니, 거기에 나타난 여성관을 찾아 분류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또한 여성관이 경전에 따라 모순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사회 역사적 배경을 고증하고 연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먼저 기존 불교사의 개괄에 따라 교단의 변천을 간단히 살펴보고 여성관의 흐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부처님 제자들의 화합된 단체를 승가(僧伽, Samgha)라고 하는데,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이뤄져 있다. 최초교단은 교진여 등 5비구가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성립한다. 이어서 야사가 3귀의[佛法燴 삼보귀의]하고, 그의 부모와 아내가 재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로서 최초로 3귀의한다. 이후 빠른 속도로 교세가 확장되었지만, 여성의 출가는 부처님 성도 후 약 20년만에 허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 비구니는 마하파자파티구담미로 석가족 여인 5백명과 한꺼번에 귀의하여 비구니 교단을 이룬다. 불교의 전파와 교단의 발전은, 당시 인도의 계급사회에 던진 혁명이라 할 만한 평등과 자유 사상의 정화인 ‘성불’의 행복과 생명존중의 비폭력 화합 정신의 힘으로 볼 수 있다.
인도 불교은 발전은 원시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밀교로 이루어진다. 원시불교는 아쇼카 왕 시대(B.C. 268~ B.C.232)에는 인도 전역으로 전파한다. 불멸 후 100년 경, 계율에 대한 해석과 정통성 시비가 일게 되어 제 2결집(結集)을 한다. 그 해석의 견해가 보수와 진보로 갈려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이부(根本二部)로 분열한다. 그 후 400~500년 동안 교단은 다시 20부로 분열해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를 맞는다. 진보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의 성장이 기원전 1세기 경에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발전하는데, 앞 시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출가자 중심으 l부파 교단에 대해 비판한 새로운 불교운동이엇다. 이 운동을 일으킨 주역들은 스스로 ‘보살(菩薩)’이라 부르고, 츨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고, 함께 부처님 세계로 가는 방편을 큰 수레(大乘)라 하였다. 7~8세기 경에는 바라문교의 영향으로 밀교(密敎)가 성립한다.

(1) 아함경 : 평등과 불평등의 모순 속의 여성상
현존하는 남방 소승불교 아쇼카 왕은 불교를 해외로도 전파시키는데, 미얀마, 샴, 쟈바, 인도차이나 등지로 전파함으로써 남방불교가 형성되고, 인도 북방의 카슈미르, 간다라 지방을 거쳐 중앙아시아, 서역제국, 서장, 중국 등지에서 북방불교가 형성된다.
의 아함경 소승불교 경전의 총칭. 아함은 전傳, 교敎, 법귀法歸로 번역함.
은 팔리 5부로 이뤄져 있고, 중국에 전해진 북방계통 아함경은 장아함, 중아함, 중일아함, 잡아함 등 4아함경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제 1, 2결집 때는 대합송(大合誦)으로 편찬되었고, 제 3결집 이후에 문자로 옮겨져 몇 차례 더 변화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내용의 첨삭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찾는 여성상도 그와 같은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이를테면 부처님 정법이 천 년이나 지속될 것인데, 여성의 출가로 교단이 약해졌다는 ‘정법 500년 감소설’, 여자는 다섯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성불할 수 없다는 ‘여인 오장설’과  ‘여인 불성불설’ 등은 다른 많은 여인이 성불 수기를 받는 모습이나 부처님의 평등사상과는 서로 어긋난다. 전해주, 변성성불론의 비판적 검토(한국여성불교연합회 편, 「불교의 여성론」, 불교시대사, 1993. 64~87쪽)에서, 다른 교단의 영향이나 여자 몸의 고통 때문에 여인 불성불론이나 남자로 변하는 단계를 거쳐 성불한다는 주장이 한때 나왔지만, 대승불교 사상에서는 남녀 평등 성불이 확고했다는 부처님 정법의 승리를 밝히고있다.

팔리율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이 여성 출가를 허락하는 과정에서도 여성관이 모순이 드러난다. 부처님이 아버지 정반왕이 죽은 수 베살리에 머무실 때, 석가족 청년 500명이 출가했다 .왕비 구담미도 청년의 아내들을 데리고 비구니가 될 것을 요청했지만 부처님은 이를 거절하고 떠났다. 그 후 구담미는 500여인과 함께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서 먼 길을 걸어 부처님을 찾아가지만 역시 출가를 허락받지 못한다. 아난이 안타깝게 여겨 부처님께 찾아가 “만약 여성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고 계율을 준수하여 출가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고, 부처님은 “아난이여, 여성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답한다. 이렇게 되엇으니, 부처님은 8경법(八敬法) 그 내용은 「四分律」 48권 비구니 권도장과 강정희, 불교 여성관의 새로운 인식(앞의 책 「불교의 여성론」, 16~17쪽)참조.
을 조건으로 받들게 하고 여인의 출가를 허락한다. 그러나 이 8경법의 내용에는 비구 우위의 남녀차별상이 뚜렷했다. 이 대목의 결집에서 ‘정법 500년 감소설’이 나오며, 아난과 보수적인 가섭과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해주, 「불교 교리 강좌」, 불광출판부, 1993, 220쪽에 보면 비구니 출가에 대한 시시비비는 부파 말기의 보수적 장로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음.

남녀차별없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사성계급에 대한 평등관과 같은 사상이다. 「숫타니파아타」에서 바라문 순다리카 비아라드바아자가 부처님께 출신을 묻는다. 이에 대해 “태어난 가문을 묻지 말고 그 행위를 물어라. 불은 온갖 섶에서 일어난다. 천한 집에서 태어난 자도 성자와 같이 도에 대한 뜻이 굳고, 참회하는 마음이 근신하면 고귀한 인간이 된다.”(3장 : 462)고 답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본성과, 행위에 따른 업과 습성은 구별하여 바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포함되어 잇다. 이 문제를 논쟁거리로 삼으면 한이 없을 것이다. 논의를 뒤로하고 「불설 노여인경」을 요약 인용해 보자.

부처님이 악음에 계실 때 가난한 할머니가 와서 생노병사에 대해 물었다.
“잘 물은 말이다. 나도 온데가 없고 가는 데가 없느니라.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느니라. 비유해 발하면, 두 나무를 서로 비비면 불이 나서 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냐?”
“인연이 합하면 불이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불이 꺼진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법이 모두 그러하여 인연이 합하면 이뤄지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거니, 법은 올 때도 도는 데가 없고, 갈 때도 가는 데가 없느니라. 눈으로 빛을 보는 것은 곧 뜻이요 뜻은 곧 빛이어서, 두 가지가 모두 공하여 이뤄지는 것이 없으며, 없어지는 것 또한 그러하느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이 먼저 벽을 깨끗이 다듬고 그림을 그리거니와, 그 그림은 벽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따라 그려지듯이, 나고 죽는 것도 제각기 지은 업을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니라.“
할머니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은혜를 받아 이제 법에 대한 눈을 얻었으니, 몸은 비록 늙었으나 마음이 열리어 깨달았습니다.”
아난이 곁에서 듣고, 어찌해서 할머니가 첫 설법에 곧장 깨닫는 높은 지혜를 가졌는지 부처님께 여쭌다. 그러자 지난 세상에 그 할머니가 부처님의 어머니였고, 자식을 사랑하는 정에 얽매여 아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던 인연으로 500생 동안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가난하고 곤궁하였다. 할머니는 비로소 불법에 눈을 떠 성불 수기를 받는다.  운허용하 편역, 「여인성불」, 불광출판부, 1991. 127~130쪽.


이 이야기 속에 문제되는 ‘모정’과 앞에서 말한 습성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모정은 여성의 본성인가? 아함경 여러 곳에 나오는 여인의 약점들 또한 그러한가? 위 이야기 속에 나오듯이 세상의 온갖 일은 인연의 화합이며 행위와 업에 따라 생멸할 뿐이다. 나는 것의 근원이 따로 있고, 죽어서 갈 곳, 즉 죽음의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본성이 어디에 따로 잇을 수 있는가? 출신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라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인간의 한계는 본성에 잇는 것이 아니라 행위, 업에 있다.
인도 당시의 여성 억압의 업은 그 사회와 가족 제도에 있었다. 여성의 한계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제도 속의 기능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부처님은 여성의 업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여성의 역할을 잘 함으로써 선업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옥야경」, 「선생경」 등에서 설법했다. 다른 한편, 「장로니게경」에 보면 출가한 여성은 업으로부터 해탈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경전에 나타나는 불평등관은 습성을 본성으로 오해하고, 그 본성이 원래 없는 것임을 삶 가운데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가섭이 몰랐던 것인가? 아니다. 습성의 타파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님을 오히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문 제자들이 구현한 붇다의 법은 긴 세월 속에 여러 갈래로 견해가 벌어져, 부파불교 시대가 펼쳐진다. 각 부파는 각기 달리하는 ‘법에 대한 연구’ 이로 인해 아비달마 교학이 발달하여, 經과 律의 종래 아함경에 論을 더하여 三臧이 성립함.
에 몰두하여, 점점 대중과는 멀어진다. 이 점이 아함경 세계의 모순을 낳았는지 모른다.
이 문제는 위에 다시 논하자.

(2) 대승경전 : 평등사상의 대승적 구현
대중부의 발전이 대승불교 운동의 밑거름이라고 했다. 현실의 고통을 문제로 보고, 그것의 원인을 살피고, 그것이 없어지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실천하는 길로 간다는 진리를 열어 보인 사성제(四聖祭)에서 보면, 괴로운 중생의 구원이 부처의 본원이다. 이 중생제도 사상에는 집단의 문제가 내포해 있음을 ‘중생(衆生)’이란 말뜻이 시사한다. 삼보를 구현하는 승가가 사부대중의 화합중(和合衆)으로 하는 정신 또한 같은 뜻을 품고 잇다. 따라서 대중의 의미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파 교단은 논(論)에는 열중했지만, 재가 대중에 대한 관심과는 떨어져 있었다. 자연히 교단에서 소외된 계층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사상이 삭텄고, 현실의 문제 속에서 다시 불법을 구하는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것이 사상이 싹텄고, 현실의 문제 속에서 다시 불법을 구하는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용수(龍樹, 150~250)는 대승불교의 교학 체계를 정비하고,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저술하여 반야 공(空)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확립하여 중관학파를 형성한다.
중론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목적으로 하는데, 특히 설일체유부(設一體有部, 유부)의 법의 실유설(實有設)을 깬다. 여기에는, 법의 본성이 있다는 자성론(自性論)이 진에와 속제를 이분하고, 부처와 중생의 거리를를 만들 여지가 있음을 깬 의의가 있다. 평등사상의 이론적 완성이라 할 만한다. 이 점은 교단의 소외 계층 가운데 특히 여인의 불성불설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초기에는 여인 성불이 ‘변성 성불설(變性成佛設)’로 나타난다. 여자도 성불할 수 있기는 하지만 남자 몸으로 일단 바꾼 다음에 성불한다는 것은 ‘여인 성불설’을 뒷받침하는 대승사상과 ‘여인 불성불설’을 드러냈던 정통 부파교단과의 마찰 속에서 양교단의 타협에 의한 과도기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해주, 앞의 책, 229쪽.
이러한 모습은 「전여신경(轉女身經)」과 「법화경」 제바달다품의 8세 용녀의 변성성불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화경」에 보수적인 제바달다파에서 전승하던 변성 남자 성불성을 수용한 사실은, 이 경의 특징인 회삼귀일(會三歸一)하는 포용성이며, 그 이면의 사상은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다. 전해주, 변성 성불론의 비판적 검토, 앞의 책, 72쪽.
이 점은 이 경속에서 여인이 성차별 없이 성불 수기를 받는 것이 증명한다.
그리고 수기품에 나오는, “그 나라의 보살은 한량없는 천억이며, 모든 성문 대중도 또한 수가 없고, 마(摩)의 일이 없느니라. 비록 마와 마의 백성이 있다 할지라도 다 불법을 지키느니라.”(제6품 : 481)고 하는 <마>의 항복은, 부처님을 배신했던 제바달다에 대한 포용과 아울러 세속의 선과 악을 함께 포용, 극복하는 대승사상의 면모이다. 즉, 부파불교에 대한 대승불교 사상 확립의 차원에서, 성문(聲聞)을 품고 뛰어넘는 대승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성차별을 비롯한 속제에 대한 성문의 고민을 함께 이긴다.
「득무구녀경(得無坵女經)」에, 성문과 보살에게 던진 ‘득무구 아가씨의 변론’ 운허용하 편역, 앞의 책, 87~121쪽.
은 성문이 답하지 못하는 문제를 뛰어넘고 동시에 참된 보살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가씨가 성불 서원을 세우고 남자로 변하여 얌전한 동자가 되는 모습은, 남녀 차별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방편으로 나온다.

목건련은 득무구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살행을 닦으면서 어찌하여 여자의 몸을 변화시키지 아니하였습니까?”
“보리도를 깨닫는 데는 여자의 몸도 아니고 남자의 몸도 아니니, 왜냐하면 보리는 나는 것이 아니므로 몸이나 마음으로 깨닫는 것도 아닌 까닭입니다.”


성문 목건련의 질문은 보수부파의 츨가승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담긴 한계에 대한 극복이 대승불교운동이었다. 남자, 여자의 차별상을 비롯한 출가와 재가의 수행상에 있어 차별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상이다. 득무구 아가씨가 <보살>로 등장함은 그와 같은 당대의 차별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주체가 떠오른 것을 의미한다. 즉, 득무구 보살은 평등사상의 구현의 주체가 비로소 바르게 섰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중요한 일은 보살도의 실천이다. 「승만경」은 재가 수행자들의 실천의 지표를 잘 보여준다. 이 경은 사위국 왕파세나디와 말리카 부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며, 그 소중함을 아유사국 왕비가 된 딸 승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승만 부인은 부모의 간절한 권유를 기쁘게 받아 부처님께 귀의하고 성불수기를 받는다. 부인은 열 가지 서원을 통해,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 바른 진리를 거둬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올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나쁜 법에 빠진 사람들을 항복받는 일이야말로 대승의 드넓은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보살의 정신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재가 여성으로서 서원과 깨달음을 통해 출가의 참모습과 진리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임은, 파사현정의 실천주체가 아녀자란 편견 속에 갇혀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인도 비야리성 유마 거사의 딸 월상(月上)을 주인공으로 하는 「월상녀경」도 모든 중생의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그 때에 사리불 존자가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아가씨가 대단히 훌륭한 변재를 가졌습니다. 저렇게 여러 큰 보살들과 줄곧 선 채로 앉지도 아니하며, 몸을 굽혀 보살들게 경례하지도 아니합니까?”
이 때에 월상 아가씨가 말을 받았다.
“사리불 존자님, 비유해 말한다면, 저 작은 불도 그 자체가 타는 까닭으로 모든 물건을 남김없이 태우는 것입니다. ... 여러 가지 행으로 온갖 번뇌를 태울 때 어느 것이든 태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중략...
“사리불 존자님, 제가 성불하는 그 세계에는 작은 행이나 작은 지혜나 변변치 못한 이름의 사리불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니, 저는 그러한 불국토를 가질 터입니다.” 상동, 66~67쪽.


보리심을 내어 보살행을 닦는 주체는 아가씨다, 큰 보살이다 하는 차별상이 없다. 그러나 월상 아가씨는 소 발자국에 고인 물과 바닷물의 비유로 성문의 한계를 꿰뚫어 말한다. 물인 바에는 다름이 없지만 소 발자국에 바닷물을 담을 수 없듯이, 부처님이나 성문이나 법계는 같지만 성문들은 부처님같이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익케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평등사상의 대승적 구현이다.
대승사상의 전형이라 할 「유마경」이나 「화엄경」등에서도 여성이 삶을 깨달아 완성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차별상을 말할 수가 없어진다. 여성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

(3) 여성상의 의미
현실의 문제는 중생의 문제이다. 이것이 부처님 사상의 출발이라면, 그 속의 모순과 불행과 고통을 떠난 피안의 세계는 그 완성이다. 현실과 피안, 고통과 해탈 사이에서 가섭의 고민은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부처인가 하는 질문은 관념으로 구할 수 없는 물음이기에 부처님은 염화시중의 미소로 가섭에게 법을 전했다. 그런데 아함경에 나타나는 모순과 고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천과 정진만이 완성에 대한 질문을 관념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가섭을 보수적 수행자의 모습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공한 것이라는 세계관 속에는 만상의 움직임은 인(因)과 연(緣)에 따른 관계이고, 그 인연 지음이 업임을 말한다. 여성의 업, 그것은 운명도 아니고 단지 역사의 소산일 따름이다. 사실 그 장벽은 너무나 두터워 끊어 버리기 어렵다는 현실에 가섭의 인간적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아함경의 체계가 산만하고, 법의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요인은 그와 같은 실천상의 거리 때문이며, 오히려 피안에 이르는 먼 노정에서 정진과 인욕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또한 그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먼 길을 가기에 지친 중생에 대한 자비를 한 순간도 잃지 않았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대승경전이 무엇보다 부처님의 법에 대해 틈새 없이 체계화한 것은 의의가 깊다. 평등 사상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하고, 정법의 근본 정신을 파사현정하여 드러냄으로써 세속의 불평등 사상을 차단하였다. 또한 사상 체계상의 실천 주체를 바르게 세움으로써 현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높였다. 피안을 바라보는 멀고 먼 눈을 다시 현실로 돌렸던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성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떴다. 이 뜬눈으로 오늘의 여성 현실을 한번 바라보자.


3. 새로운 여성사의 모색: 평등과 해방 사상의 현재적 의미

앞에서 보았듯이 대승사상으로 보면 중생과 부처가 둘일 수 없다. 중생의 현실에 설 때, 부처의 법이 현재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처님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구하는 것은 불자의 바른 정진의 태도이다. 이런 입장에서 논의를 펼쳐보자.
해주 스님이 「불교의 여성 해방사상」 한국불교사회교육원 엮음, 「책으로 보는 민족불교학당」, 도서출판 정토, 1988, 73~92쪽
에서 사성의 평등은 여성 해방의 기본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성계급 평등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 일이 진정으로 뜻하는, 즉 오늘날 현실의 업을 살펴보는 역사적 관점을 찾는 작업은 모자랐다. 그러면 세간해, 세속을 꿰뚫어 보는 부처님의 눈을 통해, 우리가 찾는 여성평등, 여성해방의 구현은 무엇일까?
출신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라는 사성의 평등관에서 말하는 <행위>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바라보면, 흔히 우리가 아는 자업자득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또한 소승의 자기 수행의 한계도 못 벗어난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 대해 비판한다면, 불교 역사로 보아 대수행의 한계도 못 벗어난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 대해 비판한다면, 불교 역사로 보아 대승불교의 통불교적 맥을 잇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에 대한 대승 관점을 잃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원효 사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중불교의 역사적 관점은 그렇지 않다. 이 시시비비는 한국 불교사 위의 역사적 억압고리를 밝혀야 할 문제가 포함되므로 논외로 한다. 아무튼 행위에 따른 업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성의 모성본능도 이와 같은 도리로 공한 것임을 앞에서 밝혔다. 그러나 사회제도와 가족제도에 다른 습성을 마치 본성인 것처럼 혼동하고, 거기다가 본성에 집착하는 문제까지 겹쳐 더욱 미궁으로 빠져간다. 이 빠져드는 무지와 무명(無明)에 고통이 있음을 부처님 말씀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빠져듦 속의 한계를 바라보는 우리로서는 ‘가섭의 고민’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 현실은 가섭의 시대와 다르다. 여성의 업이 제도 속의 모순이라는 과학적 이해를 표방하고 여성해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우리 사회 속에서 이 운동이 발전하여, 이제 여성해방 운동은 남성과 함께 가는 <남성해방>까지 포함하는 인간해방의 논리로 풀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문제도 많은데, 무엇보다 운동의 대중 주체가 확고하지 못한 점이 큰 고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불교 여성관의 입장은 무엇일까? 사회 운동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현실>이 우리에게 던져져 있는 세속의 진리[속제]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제이다. 여기서 논의상으로 사회의 여성 운동을 속제로 삼는 것은 적어도 업을 <본성>으로 뽑지 않는 점, 즉 성차별이 사회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불교 여성관의 <진제>를 세우는 까닭은 현실의 고통문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성문제에 <진속이제>를 세워 여성문제를 다시 보는 새로운 입장이 불교의 입장이다.
이렇게 이제를 세움으로써 현실의 여성 문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출발한다.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일은 진속의 이제를 거듭 극복하는 실천상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치 ‘가섭의 고민’이 대승불교에서 보살 사상으로 해결되자 이 문제는 또 다시 우리 자신에게 행(行)으로 던져진 것처럼, 마치 부처님의 진리를 향한 ‘보살’의 정진이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한국 여성의 문제가 불자들의 실천문제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입장은 적어도 두 가지의 이익이 있다. 첫째는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하는 문제를 우리사회의 구체적 현실에서 가져다 준다. 둘째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하는 방법으로 자비와 인욕과 정진 등 바라밀다행이자 보살행에서 찾게 한다. 전자는 오늘날 우리 불교 현실에서 파사현정의 정법으로 현실을 보는 눈을 밝게 한다. 후자는 먼 길에 지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대중주체의 견고함을 서게 한다. 또한 무엇보다 불자로서의 자비 정신을 잃지 않게 한다. 가다가 막히면 부처님께 물어야 한다.  
부처님 근본 사상의 평등과 해방[成佛]은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열림을 보장한다. 대승불교 사상이 이룩한 실천 주체[菩薩]는 성불에서 물러서지 않는 튼튼한 힘을 갖고 있다. 평등사상의 대승적 구현에는 우리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희망이 있다. 이 역사 가운데 있는 여성의 모습은 소승적인 ‘가족주의’의 한계를 벗고 당당하게 선 대승 보살의 얼굴일 것이다. 대승불교운동이 출가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재가의 한계도 스스로 벗어던졌던 승만 부인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현재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는 천만에 가까운 여성불자의 힘은 참으로 무한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섭의 고민’은 남아 있다. 우리 현실에 무슨 여성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등 사부대중의 다수가 사회 여성운동의 진보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거나, 그 문제를 외면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금 모습이 보수적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의 벽이 역시 고민으로 놓인다. 이때 다시 제기되는 속제는 불교계 현실이다. 이미 여성 불자들의 관심이 무수한 ‘회향(回向)’으로 사호와 역사를 향해 노력하고 있음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시민 운동, 통일 운동, 복지활동 등 많은 불교 사회운동 단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노력들을 현대적 의미로 풀어가고, 조직적으로 연대하는 힘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없거나 모자라는 것으로 잘못 안다. 지난 7월에 승가, 청년, 시문 운동 등 18개 단체가 연대한 <전국불교 운동연합>을 출범한 것은 주목되는 불교운동의 새로운 힘이다.


4. 맺는 말

불교의 새로운 힘을 기대하며 여성문제에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시대 여성의 자기 한계를 ‘가족이기주의’로 몰아 붙여도 역시 여성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움직이고 있다. 여성 취업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여성들이 취업을 사회적 요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동 여성의 처우, 그들의 가사와 육아 문제는 여성의 능동적인 사회 진출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또 기성세대와 신세대 가치관의 변화에도 여성 문제는 덧붙여진다. 고부간의 갈등, 늘어나는 이혼 문제, 성폭력 등 변화한 사회 속에 달라진 여성의 업들, 정신대 문제, 이산 가족 등 역사와 분단의 업들, 여기에 대한 불교의 자비와 지혜는 무엇일까?
이 문제들을 소 발자국에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승불교운동이 ‘보살’을 새로운 차원의 언어로 창조했듯이 우리 시대 불교도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해탈’을 사회 변혁과 해방의 언어로 창조한 것은 큰 변화였다. 그러나 이것이 소 발자국인지 바닷물인지는 실천의 언어들이 말해 줄 것이다. 이 글의 한계도 이 속에 있다. 우리가 던진 질문에 대한 구체적 모색을 함께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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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귀하가 올린 글입니다. 밑줄 쳐 주신 부분 바로 밑 혹은 그 근처에 그부분을 반박하는 내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교 역시 초기에는 여성차별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여성 차별을 인정하는 종파가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나 제가 파랗게 밑줄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의 대승불교는 공식적으로 여성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이 글 전체는 불교의 여성관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불교는 언제나 여성을 평등하게 바라보았으며 최고의 종교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엄격한 카스트제도 하의 인도에서 초기불교에는 분명히 여성차별이 있었을것이며 그것은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교리개혁이나 연구를 통해 참된 불교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위에서 아난존자께 설하신 바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이라도 출가하여 성불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또한 여성 종교지도자를 말씀하시는데 불교의 계율상 출가사문은 삭발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남성보다 여성의 출가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는 아니라도 수많은 여성재가신자들이 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