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페미니즘 :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2008. 7. 19. 23:15일반/가족·여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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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페미니즘 :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1. 불교계의 여성 인식과 그 의미
부처님의 여성 출가자 수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여건에서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도의 사회구조와 반여성적 풍토는 여성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으며, 특히 종교행위를 가장 신성한 행위로 간주했던 인도인의 생활방식에서 여성의 종교생활은 커다란 도전이었고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부처님 입멸 후 팔경법 속에 보이는 여성출가에 대한 부처님의 유보적 태도는 불교계에 여성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시각을 낳게 했다. 바로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과 여성성불론(女性成佛論)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시각에 대한 논의는 불교계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밝히는 좋은 전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불교계가 부처님의 사상을 어떤 시각에서 사회 문화적으로 교섭하며 친여성적 문화를 창출해 갔는가를 살필 것이다.


1) 부파 및 초기 대승불교의 반여성적 사상
초기 경전인 《아함경》이나 율전의 원형 부분에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가 널리 전파되는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누락됨이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성관이 그대로 일반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함경》과 율전의 원형 대부분은 마우리아 왕조기에 성립되었다. 마우리아 왕조는 불교를 치국이념으로 할 정도로 불교에 호의적인 왕조였다.
이 점 때문에 인도사회에 팽배해 있던 왜곡된 여성관에 흔들리지 않고 부처님의 여성관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옹호하던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하고 슝가 왕조가 인도에 세워지고 바라문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불교는 종교적 탄압을 받게 되고 안정된 교단생활이 보장될 수 없었다. 불교계가 인도 정국과 교단 내의 변화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불교계의 여성관도 사상적 혼란과 왜곡이 심화되게 된다.


이 시기 불교계는 여러 개의 부파로 점차 나뉘면서 각 부파교단마다 계율과 수행생활에 다소의 차이가 생기고 부처님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수행생활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또한 바라문 부흥운동은 반여성적 문화를 일상생활에까지 미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바라문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문교에서 주목한 것은 일반대중들의 일상생활을 깊이 지배하는 제의적 행위의 전통이었다. 그래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와 의례적 규범들을 상세히 규정한 경전이나 고대 인도인의 생활규범을 더욱더 완전하게 체계적으로 제정해 놓은 법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사상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 법전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것이 《마누법전》이다.


이 법전의 저술 목적은 남성의 생애를 네 주기로 나누고, 이 시기 동안 지켜야 할 사회적 의무와 규범들을 준수하며 살아가도록 하여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마누법전》에서 규정하는 생의 네 주기는 남성 위주의 행위규범으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마누법전》에는 “여성은 늘 독립하지 않는다.” “계집은 본래가 악성이다.”는 등의 표현과 함께 “베다를 독송함이 불가능하다.” “제사를 행할 수 없다.”는 등 차별 발언이 곳곳에 실려 있다.


이러한 편견에 의해 여성은 재산소유와 유산상속에서 제한을 받았다. 여성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조상과 신들을 위해 종교적 의무를 계승해 나갈 사내 자식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누법전》 등에 “여성의 자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명기하고 여성은 출가 전에는 친정아버지를, 출가 후에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하는 의존적 인격체로 명시한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행동이 아내의 최고 의무이며, 조상의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식을 낳는 것이 절대조건이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이혼을 당했다. 이것은 당시 인도인들이 현세의 자손이 영속적으로 제사의 책임을 다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내세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중시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장례식을 집행하고 조상의 봉제사를 계속 이어갈 자식을 이 땅에 남긴 자만이 천상에 이르러서 환희에 흘러넘치는 생활을 지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임신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처와 반드시 동침할 것을 종교적 의무로서 부과할 정도였다. 남아를 낳지 못한 여성이 버림과 구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의 이론적 뒷받침에 근거해 여성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고 감시하는 반여성적인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전대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구속이 강화된 것이며 반여성적인 문화가 확고하게 인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계의 친여성적 성향도 변화를 겪게 된다. 불교계의 친여성성은 부파불교와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반여성적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의 사상이 교단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여성불성불론은 주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래32상호설(如來32相好說)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여인오장설이란 여성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 제석천·범천·마천·전륜성왕·부처님과 같은 존재는 될 수 없다는 사상이다. 실로 여성의 종교생활 전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불설초일명삼매경》 《법화경》 《대지도론》 같은 경론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인 《불설옥야경》 등에는 삼종설(三從說)은 있는데 오장설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기원전 1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론에 보이는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여인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첫째 범천왕이 될 수 없고,

둘째 제석,

셋째 마왕,

넷째 전륜성왕,

다섯째 부처님이 될 수 없으니 어찌 여인으로 성불을 빨리 이룰 수 있으리오.(《법화경》 〈제바달다품〉) 또 여인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전륜성왕·제석천왕·마왕·범천왕·부처님이 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대지도론》 권 2)


이와 같이 기원 전후의 불교 교단은 여성을 불완전한 인격체로 인식하여 부처님이 말한 평등사상과 위배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당시의 불교교단은 교단의 분열과 대승불교의 출현 등 내외적인 사상의 변화가 아주 심한 과도기 상태였고 불교계를 주도하던 이들 대부분이 남성 출가자들이었다. 또한 경·율·론을 정리, 편찬한 주체도 남성들이었으므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이 전적에 배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여성적 인식이 교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성도 하기 힘든 수행의 최고 경지에 여성이 오를 수 없다는 몰이해를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론에 보이는 오장의 전거들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설(親說)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법화경》의 언급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 성문 사리불이 말한 것이다. 또한 《대지도론》의 내용도 논자가 말한 것이며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친설은 아니지만 교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경론에 삽입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승불교의 출현은 불타관(佛陀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을 추모하고 이상화하는 작업은 부처님의 신체를 32개의 모습으로 정형화하였다.

 

다시 말해 여래는 범부와 달리 성스런 32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 가운데 음마장상(陰馬藏相)이란 것이 있다.


여래의 성기가 말의 성기처럼 숨겨져 있다는 의미로서 여래는 여성이 아니라 바로 남성이라는 것이다. 원래 남자였던 부처님의 모습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여래를 남성으로 정형화한 것에 불과하나 후대에 여성불성불설을 자리잡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와같이 부파교단 및 일부 초기 대승불교 교단에 여성오장설과 여래32상호설이 유포되면서 교계에 남성 우위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